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복음화(26)                                                                                            (2018. 07.08)
 나를 따라오려거든 / 마태복음 16:24-28                                                                                                              
     지난 주일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계기로 예수님께서 그의 고난을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예고하셨어요. 사실은 그 전에 예수님의 고난의 암시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9:15)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8)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에 세 차례 있었지만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공개적으로 예고하셨을 때 나타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반응을 통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3단계의 신앙이 무엇인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야 함(24절 상반절)
     먼저 본문 24절 상반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지난 주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요(προσλαβόμενος, 프로스라보메노스, 곁에 붙잡고요). 항변하면서요(ἐπιτιμἁν, 에피티만, 책망까지 하면서요) “주여 그리 마옵소서(ἵλεώς σοι, κύριε, 히류스 소이, 퀴리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긍휼히 여기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해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가 마치지 못한다고 단정하니 이 얼마나 교만한 모습이에요?
     우리가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가 되면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영적 지도를 받기보다는 판단하고 비판하고요. 감정 풀지 않고 끝까지 반대하고요. 따지고 달려들려는 유혹을 받아요. 스스로 자신의 교만한 부끄러운 모습만 보여주고요. 교만의 수치를 면치 못하고요. 결국에는 은혜와 축복과 행복의 무덤을 파고 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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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교만에 빠진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며 신랄하게 책망하신 거예요.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서 사탄을 명령하여 내어 쫓아내실 때 “사탄아, 베드로 뒤로 물러가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요. “내 뒤로, 즉 예수님 뒤로 물러가라!”고 명령하신 거예요. 다시 말하면 사탄의 우리를 향한 시험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보다 주님을 대적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 대한 책망에서 이제는 모든 제자들을 대상으로,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를 향하여 말씀하세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 말씀드리면요. “솔직히 말해서 너희들도 다 베드로와 같은 욕심과 욕망들이 있지 않느냐? 그래서 조금만 칭찬해도 금방 교만에 빠질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느냐? 그러나 너희들이 그렇게 나를 믿고 따랐다면 잘못 믿고 따른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부터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다시 말하면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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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우리가 갖가지 욕심과 욕망의 자아의 문제를 이겨낼 수 있는 길은 간단해요. 자기가 죽어지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진 사람은 어떠한 상처나 시험에도 결코 흔들림이 없이 이겨낼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갈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부인해야 할 이 ‘자기’가 뭐냐는 거예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자기야!” 할 때의 그 ‘자기’예요? 아니면 싸울 때 책임을 전가하면서 “자기 때문이야!” 할 때의 ‘자기’예요? 여기 나오는 ‘자기’는 문자적으로는 헬라어로 ‘ἑαυτὸν(헤아우톤)’ ‘자기 자신(himself)’을 말하는데요. 실제로 그 단어를 영적으로 해석하면 자신의 뜻이나 의지, 더 나아가 육신의 욕심이나 욕망으로 가득 찬 자아를 의미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부인해야 우리가 주님을 바로 따라갈 수 있다는 거예요. 여기서 ‘부인한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ἀπαρνησάσθω(아파르네사스토)’라고 해서 ‘deny(부인하다), reject(거절하다)’라는 뜻이 있어요. 다시 말하면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데요. 자신을 이미 죽은 사람처럼 취급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해요. 그렇다면 왜 우리가 자아를 부인해야 할까요? 로마서 8:6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증거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잠시잠깐의 낙을 위해 육신의 자아를 따라갈 때는 결국 불행과 고통과 사망에 이르고 말지만요.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성령을 따라갈 때는 궁극적으로 평안과 축복과 생명에 이르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성격과 기질과 욕심과 욕망의 자아가 죽어진 사람처럼 부인해야 하는데요. 한 순간의 그 성격과 기질과 욕심과 욕망에 대해 죽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스스로 인생의 발등을 찍고요. 서로의 가슴을 후비고요. 가정의 행복을 깨뜨리고요. 직장도 파산에 이르고요. 심지어는 이러한 상처와 핍박의 시험을 견디다 못해서요. 영적 싸움에 패배하고요. 그 동안 지켜왔던 신앙과 사명마저도 외면하고 떠나가 버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아요?
     “주여! 주여!.....”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요. 그 십자가에서 우리도 죽었음을 확신하고요. 고백하고요. 체험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서만 천사처럼 살고요. 예배드리고 은혜 받을 때만 천사처럼 살고요.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잘 풀리고 기분 좋을 때만 천사처럼 살고요. 더 나아가 성령 충만할 때만 천사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요.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5:31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듯이요. 우리가 날마다 순간마다 자아에 대해서 죽어져서요. 자기 부정의 삶을 살아갈 때 진정으로 주님의 뒤를 따르며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의 삶을 회복하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자기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함(24절 중반절)
     계속해서 본문 24절 중반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우리가 가장 먼저 자기를 부정하고 나면요. 부활의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처럼 부활의 영광이 있기 전에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다는 거예요. 내가 져야 할 십자가가 우리의 가정에도 있고요. 직장에도 있고요. 이웃에도 있고요. 심지어 교회 안에도 있어요. 다시 말하면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우리가 희생하고 헌신해야 할 ‘자기 희생’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말세의 마지막 때 교인들은 결코 십자가의 자기 희생을 하려고 하지 않고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부활의 영광만 얻으려고 하는데 말세 교인들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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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자기 희생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심리학에 ‘프레임의 법칙(Frame Law)’이란 것이 있는데요.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상황 속이라도 성경의 틀 속에서 해석해야 해요.
