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복음화(47)                                                                          (2018. 12. 16)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누가복음 16:19-31)
                                                         
    우리는 오늘 구주강림절 셋째 주일을 맞이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먼저 바리새인들이 사람들 가운데서는 높임을 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깨우쳐 주시면서 오늘 본문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늘 본문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말씀을 통해 들려주시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이 무엇인지 이 시간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심판이 다 있음(22-23절)
   우리는 흔히 본문을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으로 알고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 부자의 이름이 니네베(Nineve)이거나 피네에스(Phinees)라고도 했던 것으로 보아 실제로 있었던 일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는 겉옷으로 당시 왕족들이 입었던 옷으로 그가 높은 직위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고요. 속옷으로 아주 값비싼 옷을 입었던 것으로 보아 아주 부자였음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부자의 집 대문 앞에 한 거지가 살았는데요. 거지의 이름은 베다니에 살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와 같은 이름인(요11:1) 나사로인데요. 히브리어 ‘엘리에셀’에서 온 이름인데요. ‘하나님은 도우시는 분’이라는 은혜로운 뜻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부자의 이름은 밝히고 있지 않는데 이 거지의 이름만 밝힌 것으로 보아서 이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임에 틀림이 없었어요. 이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어떠한 사랑의 관심이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던 의롭지 않은 불의한 자였던 거예요. 더구나 거지 나사로는 상처투성이였는데요. 종기와 고름이 나는 피부병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왔음을 알 수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개들까지 와서 그 상처들을 핥았는데요. 얼마나 귀찮고 힘들었겠어요?
     그런데 부자도 죽고 거지 나사로도 죽었는데요. 거지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서 곧바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어요. 아브라함이 계신 낙원(천국)에 갔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부자는 그렇게 세상의 부귀 향락을 즐겼지만 땅에 속한 사람이었어요. 그 결과 그는 음부로 가게 되었는데요. 여기 ‘음부’란 구약에서 흔히 ‘무덤’으로 번역되는 단어로 악인이 가는 처소로 성격 지어지게 된 거예요. 그리고 그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를 바라보게 돼요.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가고 부자는 지옥에 들어감으로써 세상에서와는 완전히 정반대로 그들의 인생이 대역전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모습이에요?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이 땅 위에서의 그러나 삶만으로는 결코 그 사람의 신앙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죽음 후에만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알지만 사실은 우리의 죽음 이전에도 이 땅 위에서의 우리의 삶 가운데에 언제든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결단코 잊어서는 안 돼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분명히 증거하지 않아요?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바로 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사라지고요. 육신의 건강도 잃어버리고요. 생업의 축복도 잃어버리고요.  가정의 행복도 다 사라지고 말아요. 그러므로 이제라도 영적으로 깨어서 분별력 없이 끌려 다니지 말고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고 무엇이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한 삶인가를 올바로 분별하고요. 하나님의 편에 서서 믿음의 결단을 하며 살아가게 될 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복되게 쓰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 이르러서도 하늘의 상과 면류관을 누리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거지 나사로가 믿음으로 살지 않아서 가난했나요? 아니에요. 그는 믿음으로 살았지만 거지였고요. 병들어서 개들이 그의 상처를 핥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그에겐 이 땅의 불행과 고통을 뛰어넘는 천국의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살 수 있었던 거예요.
유머) 부잣집에 불난 것을 강 건너 불 보듯하는 거지 아버지 이야기
    그러나 최종적인 심판은 우리가 죽은 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9:27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지 않아요? 우리 인생은 언젠가는 한 번은 다 죽어요. 언제 어떻게 죽을지만 모르고 살아갈 뿐이에요.
예화) 메어리 K. 백스터(Mary K. Baxter)가 「정말 지옥은 있습니다(A Divine Revelation of Hell)」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계시나 환상이나 입신을 통해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고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함을 확신을 가지고 증거했는지 몰라요.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잊지 않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감사하면서 만족하며 천국의 행복 속에 살다가 언젠가는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될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주님의 위로를 받을 날이 꼭 다가옴(25절)
   부자가 지옥 불못에 떨어졌는데 얼마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던지요? 생전에 너무도 이기적이고 자기만 알았기에 남에게 긍휼을 베풀지 못했던 부자가 이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자신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역설)가 아닐 수 없었어요. 이 땅 위에서와는 정반대의 인생 대역전 드라마가 펼쳐진 거예요.
