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복음화(43)                                                     (2018. 11. 18)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17:11-19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해피데이축제를 갖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의 기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해 동안 곡식을 거두어 저장하게 됨을 감사하면서 수장절(收藏節 The Festival of Ingathering 출23:16, 34:22)이라고도 하고요. 7일 동안 초막을 짓고 지키는 초막절(草幕節 The Festival of Tabernacles 레23:34, 신16:16)이라고도 하고요. 그들의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 장막생활을 기념한다고 해서 장막절(帳幕節 The Festival of Tabernacles)이라고도 해요. 더 나아가 1620년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 땅으로 떠났는데요.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거친 세파와 유난히 혹독한 겨울 날씨와 전염병으로 인해 희생되고요. 미국 매사츠세츠주의 플리머스(plymouth)에 도착했을 때 102명만이 남았어요. 그 다음 해에 처음으로 수확한 열매에 대해 감사하면서 3일 동안 축제를 열고요. 인디언들까지 초대해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데서 시작되었어요. 청교도들의 일곱 가지 감사는
첫째, 180톤밖에 안 되는 작은 배지만 그 배라도 주심을 감사
둘째, 평균시속 2마일로 항해했으나 117일간 계속 전진할 수 있었음을 감사
셋째,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남을 감사
넷째, 폭풍으로 큰 돛이 부러졌으나 파선되지 않았음을 감사
다섯째, 여자들 몇 명이 심한 파도 속에 휩쓸렸지만 모두 구출됨을 감사
여섯째, 인디언들의 방해로 상륙할 것을 찾지 못해 한 달간 표류했지만 결국 호의적인 원주민들이 사는 곳에 상륙하게 해 주심을 감사
일곱째, 고통스러운 3개월 반의 항해 도중 단 한 명도 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었음에 감사였어요. 그리고 그 후 1941년부터 11월 네 번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로 지키고 있는데요.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11월 셋째 주일인 오늘을 추수감사주일(Thanksgiving Sunday)로 지키고 있어요. 우리는 오늘 또 다시 한 해 동안의 은혜에 감사하는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요. 얼마나 감사의 삶을 살고 있어요? 오늘 본문엔 한 사마리아인의 감동적인 감사가 나와요. 이 사건은 마태복음 8:2-4, 마가복음 1:40-45, 누가복음 5:12-16과는 다른 사건으로서 우리의 남은 여생을 어떻게 감사하며 살 것인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간절히 바랍니다.

1.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심을 감사해야 함
본문 11-12절 상반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예수님께서 베뢰아 지방에서 전도하실 때 세 번째 예루살렘으로 가시게 된 거예요(눅9:51, 13:22).
그런데 사마리아 지방과 갈릴리 지방 사이의 접경지대를 따라가셨어요. 사마리아 사람의 거절(눅9:53) 이후 사마리아 지방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접경지대를 따라 남쪽으로 가신 거예요. 그러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세요. 왜 그냥 지나치실 수도 있었을 텐데 구태여 그 마을로 들어가야 하셨겠어요? 그 나병환자들을 구원하시고요. 치유하시기 위해서였어요.

     지난 날 우리도 이 나병환자처럼 죄로 인해 멸망당할 수 있었는데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영광스러운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어요. 그리고 다시 살아나셔서 천국에 올라가신 후에는요.
그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셔서요. 그 분께서 우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고요. 머지않아 우리를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하실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지난 날의 불신앙의 죄를 회개하고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악과 상처와 질병을 대신 지셨음을 믿기만 하면요. 지난 날의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고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서요. 우리에게 보내주신 그 성령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요. 천국의 소망과 위로 가운데요.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예화) 남편의 사랑을 늘 의심하는 아내의 질문에 답한 남편의 말 “그래서 지금 같이 살고 있잖아”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하면 그대로 믿으면 되지 뭘 그렇게 따져요?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예요. 성경에 약속한 대로 믿음으로 살아가면 놀라운 기적의 역사들이 일어나요.
예화)SK를 이끄는 ‘명장’ 트레이 힐만 감독의 코칭철학(약 1:26)-말의 통제, 긍정적인 말
이처럼 주님을 우리의 삶 가운데 모셔들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 그 이상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분명히 약속하시지 않습니까? 지금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요. 오늘 우리의 지난 날의 모든 죄악과 상처와 질병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다 쏟아 내려놓고요. 주님을 믿음으로 모시고요.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친히 찾아오심에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생애 가운데 놀라운 주님의 기적 속에 살아가게 될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심을 감사해야 함
12절 하반절부터 13절“.....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예수님께서 한 마을을 찾아 들어가셨을 때요.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있었는데요. 성경에 보면 나병환자 네 명이 같이 있는 기록은 있지만요(왕하 7:3). 이렇게 열 명이나 함께 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율법의 가르침대로(레13:45-46, 민5:2) 민가에서 멀리 떨어져서요. 옷을 찢고요. 머리를 밀고요. 손으로 윗입술을 가리고요. “부정하다! 부정하다!....”하고 외치면서요. 사람들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요. 너무도 외롭고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었어요. 더욱이 당시 나병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죄의 저주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들이 받은 상처의 고통과 불행은 더욱 더 가슴 속 깊이 사무쳤어요. 더욱이 나병환자들은 성대가 약해져서 소리 지르기도 힘든데요.  힘을 다해 소리를 높여서요.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울부짖었던 거예요.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바라보시며 불쌍히 여겨주셨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메말라서요. 계층 간 대립이 있더니요. 그 후에는 이념 간 대립이 있더니요.  그 후에는 세대 간 대립이 있더니요.
요즘에는 성별 간 대립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지난 주간 남자 5명이 여자 2명을 폭행했다는 이수역 폭행사건이 일어났는데요. 알고 보니까 여자가 먼저 폭력을 쓴 거였어요. 그런데 남자들이 달려들어 뼈가 보일만큼 여자들을 두들겨 팼다는 거예요. 왜 이렇게 세상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메말라 버렸는지 몰라요.

