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복음화(5)-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누가복음 18:35-43(2019. 01. 27)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님의 전도 사역의 발자취를 따라서 영적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고자 하는데요. 예수님께서 베뢰아전도의 종점인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였어요.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요. 큰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깐요. 나사렛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요. 그가 보인 반응을 보면서요. 그가 어떻게 눈을 뜨고 주님을 보게 되었는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불쌍히 여김을 받는 은혜를 간구해야 함
     본문 38절 말씀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20:29-34, 마가복음 10:46-52에서 함께 다루고 있는데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요. 마태나 누가는 이 맹인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으나 마가는 이 맹인이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고 이름을 밝히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그가 이름도 없이 단지 ‘디매오의 아들(바디매오)’이라고 불렸을 뿐만 아니라요. 앞을 못 보는 맹인인데다가요. 남에게서 얻어 먹고 사는 거지였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그는 불쌍히 여김 받을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맹인 거지의 믿음이에요. 본문 이전에 군중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출신 예수’라고 불렀는데요. 이 맹인 거지는 줄기차게 ‘나사렛 출신 예수’가 아닌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소리치고 있다는 다른 사실을 주목할 수 있길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맹인 거지는 다른 군중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그를 구원하시고 치유하실 수 있는 메시야로 믿었던 거예요(눅 4:8, 마 11:5). 그래서 그는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기 위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쳤던 거예요. 바로 이 신앙이 예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었던 거예요.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거예요. 우리가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살아계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요. 불쌍히 여겨 달라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거예요. 또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은혜를 간구하고 체험해야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를 불쌍히 여길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간구하고 체험했다고 하면서도 우리 마음 속에 사랑이 너무도 메말라 있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간구하고 체험했다고 하면서도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를 안 하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의 긍휼을 간구하고 체험했다고 하면서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불쌍히 여기질 않는 거예요. 이것이 무슨 신앙생활이랍니까? 그러니 우리가 불신자들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23장에 예수님께서 말세의 마지막 때의 사랑과 용서와 긍휼이 메마를 대로 메마른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인들을 향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하고 저주하셨던 거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이 말씀을 받아야 해요.
<예화: 김형석 명예교수님의 「백년을 살아보니」 책 설명>, <예화: 불쌍한 옆집 여자>
     이렇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은혜를 간구해야 해요. 사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우리의 뜻대로 되어지는 일이 무엇이 있어요?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다 건강하고 행복하고 축복되게 살길 원하지만요. 결코 우리의 뜻대로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께 대해 바른 믿음으로 일어서서 살아가야 하고요. 모든 것이 주님의 뜻과 맞아 떨어져야 기적적으로 응답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육신의 욕심이나 욕망대로 결코 내가 애쓰고 수고해서 얻으려고 하지 말아야 해요. 그럴수록 인생의 실패와 실망만 더해질 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주님 앞에서의 우리의 신앙부터 바로 서야 해요. 그리고 우리의 바른 신앙부터 고백하고요. 더 나아가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는 은혜를 간구해야 하는 거예요.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은혜를 기필코 체험하게 될 뿐만 아니라요. 주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면서요. 기적적인 축복을 누리게 되는 거예요.
<예화: 우리 교회에 나오시는 한 집사님 내외분의 치유 이야기>
     여러분, 우리가 적어도 이렇게 부르짖고 간구하면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요. 우리의 생명까지도 살려내시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도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꿈에도 결단코 잊어서는 안 되고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은혜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살아가야 해요. 그래서 바울 사도도 고린도전서 15:10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3번씩이나 강조하며 담대히 외쳤던 거예요. 이처럼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은혜를 간구하며 살아갈 때 날마다 순간마다 삶의 현장 속에서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주님의 살아계심을 목격하고 체험하는 기적적인 치유의 역사가 불일 듯 일어나게 될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낙심하지 말고 부르짖어야 함
     계속해서 분문 39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맹인 거지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치자 앞에 가는 사람들이 그를 꾸짖어서요. “시끄러우니 제발 조용히 좀 하라”고 하자 이 맹인 거지는 더욱 크게 소리 지르면서요. 계속해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쳐요. 여기 군중들의 ‘꾸짖다’는 맹인 거지가 ‘소리 지른다’는 단어는 모두 다 미완료과거시제로서 계속해서 꾸짖는데도 자신의 믿음이 결단코 꺾이지 않고요. 계속해서 외쳐대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그가 구걸을 하는 것이었다면 그가 제지당할 때 쉽게 포기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는 믿음의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고요. 그래서 낙심하지 않고 간절히 부르짖었던 거예요.
<예화: 세뱃돈을 많이 받아낼 수 있는 방법>
     우리가 설날에 세뱃돈을 좀 더 받으려고도 이렇게 노력하는데요.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때는 얼마나 낙심하지 않고 부르짖고 있느냐는 거예요. 하물며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결코 포기할 수가 없는 거예요. 끝까지 낙심하지 말고 부르짖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복음 18:1에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던 거예요. 그런데 부르짖으며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흔히들 그렇게 말을 해요. “하나님이 귀머거리시냐?”는 거예요. 작게 소근거려도 다 알아 들으실 텐데 뭘 그렇게 소리치느냐?”고 비아냥 거려요.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가 소곤거리며 기도할 필요조차도 없는 거예요. 마태복음 6:8에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시잖아요? 구하기 전에도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는데 뭐 하러 힘들게 구하느냐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신, 구약 성경 전체의 말씀을 일관되게 보아야 해요. 성경은 끊임없이 구하라고 말씀하시고요. 부르짖으라고 명령하고 계세요. 우리가 큰 소리든지 작은 소리든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히 부르짖느냐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는 뭐라고 분명히 약속하세요? 우리 중보적 기도학교나 중보적 기도대의 주제 성구인 예레미야 33:3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분명히 약속하지 않나요? 그래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낙심하지 않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어요.