   그런데도 말세의 마지막 때 오늘의 현실은 우리가 이 놀라운 역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당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고통의 희생을 치르는지 몰라요. 그 결과 서로를 위한 위로는 커녕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피를 흘리고 생명을 죽이고 심지어는 상대방을 향한 복수의 칼을 갈게 하는지 몰라요. 결국에는 자신도 상대방의 칼에 피를 흘리며 죽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고 증거하신 거예요. 여러분, 칼은 휘두를 때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꼭 써야 할 날을 대비하면서 칼집에 있을 때 빛나는 거예요. 그리고 칼을 언제 쓰는가 하면 성도들이나 주의 종의 가슴에 겨누는 것이 결코 아니라 사탄을 대적할 때 써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탄 마귀를 대적할 때 공격용 무기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7)고 명령하셨던 거예요. 그런데 많은 때 우리가 사탄에게 속아서 우리 주위에서 보면 그 칼을 잘못 사용함으로 인해 그들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를 풍비박살 내는 불의를 행할 때가 얼마나 많아요?
   참으로 주님께 감사하는 것은 요즘 한국 교회의 출석 인원이나 재정이 점점 줄어들고 젊은이들이 떠나가고 선교사 파송과 후원도 점점 줄어간다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치유하는 교회는 계속 부흥하고 있어요. 말세의 마지막이 되어서 중, 고, 대학, 청년들의 복음화율이 4%라는 비극적인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특별히 우리 교회 3,4부 예배에 본당에 가득 찰 정도로 8, 9, 10교구의 젊은이들이 몰려들고요. 11,12교구 등 전도 교구들이 개척되어 한 해 동안 100여 명씩 등록해서 부흥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산도 작년보다 2억이나 더 늘었고 명년에는 금년보다 4억을 더 늘려 예산을 짜고 선교사 파송 수도 11명이나 늘리고 선교사 후원 수도 6명이나 늘릴 수 있음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지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고 하셨습니다. 목회의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얼마나 위로를 받고 행복한지 몰라요. 그래서 위로의 책인 고린도후서 1:5에서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선언하고 있듯이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칠수록 우리가 주님의 위로를 받는데요. 그 위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화) 한국기독교시각장애인연합회 성탄축하 연합예배 때 부른 ‘주님의 크신 은혜’라는 찬송.
   그들의 믿음을 찬양을 들으면서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러운 은혜를 받은 거예요. 그래서 저의 마음속에 고린도후서 6:8-10에 나오는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당하고 모든 것을 다 잃었던 바울 사도가 선언한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는 고백이 뜨겁게 저의 가슴 속에 와 닿는 거였어요.
    여러분 어떠한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주님의 위로 가운데 세상의 그 어떠한 위로와 비교할 수 없고 세상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영원한 천국의 소망과 행복의 감격 속에 남은 여생 더욱더 복되게 일어서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함(27-28절)
   부자가 아브라함과 거지 나사로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서 천국에서 지옥으로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도 없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올 수가 없다고 한 거예요. 천국과 지옥은 완전히 멀리 분리되어 있었던 거예요. 이 부자가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하고 호소한 거예요.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세요. 여기 ‘권함을 받는다’는 단어는 설득(persuade)을 당하고 확신(convince)을 얻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누가복음 19:10에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분명히 밝히시며 강조하시지 않아요? 더 나아가 멀리 갈 것도 없이요.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우리의 가족이 지옥 불못을 향해 떨어져 죽어가고 영원히 멸망해가고 있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해요. 오히려 사랑하는 가족들이 일류 대학, 일류 직장, 일류 가문과의 결혼, 일류 가정 이루고 복 받고 잘 살기만 바라는 거예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얻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구원받지 못하면 이 모든 행복과 축복은 다 무너져 버리고 말아요.
   그래서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아 선지자는 유다 민족이 멸망해 가는 그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결단코 낙심하지 않고요.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고 강조하였던 거예요. 그런데 왜 우리의 마음에는 이 뜨거운 복음 전도의 불이 안 붙는지 아세요? 먼저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고요. 천국과 지옥의 심판이 있다는 것도 믿지 못하고요. 영혼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지도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복음 전도의 불이 어떻게 붙을 수 있겠어요?
예화) 대구 경북지역 목회자 영적 부흥성회에서 영락교회 김운성 목사님의 설교 예화.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불쌍히 여겨야 해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불쌍히 여길 때에 우리의 마음속의 5가지 신앙의 적인 불신앙과 불순종과 불만과 불평과 불행이 한 순간에 다 사라지고요. “아, 우리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삶이 천국의 행복의 감격이구나!”하는 것을 분명히 체험하게 돼요. 그러므로 우리가 죽어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구원의 복음을 끊임없이 전해 나갈 때 우리를 통해서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계속해서 구원하는 위대한 복음의 역사를 계속해서 이뤄나가게 될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구주강림절 셋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모두가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잊지 말고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의 위로의 날이 꼭 다가옴을 기다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구원의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가면서 어떠한 환난이나 시련 가운데에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말도 없이 충성을 다할 때 언젠가 우리에게서 모두가 인정하는 진정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는 복된 여생을 모두 다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