그것은 우리의 어떠한 고난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고린도후서 5:14-15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세요. 우리가 자기 희생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이제는 다시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요. 오직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고요. 또 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요. 나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지는 희생을 감수하는 거예요. 그리할 때 나만 희생하고요. 나만 손해 보고요. 그것으로 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아도요.
더 큰 놀라운 감동으로 남아 있는 거예요. 이처럼 우리가 지금까지 가정과 직장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십자가를 져왔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가 있음을 감사해야 해요. 이것은 누군가의 자기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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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러한 우리의 삶 가운데서의 조그만 희생이 서로의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고요. 아름다운 감동으로 남아 있고요.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하는 가장 큰 힘과 복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2:24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약속하시고요. 이 말씀의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과 상처와 질병을 위해 돌아가심으로 인해서요. 우리가 구원받고 이렇게 은혜롭고 행복하고 축복된 신앙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요. 우리 기독교가 지금 전 세계 인구 76억 4천만 명 가운데 1/3인 25억 5천만 명이 예수님을 믿는 최대의 종교가 된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기 희생’의 삶을 통해 수많은 감동적인 삶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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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도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는 자기 희생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뒤를 따르게 되며 우리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결단코 헛되지 않아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자기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함(24절 하반절)
     마지막으로 본문 24절 하반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처음에 “나를 따라오려거든(오피스 무 엘테인)”의 “육신적으로 따라간다”는 의미와 다른 헬라어로 ‘ἀκολουθέιτω(아콜루테이토)’라고 해서요.
우리가 자기 부인을 하고 자기 희생을 하면서요. 그냥 주님 뒤만 따라가라는 말씀이 아니라 영적으로 그의 삶을 본받으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것도 앞에 나온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일회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단순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주님을 따르라’는 단어만은 현재형으로 계속 진행되는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일생토록 주님을 본받아 변화되는 ‘자기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진정한 ‘자기 성화’의 삶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한 가운데 그리스도를 본받아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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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어린 학생들의 장래를 죄우하는 우리의 교회학교 교육이 중요하고요. 교사들의 사명이 중차대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믿음의 확신과 체험 속에서 가르치지 않으면요. 교회학교 교육이 지식 전달이나 도덕교육에 그칠 뿐이에요.

     이제는 우리 교사들부터 믿음의 확신과 체험을 가지고요. 우리 자신부터 예수님을 본받아 성화되는 삶을 살아가고요. 우리가 가르치는 자녀들이나 학생들이 우리를 본받아 우리의 뒤를 이어 성화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론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에베소서 4:15-16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증거하세요. 다시 말하면 우리의 성화의 삶은 우리가 성령님을 모신 삶의 첫 번째 열매가 사랑이기도 하지만요(갈5:22). 고린도전서 12:31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하시면서 13장 사랑장의 말씀으로 들어가서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고 하면서요. 13:13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증거하셨는데요. 말세 마지막 때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사탄이 예수님의 재림에 밀려 이 땅에서 극렬한 역사를 일으키면서요. 한국 교회를 융단폭격을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에게서 가장 식기 쉬운 것이 바로 이 사랑이에요(마24:12).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까지 상처를 받고요. 시험에 빠지고요. 신앙이 흔들리고 있어요.

예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초로 도쿄를 폭격한 미 공군 중위 드 샤저 이야기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듯이 우리가 어떠한 원수라도 사랑하고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여 주셨듯이 우리가 어떠한 원수라도 용서하고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오래 참고 기다리셨듯이 우리가 어떠한 원수라도 오래 참고 기다릴 때에 언젠가는 어떠한 원수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지난 수요일 저녁 전국에서 4,000여 명에 가까운 장로님들이 모인 전국장로회연합회 수련회에서 그렇게 외쳤어요. 이제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되었다고 목에 힘이나 주고요. 권위나 내세우고요. 따지기나 하고 시비나 걸고요. 남에게 상처를 주고 시험에 빠뜨리면서요. 교회의 걸림돌로 살다가요. 어느 날 갑자기 세상 떠나게 된다면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무슨 복이 있고요? 하늘나라에 가게 될지도 모르지만요. 만약에 가게 된다고 해도 무슨 상이 있겠어요? 이제 남은 여생이라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화되어서요. 누가 보더라도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고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요. 주의 종들로부터 칭찬듣고요. 주위 교인들로부터 사랑받고요. 가족들로부터 존경받고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그러한 장로님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길 바란다고 눈물로 간절히 호소했어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떠한 고통스럽게 하는 원수와 불행한 환경이 있어도요. 끝까지 십자가의 주님만 바라보며 ‘자기 성화’의 삶을 살아감으로요.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뒤를 따르게 되며 언젠가는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다 변화되어 남은 여생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의 삶을 모두 다 회복하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오스트리아 평신도 선교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나눔과 배려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마리안느와 마가렛 선교사님은 그와 같은 일생을 사실 수 있었을까요?
자기 부인을 하고요. 자기 희생을 하고요. 자기 성화를 이루며 주님 뒤를 진정으로 따랐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도 자기 부인의 삶을 살고요. 자기 희생의 삶을 살고요. 자기 성화의 삶을 살아가면요.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요. 주님께서 기뻐 받아주시고요. 주위에 감동을 주고요. 칭찬 받는 의미 있고 보람되고 복된 삶을 모두 다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