<예화: 이랜드(E-LAND) 창업주 박성수 장로님>, <예화: 도종환 시인과 그의 시 ‘담쟁이’>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앞에 어떠한 죽음의 역경과 좌절이 부딪혀 온다 할지라도 결단코 낙심하지 말고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응답을 간구하며 부르짖을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의 역사가 우리의 이성과 상상을 초월하여 놀랍게 응답 받을 줄 확실히 믿습니다.
3.믿음의 비전을 바라보아야 함
  같은 사건을 다룬 마가복음 10:50에 보면 예수님께서 거지 맹인 바디매오를 부르실 때 그의 겉옷조차도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 왔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시자 너무도 기쁜 나머지 가지고 있던 겉옷조차도 내던지고 예수님께로 달려갔던 거예요. 그렇게 달려온 바디매오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그의 소원을 물으셨을 때요. 바디매오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고백을 해요. 그 뜻을 음미해 보면 바디매오가 전에는 맹인이 아니었으나 어떠한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맹인이 되어서요. 다시 눈을 뜨고자 하는 욕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강했던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이 말씀은 영적으로 해석하자면 육신의 눈으로 보는 정도가 아니라 영적인 세계조차도 다시 믿음의 눈으로 보길 원하는 간구가 담겨져 있었던 거예요. 늘 그렇게 선포해 오셨듯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5:20, 7:50, 8:48, 17:19)고 선언하시니깐요.ㅍ이 맹인이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서요. 백성들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에는 다시 눈을 떠 보아야 할 육신의 맹인은 없다고 할 수 있지만요. 적인 맹인들은 얼마나 많이 있어요?
<예화: 개안수술을 받고도 지팡이로 더듬으며 걷는 맹인>
     우리는 육의 눈이 떠져 있을지 모르지만 아직도 영적 맹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시편 119:18에서 시편의 기록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간구했어요. 다시 말하면 주님의 말씀 가운데 영적인 세계를 보기를 간구했던 거예요.
     재작년 여름에 전국 시각장애인 연합수련회를 인도하러 갔는데요. 그들이 앞을 보지는 못하지만 주님만 바라보면서요. 얼마나 찬양을 눈물로 뜨겁게 부르고요. 말씀도 “아멘, 아멘”하고 받고요. 통성기도도 뜨겁게 부르짖던지요? 눈을 뜬 우리 정상인보다도 훨씬 더 갈급하고요. 은혜롭고요.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바로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신앙이 바로 이거예요. 우리가 육신의 눈만 뜨여서 뭐하겠어요? 이제는 영의 눈이 뜨여져서 믿음의 비전을 발견하고요. 사명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리할 때 이보다 더 의미 있고 보람되고 행복한 여생이 없을 거예요.
<예화: 제주영락교회에서 열린 세계치유선교회 수련회 이야기>
<예화: 제주 김녕교회 이야기>
     그래서 잠언 29:18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분명히 약속하시지 않아요? 우리가 비전이 없으면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살아가지만요. 믿음의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 기필코 우리의 여생과 자손들에게 까지 복을 부어주시고 귀하게 쓰시며 크게 영광 거두어 주실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장애인들에 대해서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고요. 그들을 차별하는 말할 수 없는 상처도 주고요. 심지어 장애우들을 비방하는 유인물까지 뿌리는 말세의 마지막 때인데요. 정말 가슴 아팠던 것은 작년에 언론을 통해서 우리 강서구에 장애인들을 위한 특수학교를 세운다고 했을 때 집값 떨어진다고 반대하는 주민들 앞에 그 장애인들의 엄마들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면서 장애인 자녀들을 위해 특수학교를 허락해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어요? 저는 그 때 입장을 바꾸어서 자신의 아들, 딸이 장애일 때도 저렇게 극렬하게 반대할까 하는 생각에 그 장애인들의 부모들이 받을 상처의 아픔이 느껴지면서요.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 거였어요. 저런 사람들이 우리 강서구민들인가 하는 분노가 솟구치면서요. 그렇게 집값이 올라 돈 많이 벌어도 다 쓰지도 못하고 죽을텐데, 또 죽을 때 짊어지고 가지도 못할텐데 얼마나 속이 쓰리고 가슴 아픈 일이에요? 오죽하면 TV 뉴스가 나올 때나 신문에 그 사건 기사가 나올 때마다 그 가운데 혹시라도 우리 치유하는교회 교인이 있어선 안 되는데 하는 마음으로 찾아봤겠어요?
<예화: 독립유공자인 맹인 여성 애국지사 심영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시시때때로 부딪혀 오는 물질과 명예와 자존심과 갖가지 삶의 고통과 불행의 문제 속에서 앞이 캄캄한 절망과 고통의 현실이 더 이상 우리를 좌절시키거나 포기시키지 못하고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하고 살아계신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은혜를 간구하고요. 낙심하지 말고 부르짖고요. 믿음의 비전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의 어떠한 현실의 난관조차도 뛰어 넘는 놀라운 의미와 보람과 비전의 삶을 살아가게 되며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며 영광 돌리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