지역 복음화(20)
광야의 기적
마태복음 14:13-21
(2018 05. 27)

  우리가 금년에는 예수님의 사역의 발자취를 따라 지역 복음화에 힘쓰는데요. 지난주일 세례 요한의 순교는 예수님께 큰 충격이 되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역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졌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떠나가셔서 빈들에 이르게 되었어요. 그러자 수많은 무리들이 여러 마을로부터 나와 따라간 거예요. 그런데 그 외딴 들녘인 디베랴의 갈릴리호수 건너편(요6:1) 광야에서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세요. 그것은 한 어린아이가 가져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와 어린아이 외에 오천 명을 먹이신 거예요. 유대인의 인구 계수법에 따라 남자 성인들만 오천 명이니까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포함하면 약 이만 명에 이르렀을 거예요. 여러분, 어떻게 이러한 광야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요즘처럼 IMF 때보다 더 살기 어렵다는 어려운 때에 광야의 기적이 너무도 절실한 삭막한 현실 속에서요. 오늘 가정주일이요, 청년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도 어떻게 광야의 기적을 일으키며 살아갈 수 있는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서로를 불쌍히 여겨야 함
  먼저 본문 14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수많은 무리를 보시고요. 왜 여기까지 따라 오느냐고,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왜 이렇게 구름떼 같이 많이 몰려 왔느냐고,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몰려오면 나 혼자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너무도 피곤에 지치셨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결코 귀찮게 여기시지 않으셨어요. 외면하시지도 않으셨어요. 멀리 하시지도 않으셨어요. 소홀히 여기시지도 않으셨어요. 오히려 얼마나 은혜를 사모하였으면 오죽하면 이 먼 거리까지 따라오고요. 그것도 마을 사람들이 다 몰려오고요. 저녁이 되도록 가지도 않고요. 배고픔을 참고 기다릴까 하시면서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어요. 여기 “불쌍히 여기셨다”는 단어가 헬라어로 ‘ἐσπλαγχνίσθη(에스플랑크니스테)’라는 단어를 쓰는데요. 영어로는 'had compassion on' ‘was moved with compassion'으로서 그들의 아픔을 깊이 느껴서 “불쌍히 여겨지는 감동이 되셨다”는 뜻이에요. 또한 그들 가운데 병자도 고쳐주셨고요. 그들의 배고픔도 채워주시고자 하셨던 거예요. 더욱이 당시 유대의 관습에 따르면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가르친 분에게 자기 집으로 초청을 하고요. 먹을 것을 공급하는데요. 지금 주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거꾸로 사랑으로 섬기고자 하신 것이 더욱 감동적인 거예요. 바로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의 광야의 기적이 주님으로부터 시작되었어요. 이 단어는 복음서에서만 나오는 단어로서 예수님께서만 사용하셨는데요.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그 광야의 기적이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말세의 마지막 고통하는 때가 이르면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뿐만 아니라요(마24:12).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배신하며 조급하며.....”(담후3:3-4)라고 증거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사랑의 예수님을 믿는다는 교인들의 마음마저도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다 사라지고요. 점점 강퍅해지고 완악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천국과 같이 행복하고 축복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요. 가족들 사이에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해요.

<예화: 아내의 잠옷>
아무리 가족들이 많이 배우고요. 높은 지위에 오르고요. 돈을 많이 벌고요. 자식들이 잘 되고요. 심지어 신앙의 직분이 중요하다고 해도요. 서로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요. 결코 정을 느낄 수가 없고요. 진정으로 사랑할 수도 없고요. 서로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섬길 수도 없고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도 없고요. 은혜롭고 축복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는 거예요. 더구나 그들 가운데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하고요. 치유 받지 못하고요. 양육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으니 어떻게 해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해요. 그런데 지나간 세월을 함께 살아오면서 상처를 주고받다가 보니깐요. 불쌍히 여길 마음이 안 생기는 거예요. 그것이 현재의 우리 가정의 비극인 거예요. 이렇게 힘으로, 능으로 안 될 때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 힘으로, 능을 안 될 때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하고요. 치유의 은혜를 받으면요. 내 감정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도 없지요.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심으로 그들도 상처의 피해자이고 희생자임을 기억하면서요. 불쌍히 여기게 되는 거예요.

