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복음화(8)                                                                                           (2019. 03. 03)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  요한복음 8:31-32
                                                            
     우리는 지난 주일 제100주년 3·1절 기념주일을 지냈고요. 지난 주 금요일 3·1절에는 한국교회 3·1운동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어요. 우리는 3·1운동 그 날의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소리를 잊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26년 후에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는데요. 그 결정적인 비결은 우리의 선조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신앙으로 임하였기 때문에 독립 운동을 주도하게 하셨고요. 그 결과 하나님께서 주변 국가들의 상황을 그렇게 몰고 가셨고요. 결국 일본의 패방으로 인해 기적적인 조국의 광복을 가져왔던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할 때 어떠한 역사가 일어나는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됨(31절)
     먼저 본문 31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는데요. 본문 이전에 30절에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에서 나오는 ‘믿더라’와는 원어적으로 다른 의미예요. 30절에서는 헬라어에 ‘ἐπίστευσαν εἰς αὐτόν(에피스튜산 에이스 아우톤)’이라고 해서요. 영어로는 ‘believed in Him(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는 의미로서요. 진정한 주님께 대한 믿음이라면요. 본문 31절의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 나오는 ‘자기를 믿은’이란 헬라어로 ‘πεπιστευκότας αὐτῷ(페리스튜코타스 아우토)’라고 해서요. 영어로 ‘believed him(그냥 믿었다)’는 뜻으로서요. 단순한 믿음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유대인들은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내 말(λόγος, 로고스, 거룩한 말씀)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여기 ‘거한다’는 단어가 헬라어로 ‘μείνητε (메이네테)’라고 하는 부정과거가정법을 쓰는데 이것은 계속하거나 반복하지 않는 동작 즉 일회적인 행동을 말하는 것으로서요. 우리가 불신앙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순간부터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거예요. 마치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처럼요. 요한복음 15:5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분명히 증거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말은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요. 그 분의 삶이 우리의 삶 가운데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됨을 증거해 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말세의 마지막 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장 본받아야 할 삶이 무엇인가요? 요한복음 13:34-35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분명히 밝히지 않아요? 말세 교인들에게 최대의 약점은 바로 이 사랑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 마음에 들고요. 자기 말 잘 듣고요. 자기에게 잘 해준 사람에 대해서는 사랑을 잘 하면서도요. 자기 마음에 안 들고요. 자기 말 잘 안 듣고요. 자기에게 달려드는 사람에게는 감정을 품고 언젠가는 죽일려고 벼르고 살아요.
     그래서 흔히들 정말 용서할 수 없는 남자가 있다고 해요. 눈이 단추 구멍만한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요. 이쁜 여자들만 보면 눈이 당구공만 해지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대요. 귀 뚫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요. 귀가 막혀서 남의 말을 안 듣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대요. 머리카락이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요. 머리에 든 게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대요. 밥 많이 먹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요. 반찬 투정 하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네요. 그러나 이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고요. 하나님의 자녀이고요.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런 사람은 종교인에 불과하고요. 교회에 다니는 교인일 뿐이고요. 결코 진정으로 주님의 자녀 된 성도나 제자는 아닌 거예요.
유머) 서울 남편와 경상도 아내의 대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나 거룩한 성도나 주님의 제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어떠한 원수라도 사랑하고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어떠한 원수라도 용서하고요. 예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오래 참으신 것처럼 어떠한 원수라도 오래 참고 기다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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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2·8 독립선언의 100주년 행사 이야기 &  다즈케 가츠히사 재일본 한국 YMCA 자료실장 이야기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 십자가의 사랑을 가슴 속 깊이 뜨겁게 체험하고요. 그 주님을 내 구주로 모셔 들이고요. 그분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지배함으로써요. 자연스럽게 어떠한 원수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사랑의 삶이 나타나고요.그 결과 참된 주님의 제자 된 삶을 살아가게 될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진리를 체험적으로 알게 됨(32절 상반절)
     계속해서 32절 상반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우리가 주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된다는 거예요. 여기 나오는 ‘진리’는 헬라어로 ‘ἀλήθειαν(알레테이아)’로서 ‘거짓(ψεῦδος프슈도스)’에 반대되는 ‘진실(truth)’의 의미인데요. 진실된 말씀 속에 나타나는 ‘예수님’을 뜻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증거하였고요. 요한복음 14:6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예수님께서도 스스로를 일컬으시면서 진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세요? 그것도 여기 ‘안다’는 단어가 헬라어로 ‘γινώσκω(기노스코)’라고 해서요. 단순히 머리로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요. 경험으로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을 체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고 낙심되어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셔서요. 누가복음 24:25-27에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증거하시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모세의 글 중 모세오경(창, 출, 레, 민, 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선지자의 글(이사야~말라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약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임을 자세히 설명하시지 않으셨어요?
