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복음화(37) (2018. 9. 23 오순절 후 열여덟번째주일)
가서 이와같이 하라/ 누가복음 10:29-37             


우리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오늘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하루 길인 30km 정도 떨어진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됩니다. 그런데 한 제사장이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피하여 지나갔다’는 단어가 헬라어로 ‘ἀντιπαρἡλθεν(안티파렐텐)’인데 ‘반대 방향으로 피해 가버렸다(passed by on the other side)’는 것입니다. 제사장으로서 이웃의 생명을 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의 의무를 외면한 것입니다. 그 다음은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레위인은 앞서 지나간 제사장과는 달랐습니다. 헬라어 원어성경에 보면 ‘ἐλθὼν καὶ ἰδὼν(엘톤 카이 이돈)’ 영어로는 ‘came to the place and saw him’입니다. 그 장소에 와서 보고나서 피하여 반대 방향으로 피해 가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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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에 사두개파의 소수 귀족들이었던 이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완전히 다른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가 어떻게 이웃을, 아니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했는지를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너무도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 풍요로운 추석 연휴에 사랑하는 부모, 형제, 자녀, 손주, 일가친척,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서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구체적으로 사랑으로 섬겨야 하는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마음으로부터 불쌍히 여겨야 함(33)

눅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오늘본문 말씀은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을 도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유대인이 강도를 만났는데, 유대인과 원수 관계인 사마리아사람이 불쌍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질문했던 율법교사의 개념에 있어서는 자신의 이웃을 이방인까지 포함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편협한 유대인들의 이웃 사랑의 한계를 깨뜨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사마리아인들은 주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인해 당시 수도였던 사마리아를 침략한 앗수르 사람들과 혈혼민족이 됨으로써 유대인들로부터 개처럼 취급받게 되었습니다(왕하 17:24-34). 그래서 북쪽의 갈릴리지방 유대인들이 유대의 명절을 지키기 위해 남쪽의 유대지방에 있는 예루살렘에 갈 때에 지름길인 사마리아지방을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 동쪽을 통해 우회해서 갔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유대인들에게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불쌍히 여겼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랑(Shocking Love)인 것입니다. 더욱이 이 ‘불쌍히 여기다’는 단어인 ‘ἐσπλαϒχνίσθη(에스플랑크니스테)’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애끓듯이 우러나오는 사랑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바로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말세 마지막 때 사랑이 너무도 메말라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한 마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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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순간부터 우리의 모든 부부관계는 다 행복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추석에 만날 부모, 형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을 다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분들을 위로해 드리고, 모든 응어리진 것들을 다 풀어버릴 때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식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치열한 경쟁사회속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가 바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불쌍히 여기는 길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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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무리 상처를 준 원수라 할지라도 끝까지 불쌍히 여기면 우리만 상처받고, 가슴 아프고, 눈물 흘리는 것 같지만 결국은 불쌍히 여기는 우리가 복을 다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8-9에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분명히 약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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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번 추석 연휴에 가서 누구든지 만나거든 이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부터 간구할 수 있길 바랍니다. 어떠한 원수라도 불쌍히 여길 때 우리가 이 놀라운 약속의 복을 모두 다 누리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정성을 다해 몸으로도 섬겨야 함(34)

눅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이 사마리아 사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치지 않고, 그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먼저는 가까이 다가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의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당시에 기름과 포도주는 상처의 소독과 치료를 위한 의약품이었습니다. 또한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습니다. 여기서 주막은 술집이 아니라 당시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하던 상인들이 묵던 여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왜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에 대해 두려운 마음이 없었겠어요? 왜 할 일이 없었겠어요? 왜 시간이 그렇게 남아돌았겠어요? 자신이 고생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성을 다해 몸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일을 할 때 쉽고, 편하고, 좋은 곳은 서로 하려고 하지만 힘들고, 어렵고, 고생하는 자리는 서로 안하려고 합니다. 교회의 어르신들과 영,유아 유모차를 위해서 엘리베이터 양보도 잘 하지 않고, 주차 시설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봉사의 축복을 스스로 걷어차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집에 가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도 안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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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세상에서 몸으로 정성을 다 해서 수고할 때 주님께서는 다 내려다보시고, 다 기억하시고, 일생토록 다 갚아 주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58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분명히 약속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사람을 만나든지, 심지어 상대가 원수일지라도 십자가의 사랑을 가지고, 정성을 다해 몸으로도 섬길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인내하는 가운데 우리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결단코 헛되지 않을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물질까지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함(35)