<예화: 제15기 부부행복동산>
그렇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진정으로 천국과 같이 행복하고 축복된 가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서로를 불쌍히 여겨야 하고요.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서로를 불쌍히 여겨야 하고요. 형제와 자매들 사이에도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요. 시가 식구와 처가 식구와의 사이에도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도 서로를 불쌍히 여겨야 해요. 영적인 가족인 교인들 사이에도 서로를 불쌍히 여겨야 해요. 한 번 주위 사람들을 쳐다봐 보세요. 불쌍하게 보이지 않으세요? 우리 교회 내에도 가장 먼저 시작된 정신지체장애를 위한 사랑부 자녀들과 또 작년에 시작된 말을 하지 못하는 농인교회 교인들과 북녘 고향산천에 부모형제를 남겨두고 떠나와 외롭게 살아가는 탈북민교회 교인들이 있는데요. 우리 모두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의해서 서로를 불쌍히 여기게 될 때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고요. 용서하게 되고요. 사랑하게 되고요. 섬기게 되고요. 진정으로 행복하고 축복된 가정을 회복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전서 3:8-9에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불쌍히 여기라고 명령하시면서요. 그 놀라운 천국의 행복과 축복이 자손대대로 이어질 것을 약속하신 거예요. 그러므로 가장 먼저 우리의 육적인 가족들이나 영적인 믿음의 가족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를 불쌍히 여길 때 진정으로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을 놀랍게 누리는 광야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조그만 것이라도 함께 나누어야 함
  계속해서 본문 17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저녁이 되었는데요. 유대인의 법에는 저녁이 두 번 있는데요. 15절에 나오는 저녁은 오후 3시 이후의 해질 무렵이고요. 23절에 나오는 저녁은 오후 5시 이후의 해가 진 저녁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 6장을 보면요. 그 해질 무렵 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루 종일 굶주리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을 시험코자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하고 물으셨을 때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00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하고 계산부터 먼저 해요.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까 우리나라 원화로 10만원 잡으면 2,000만 원 정도는 들 거라는 거예요. 또 안드레는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왔지만 그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하고 물어요. 쉽게 표현하면 “그걸 가지고 누구 입에 붙이겠습니까?”하고 인간적으로 판단이나 한 거예요. 그러나 정작 광야의 기적은 한 어린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바친 데서부터 일어났던 거예요. 여기 이 어린아이가 싸 온 음식은 당시 갈릴리 사람들의 일상적인 도시락으로서요. 여기 ‘떡’은 헬라어로 ‘ἄρτους(아르투스)’라고 해서 보통 밀이나 보리로 만든 둥근 빵으로서 서로 떼어서 먹었어요. ‘물고기’는 ‘ἰχθύας(익뒤아스)’라고 해서 소금에 절이거나 불에 구운 것으로 빵의 반찬이 되었어요. 이것은 한 사람 정도가 먹을 수 있는 양밖에 안 되었어요. 그러나 한 어린아이의 작은 정성이지만 주님께 바쳐진 데서 광야의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이것을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하잖아요?

<예화: 아이가 말한 ‘오병이어’의 뜻>
우리도 주의 일을 하다 보면요. 4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데요. 헌신은 하지 않고 뒤에서 방관하는 ‘구경꾼’이 있고요. “일이 되느니, 안 되느니, 그래 가지고 계산이나 하고 비판이나 말만 많은 ‘말꾼’이 있고요. 더 나아가 “뭐가 문제냐? 누구 책임이냐?”하면서 사사건건 시비나 걸고 싸움이나 걸어오는 ‘싸움꾼’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이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믿음으로 물심양면으로 헌신하고 바쳐지는 ‘일꾼’이 되어야 해요. 결국 교회의 수많은 일들은 수많은 교인들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요. 헌신된 일꾼들에 의해서 가능한 거예요.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이 아무리 지식이 많고요. 경험이 풍부하고요. 세상 지위를 얻고요. 많은 부를 쌓아도요. 주님 앞에 바쳐지지 않고요. 나누지 않고요. 베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고요. 아무런 소용도 없고요. 아무런 쓸모도 없는 무용지물에 불과해요. 그러나 한 어린아이의 점심 도시락처럼 바쳐지면 그것이 아주 작은 규모이고요. 아주 작은 액수이고요. 아주 작은 시간이고요. 아주 작은 재능이고요. 아주 작은 정성이라고 할지라도요. 주님께서 기적적으로 역사하셔서요. 수많은 사람을 먹이고 남음이 있는 광야의 기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하여 가장 먼저 서로에게 넘치는 은혜의 감동이 있어요.