예화)‘남존여비’의 원래의 뜻은 “남자를 높이 여기고 여자는 낮게 본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을 뿐만 아니라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요. 우리를 그의 따스한 품에 안아주시고요. 상처 난 가슴을 어루만져 주시고요. 푹 떨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요.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시고요. 손을 잡고 일으켜 주시고요. 더욱이 우리가 일어날 힘조차도 없을 때는 우리를 그의 등에 업어주시고요. 인생의 험난한 위기의 세월들을 함께 하셨던 거예요.
예화)시인 마가렛 피쉬백 파워즈(Margaret Fishback Powes)여사가 쓴 ‘모래 위의 발자국’이라
 네가 본 오직 한 짝의 발자국은 나의 발자국이었느니라 그 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의 일생토록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요.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어요.
예화)비금제일교회 강광일 장로님 · 이원숙 권사님 내외분 이야기
그래서 시편의 기록자는 시편 59:17에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라고 찬양하였던 거예요.
바로 이처럼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심에 감사하고 감격하면서요.
주님의 손을 붙잡고 새 희망을 안고 용기를 내어 일어설 때 오직 주님 안에서 우리의 앞길이 새롭게 열려질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주님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심을 감사해야 함
14절 말씀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때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신 거예요.
그 때 당시 나병환자들은 율법(레13:4)의 규례를 따라 그들의 건강을 확인하는 제사장에게 나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제사장들에게 가는 도중에 몸이 다 깨끗해진 거예요. 주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기적적으로 치유해 주셨던 거예요.
그 때에 그들은 다시 오던 길을 돌이켜서요. 예수님께 달려가서요. “예수님, 내 나병이 깨끗이 나았어요!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어요?.....”하면서 기뻐 뛰며 감사해야 했을 텐데요.
열 명의 나병환자 중 한 사람만이 감사하러 돌아온 거예요. 그것도 유대인이 아닌 유대인들이 개 취급하는 원수의 나라 사람이요. 나병이 낫고 나니까 이제는 혼자서도 큰소리를 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의 사례를 해요. 그 때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세요. 기적의 치유에도 감사를 잊은 사람들을 찾으셨던 거예요.
예화)친구 이름을 잊어버린 친한친구 이야기 –친한 친구 이름을 어떻게 잊
(이처럼 우리도 혹시 기적의 치유를 받았으면서도 감사를 잊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오늘날에도 일생토록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감사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오늘까지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고요. 건강을 붙들어 주시고요. 암에도 안 걸리게 하시고요. 암에 걸려서 병원에서 포기했어도 기적적으로 치유해 주시고요. 지금까지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주심을 감사해야 해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2대 왕이었던 다윗은 시편 103:2-5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감사하며 찬양하였던 거예요.
우리도 지난 날의 이 모든 감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돼요.
예화)위임목사님의 간증 - 로마서 12:1-2의 말씀으로 거듭남과 질병치유
그러므로 지난 날 주님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심을 잊지 않고 감사할 때 이 치유의 기적은 우리의 일생토록 불일 듯 일어나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을 살아갈 때 갈수록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주셨고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셨고요. 우리를 치유해 주셨음을 잊지 않고 감사할 때 일생토록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께서는 감사해야 함에도 감사를 잊고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물으십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