눅 10: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이튿날 사마리아 사람이 떠나면서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강도 만난 사람을 잘 돌보아 주라도 부탁을 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장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 갚겠다고 합니다. 두 데나리온은 24일 즉 한 달 가까운 숙박료를 말하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사람이고, 더구나 원수와 같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생명을 구해 준 것만 해도 큰 사랑이고, 여관까지 데리고 가서 한 달 요양할 수 있게 해 준 것만 해도 최고의 친절을 베풀어 준 것인데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면서 그 비용까지 다 갚아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물질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약속한 것은 인간으로서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의롭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하고 객관적 대상을 물었던 율법교사에게 주체를 완전히 바꾸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중심으로 한 이웃을 생각한 율법교사에게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중심으로 내가 살아가야 한다는 발상의 대전환을 가져오게 하신 것입니다. 지난 날의 자신 중심의 신앙생활이 이웃 중심의 신앙생활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영적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대전환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주관적 각성을 하도록 되물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너무도 가슴에 뜨겁게 와 닿는 비유의 말씀에 이어 너무도 지혜롭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 앞에 율법교사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자비(ἔλεος 엘레오스, 긍휼)를 베푼 자니라”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이 비유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많은 때 우리의 신앙도 3단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단계는 우리의 신앙이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천국인데 교회 밖으로 나가면 지옥입니다.


둘째 단계는 우리의 신앙이 가정 안에만 머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는 물질도 아까워하지 않고 아낌없이 다 쏟지만 가정 밖에서는 아까워서 벌벌 떠는 것입니다.


셋째 단계는 우리의 신앙이 어두운 세상에까지 펼쳐지는 것입니다. 은혜의 빚진 자로서 주님과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 가라고 하시면 어디든 가고, 주님과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 쓰시겠다면 언제든지 내놓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물질을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20-21에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서 쓴 물질은 하늘 창고에 다 쌓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리교 창시자였던 영국의 존 웨슬리(John Wesley) 목사님도 “우리의 지갑이 회개하기 전에는 진정한 회개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물질의 헌신을 강하게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이번 추석때 부모, 형제, 자손들에게 물질로도 섬길 수 있길 바랍니다. 더 나아가 시골 고향 교회에 가서 감사헌금도 드리고 목사님에게도 격력의 물질도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화) 어느 시골 교회 목사님의 치유하는 교회에 대한 칭찬


우리가 선한 청지기처럼 물질 아까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주님과 고통당하는 부모나 형제나 자손이나 이웃들을 위해 다 쓰게 되면 그 때는 주님께서 우리가 물질을 썼던 것을 다 기억하시고,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6:38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약속합니다.

예화) 제 103회 총회 부총회장 김태영 목사님의 간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번 추석에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형제들이나 자녀 손들이나 이웃이나 어떠한 사람들을 만나든지 마음으로부터 불쌍히 여기고, 정성을 다해 몸으로도 섬기고, 물질도 아까워하지 않고 쏟을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는 틀림없이 하늘의 상과 이 땅의 복으로 우리의 여생과 자손들에게까지도 천 배나 만 배나 갚아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들려주시는 우리 주님의 마지막 명령을 따라 이번 추석에 우리 고향의 사랑하는 부모, 형제, 자녀 손들, 친척, 친구를 만나러 가십시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