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복음화(7) (2019. 2. 24 주현절 후 일곱 번째주일, 제100주년 3·1절 기념주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요한복음 8:1-11             

오늘 역사적인 제100주년 3·1절 기념 주일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자신의 죄와 허물부터 통회자복 해야 함(7)
요 8: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데리고 온 이유는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찾기 위한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대로 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면 사랑의 주님이라고 하면서 사랑이 그토록 없냐고 비난할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불쌍히 여겨서 풀어주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자라고 정죄하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도록 예수님을 시험코자 함정을 파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직접 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신 가운데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전혀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 ‘죄 없는 자’라고 하는 것은 헬라어로 ‘ἀναμάρτητος(아나마르테토스)’라고 하는데, ‘단순히 범죄하지 않는 자’ 정도가 아니라 ‘죄를 지을 욕망조차 없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중 누구도 죄 없는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돌을 던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이 아닌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때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의롭고, 믿음도 더 좋고, 신앙생활도 더 잘하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오십보백보, 피차일반, 피장파장, 도토리 키 재기,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순수한 우리말로 ‘도긴 개긴’이라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욥기 25:6에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고 탄식했겠어요?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는 구더기같이 더러운 죄가 많은 사람이요, 벌레같이 연약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탓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참되게 살아가려면 가장 먼저 자신의 죄와 허물부터 통회 자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수능 만점자 김지명 군
진정한 성공과 행복은 남을 탓하거나 환경을 비관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남만 탓하며 험담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이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살면서 스스로 자신이 파 놓은 불평과 원망의 구덩이의 불행과 고통에서 평생을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그렇게 인생을 끝내고 말아요. 그래서 요나 선지자가 요나서1:12에서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고 고백함으로 큰 풍랑이 일던 바다를 잔잔케 하였듯이 “우리의 가정의 불행의 원인도, 우리의 직장의 불황의 원인도,  말세 교회의 불화의 원인도,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분열의 원인도 다 내 탓이요!”하고 엎드릴 때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모든 문제는 거기서부터 풀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죄와 허물부터 통회 자복하면 주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더욱 은혜롭고, 더 축복되고, 더 행복하게 되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원하시는 복음의 도구로 기적의 역사를 일생토록 펼쳐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3·1운동을 통한 기독교인들의 헌신
그러므로 이제라도 우리의 죄와 허물부터 통회자복하게 될 때 주님께서 우리의 지난날의 어떠한 죄악도 다 용서해 주시고 남은여생 진정으로 축복하고 행복한 삶으로 쓰임 받게 해 주실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어느 누구도 고발하거나 정죄해선 안됨(10)
요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 하신 후에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계속해서 쓰셨습니다. 그 순간 그토록 정죄의 분노로 들끓던 현장이 점점 조용해지기 시작했고 양심에 가책을 느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중에 어른들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들까지 하나씩 성전을 떠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던 여자만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아무도 없지 않느냐?”하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입만 열면 남에 대한 고발과 정죄를 일삼습니다.
유머) 과자 회사를 상대로 소송한 사람
설령 우리에게 어떠한 죄와 허물이 있다고 해도 우리 스스로가 다 죄인들이기 때문에 고발하거나 정죄할 권한은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이 땅 위에 어느 누구에게도 결단코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로마서 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주님께서 분명히 선언하고 계시잖아요? 그런데도 말세의 교회 안에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유머) 자기 유리한대로 성경을 적용하는 교인들
예수님 당시나 말세의 마지막 때까지도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고, 평생 감정을 풀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거짓으로 험담하고, 비방을 해서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시험에 빠뜨려서 결국 교회에서 내쫓아 주의 일을 막으려고 하고, 교회를 어지럽혀서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 말세 마지막 때의 사탄의 계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탄의 역사를 영적으로 잘 분별하고, 대적하면서, 끝까지 인내하기만 하면 주님 주시는 힘으로 언젠가는 다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37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분명히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지난날 그 어려운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말미암아서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는 가운데 주님의 도우심으로 결국에는 기적적인 승리를 이루고 오늘의 이렇게 은혜롭고 행복한 교회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로마서 8:38-39에도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확실히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40년 동안 목회를 해 오면서 어떠한 악한 원수라도 결단코 감정적으로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고 안되면 기도하고 금식 하면서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바로 깨우쳐 주면서 인내하면서 기다렸더니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회개하고 돌아오고 사탄의 무리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대신 싸워 주셔서 다 승리케 해 주시고 이렇게 축복받은 행복한 목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원수들이 고발하거나 정죄하면서 달려들어도 더 이상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성만 다하길 바랍니다. 그런데도 말세 마지막 때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고발하고 정죄하면서 달려듭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14-15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분명히 경고하고 있잖아요? 말세 한국 교회가 사탄에게 속아서 누가 옳으냐고 율법적으로 싸우다가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는 다 잃어버리고 실제로 교회가 가장 중시해야 할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살리는 전도와 치유와 양육과 선교는 하지도 않고 거기에 쏟을 힘을 다 세력 다툼을 하면서 육적인 싸움을 하는 데 다 쏟아붓다가 결국 교회가 다 무너져가고 있는 서글픈 현실입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만 따지며 싸우다가 사탄의 계략에 의해서 무너진 교회들이 이 땅위에 얼마나 많이 있어요?