<예화: 사오정과 강도>
더 나아가 부족함이 없는 축복이 되고요. 감격스런 행복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가장 복된 것은 자손대대로 기적의 축복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거예요. 멀리 갈 것도 없어요. 우리 교회 안에서도 보면 너무도 은혜롭고 축복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가정들을 보면요. 대부분 조부모님이나 부모님들의 신앙이 신실하셨을 뿐만 아니라 물심양면으로 헌신하고요. 충성스럽게 봉사하였기에 오늘의 주님 안에서 복된 우리의 가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움켜쥐면 잘 살 것 같아도요. 인생을 살아보면 절대 그렇질 않아요. 나누고 베푸는 사람들이 어렵게 살 것 같지만요. 오히려 더 여유롭고 더 충성하고 더 복되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조그만 것이라도 주님께 바치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갈 때, 누가복음 6:38의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광야 같은 인생 가운데에도 조그만 것이라도 나누고 베풀 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광야의 기적이 일어나서요. 자손대대로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와 축복과 행복을 체험하며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야 함
  마지막으로 본문 19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마가복음 6장과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수많은 군중들을 잔디 위에 50명씩, 100명씩 앉히셨는데요. 여기 ‘앉히셨다’는 단어가 헬라어로 ‘ἀνακλιθἡναι(아나클리테나이)’라고 해서 유대인들이 평상시 식사 자세처럼 비스듬히 누워 “기대어 앉게 한” 거예요. 그리고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세요. 여기 ‘축사하셨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εὐλόγησεν(율로게센)’이라고 하는데요. 영어로는 ‘gave thanks' 즉 ’감사드렸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무리들에게 나눠주시도록 했는데요. 나눠도 나눠도 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2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요. 그런데 그렇게 나눠 먹었는데도 또 남아서요. 바구니에 담았는데요. 여기 '바구니'는 헬라어로 ‘κοϕίνομς(코피누스)’라고 해서 버드나무 가지로 만들었는데 그 때 당시 유대 서민들이 사용한 것으로서요. 유대인들이 여행을 갈 때 음식과 잠자리에 필요한 도구를 담고 다니던 휴대용 가방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열 두 바구니를 차고 넘치게 거두었다는 거예요. 이 얼마나 놀라운 광야의 기적이에요? 여러분, 감사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가장 소중한 은혜와 축복의 열쇠예요. 왜냐하면 아무리 우리가 말씀의 은혜를 받고요. 기도의 능력을 얻고요. 찬양의 기쁨이 넘치고요. 은혜도, 축복도 많이 받고요. 교회의 중한 직분을 맡았는데도요. 사탄에게 속아서요. 교만해지는 순간부터 감정을 풀지 못하고요. 감사를 하지 못하고요. 입을 열어 불평하고 원망하기 시작하고요. 끝까지 미워하고 온갖 험담을 쏟아놓으면서요. 과거의 자신이 쌓아놓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요.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고 무덤을 파고 마는 거예요.


감사하지 못하는 삶은 진정으로 십자가의 사랑의 주님을 믿음을 사는 삶이 아니라 자기 위안의 종교행위를 하는 삶인 거예요.
이 얼마나 불쌍하고 불행한 일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함 속에 감사하는 순간에 주님의 위로를 받고요. 새 힘을 얻고요. 행복의 감격이 용솟음치고요. 새로운 축복이 싹트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은혜롭고요. 축복되고요. 행복하게 살려면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해요.

<예화: 교황곡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예화: 뇌경색 수술을 받은 권사님의 감사>
그렇습니다. 감사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완전히 바꾸는 대역전의 도구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감사하는 순간 조금 전까지의 삶과는 완전히 다르게 모든 것이 만족하고요. 행복하고요. 감격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골로새서 3:15의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고 계세요. 그 뿐만이 아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8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분명히 증거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의 약속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일에 감사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주님의 평강이 임하게 되고요. 행복이 찾아오게 되고요. 진정으로 복되게 살고요. 날마다 광야의 기적이 일어날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탤런트 차인표 집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다 지나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에게 가정을 허락하셨을까요? 왜 우리에게 복되고 잘 살라고 하셨을까요? 오히려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요. 그마한 것이라도 함께 나누고요.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될 때, 아무리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 가운데에도 광야의 기적이 일어나서요. 평생토록 날마다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서 주님과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 의미 있고, 보람되고, 복된 여생을 살아가는 우리 온 가정들과 그 자녀손들이 모두 다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