예화) 전래동화와 관련된 인터넷의 글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영원히 변함없고 또 다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초신자 때가 예수님을 제일 잘 믿어요.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되어놓고 신앙생활이 정체되거나 거꾸로 침체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열심히 예배에도 안 나오고요. 기도회에도 안 나오고요. 성경공부에도 안 나오고요. 헌신도 하지 않고요. 헌금도 제대로 하지 않고요. 1년 내내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요. 큰소리만 치다 보니깐요. 결국 교회의 전도와 치유와 양육과 선교의 걸림돌이 되고 성장과 부흥을 가로막는 암적 존재가 되어버리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23장에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하시며 7번이나 저주하셨던 거예요. 그것은 예수님 때나 말세의 마지막 때나 똑같애요. 우리가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되면 다 된 줄로 착각을 하고요. 더 이상 진리를 배울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했어요. “만년설이 가득한 히말라야의 높은 산 위에 살고 있는 토끼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동상에 걸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높은 산 위에 살고 있는 자기가 낮은 곳에서 살고 있는 코끼리보다 더 크다고 착각하고 덤비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히말라야 산이 크고 높은 것이지 그 산에 살고 있는 토끼가 높고 큰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직분이 소중한 것이지요.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되었다고 다 된 줄로 착각하면 우리는 복 받는 것이 아니라 망하고 마는 거예요. 그리하여 베드로 사도도 그의 모든 사명을 다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기록한 베드로후서의 마지막 3:18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라고 결론적으로 강조하여 명령하였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번 주 3월 5일(화)부터 치유·양육·사역훈련 성경공부를 새롭게 시작하고요. 4월 1일(월)부터 시작되는 세 이레(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서 구약성경 속에 나타나는 예수님을 만나는 영적 성경공부를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 되어서요. 시편 1:1-3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약속하세요. 여기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나오는 ‘시냇가’는 히브리어로 ‘מָ֥יִם פַּלְגֵ֫י(팔르게 마임)’이라고 하는데요. 성지에서는 연평균 600mm 정도의 비가 우기에만 집중해서 와서요. 우기에는 물이 흐르지만 건기에는 물이 말라버리는 간헐천 즉 와디(wadi, 건조한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데요. 그 메마른 광야의 건조한 골짜기 가운데에는 물이 풍부하게 저장되어 식물 하나하나에 필요한 영양분을 물로 공급해서요.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 같이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어 주셔서요. 진리의 말씀 가운데 영원히 넘치는 주님의 은혜와 축복과 행복 속에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예화) 17기 치유동산 이야기
예화) 일본군 위안부 고(故) 곽예남 할머니 이야기
      그러므로 우리가 베드로전서 2:1-2의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처럼요. 인간적이고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것을 다 버리고요.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의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게 될 때 진리 되시는 주님을 알게 되고요. 그 주님 안에서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갈 뿐만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풍성한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영적 자유함을 누리게 됨(32절 하반절)
     마지막으로 본문 32절 하반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유는 정치적 자유도 있고 경제적 자유도 있고 사상적 자유도 있고 언론적 자유도 있고 신체적 자유도 있습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자유롭게 하리라’에서 ‘자유한다’는 헬라어로 ‘ἐλευθερόω (엘류테로오)’인데요.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의미(고전7:21, 갈3:28, 엡6:8, 골3:11)로도 사용될 수가 있으나 우리를 고통과 불행 가운데 빠지게 하는 죄악과 상처와 질병으로부터 벗어나는 영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는데요(요 8:38, 갈 4:26, 벧전 2:16, 롬 8:1-2). 여기 나오는 자유는 ‘영적 자유’를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복음 4:18-19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약속하셨던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죄악과 상처와 질병의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영적인 자유함을 주셨는데요. 왜 아직도 죄악과 상처와 질병의 멍에를 메고 영적인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느냐는 거예요.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요. 지난 날의 죄악이 용서함을 받고요. 지난 날의 상처가 치유함을 받고요. 지난 날의 질병이 치료함을 받을 때 날마다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14: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강조하신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적 자유를 누리는 삶은 먹고 마시는 것에 매이지 않고요. 의롭다 함(righteousness)을 받고요.  화평(peace) 하고요. 기쁨(joy)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주님의 말씀 가운데 진리를 알고 영적인 자유를 누리게 되면요. 자연스럽게 의롭게 살아가고요. 모든 관계가 화평해지고요.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나라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먹고 마시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삶인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이루어야 할 진정한 영적 자유의 삶이 무엇인지 아세요? 갈라디아서 5:13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명령하세요. 진정한 영적 자유함이 있는 사람들은 절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요. 자기 권위나 내세우고요. 자기 세력화를 하고요. 자기 파당을 짓는 것이 아니라요. 예수님처럼 온유하고요. 겸손하고요. 이름도 없이요. 빛도 없이요. 말도 없이 섬기면서요. 가장 먼저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요. 교회의 주의 종들이나 영적 교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고요.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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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말씀 가운데 영적 자유함을 누리며 낮아져 섬기게 될 때 그러한 사람은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고요. 하나님께서 결국 그러한 사람들을 높이시고요. 복되게 하시고요. 귀하게 쓰시고요. 크게 영광 거두시더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게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영적 자유함의 감격 속에서 귀하게 쓰임 받으며 크게 영광 돌리게 될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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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강조하지만 우리는 살았다 할 것이 없는 하루살이 인생들이에요. 평균 수명까지 살고 세상을 떠나리라고 착각들 하지 마시고요.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날지 모르니깐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듯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가도 사랑하는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수많은 성도들과 주의 종들까지도 많이 찾아와서 한없이 눈물 흘리며 떠나보낼 수 있다면 이보다 영광스러운 축복은 없을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의 남은 여생이라도 주님의 말씀에 거함으로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되고 자유함을 누리게 될 때 이 마지막 때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이나 하나님의 교회에서나 이 세상 가운데서도 복되게 쓰임 받으며 주님께 크게 영광을 돌리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