예화) 목사님의 치유성회
예화) 통합에 힘쓴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지역간, 계층간, 이념간, 세대간, 성별간에 이르기까지 불화와 분쟁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우리 사회의 불화와 분열을 화합시켜야 할 교회들까지도 말세의 마지막 때에 사탄의 시험에 빠져서 오히려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누가 옳으냐의 불화와 분쟁 가운데 다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한 동족이고, 한 교인이고, 한 형제임을 기억하면서 더 이상 서로를 결단코 고발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무엇이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하고, 무엇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것인가를 영적으로 잘 분별하고 결단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 안에서 하나 된 힘으로 더욱더 놀라운 은혜와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 크게 쓰임 받으며 영광 돌리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으로 살아야 함(11)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던 자가 아무도 없지 않느냐?”하고 물으실 때에 이 여자가 “주여 없나이다”라고 대답해요.
그때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여기 ‘정죄한다’는 단어가 헬라어로 ‘κατέκρινεν(카테크리넨)’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죄를 정한다’는 정죄의 의미보다도 ‘벌을 내린다’는 심판의 보다 더 두려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다시 말하면 “저주의 천벌을 내린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죄에 대해서 어떠한 무서운 저주의 천벌도 내리지 아니하니까 주님의 용서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유머) 도둑질한 교회 학교 어린이
주님도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하는데 자기가 뭔데 교인들 위도 부족해서 목사 위로 올라가고 하나님과 같이 높아질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신앙을 타락시키고, 자신의 일생도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자신의 가정도 불행으로 몰고 가고 하나님의 교회까지도 분쟁으로 몰고 가고 결국 세상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있는 무서운 영적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평신도 신학자였던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였던 C. S. 루이스 박사가 1941년부터 3년간 진행한 라디오 방송 내용을 정리해서 기독교의 보편적인 교리를 펴낸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라는 명저서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자신이 단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를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특히 자신이 단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사탄을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이 땅 위에 어느 누구도 정죄할 권한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나 자신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살기만 하면 됩니다. 개혁은 말이나 구호나 내규 개정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실천과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신앙의 삶이 주위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감동이 되어서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 인정을 받게 되고 칭찬을 듣게 되고 존경을 받게 되고 그러한 사람들을 주님께서 자연스럽게 높이시고 복을 주시고 귀하게 쓰시고 주위에 큰 변화를 일으키면서 주님께 크게 영광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분명히 약속하시지 않습니까? 지난 20년 동안 저와 함께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여러분의 신앙생활가운데 은혜가 메마르고 축복을 잃어버리고 기쁨이 사라지고 감격이 없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언가 잘못 신앙생활을 해온 것입니다. 평생토록 주님과 주의 종들과 영적인 성도들과 거슬러 싸우다가 일생을 끝낼 것입니까?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치유하는 교회에 다니면서 날이 갈수록 여러분의 마음속에 은혜가 넘치십니까? 축복이 더해지십니까? 행복이 밀려옵니까? 여기에 ‘아멘’하고 대답하는 성도나 주의 종들은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차이
예화) 사죄하지 않는 일본
이제는 우리가 3·1운동의 비폭력, 무저항, 박애신앙을 본받아 일본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번에 성지 순례에 가서 들렀던 예루살렘 시내 한복판에 ‘이름을 기억하라’는 뜻의 야드 바쉠(Yad Vashem)이라는 유대인 대학살(Holocaust) 역사박물관이 있는데 거기에 “용서는 하되 결코 잊지는 말라(Forgive but never forget)”고 적혀 있듯이 우리가 더 이상 일본을 원수시하고 싸우는 것은 우리 개인의 정신 건강이나 신체 건강이나 영적 건강에까지도 결코 유익하지 못하고 우리나라의 국익이나 하나님의 선교에도 결코 유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3·1절 100주년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살아가면 어떠한 대적도 주님의 주시는 힘으로 능히 이겨낼 뿐만이 아니라 언젠가는 그들이 회개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될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한국을 위해 헌신한 일본인: 타우치 치즈코(공생원 원자), 다카하시 마코토(정신대 소송지원회 대표), 일본 유명대 교수 226명(2019년 일본 시민·지식인 성명)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3·1운동을 한지 100년이 지나갔고, 벌써 해방이 된지 74년이 지났는데 우리가 언제까지 일본과 적대관계로 원수처럼 지내가 인생을 끝내야 합니까? 우리가 제 100주년 3·1운동 기념주일을 맞이하면서 3·1운동의 비폭력, 무저항, 박애의 신앙을 본받아 적어도 우리가 신앙의 사람이라면 우리의 죄와 허물부터 통회자복하고 어느 누구도 고발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살아가게 될 때 우리의 개인 관계나 지역 관계나 직장 관계나 교회 관계나 나라 관계나 민족 관계나 한일 관계라 할지라도 다 치유하고 회복되고 영원한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을 새롭게 회복되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가서 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