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복음화(13)                                                                                (2019. 03. 24)
주님의 양이 되라 /  요한복음 10:22-30                                                     
                                                           
     지난 주일에는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닮아서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에서나 세상에서 “선한 목자가 되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오늘은 우리가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의 양이 되라”고 말씀하세요. 때는 겨울이고요. 수전절이 이르렀는데요.여기 ‘수전절’이란 구약성경에 나오는 절기는 아닙니다만 ‘ἐνκαίνια(엘카이니아)’라고 해서 ‘Festival of Dedication(헌신, 봉헌의 절기)’예요. 주전 168년 수리아의 왕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 안에 주피터신(Jupiter, 로마신화의 남신)의 흉상을 세워 성전에서 우상을 섬겨왔는데요.
주전 164년 12월 25일 유다 마카비우스(Judas Maccacaeus)가 궐기하여 수리아군을 축출하고 성전을 정화하여 새로운 제단에서 제사를 드린 데서부터 시작했어요. 그리하여 해마다 12월 중순(치수루월 25일)에 8일간 지키는 승리의 절기였던 거예요. 이처럼 요한복음 6장이 4월의 유월절, 7-8장이 10월의 장막절이 배경이라면 9-10장은 12월의 수전절에 일어난 일이었던 거예요. 이 수전절에 예수님께서 성전의 이방인의 뜰 동편에 있는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요.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심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라고 물으면서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메시야(구세주) 되심을 불신할 때에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양이 될 수 있는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 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주님의 양은 주님을 믿어야 함(25-2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예’ 또는 ‘아니요’라고 대답하지 않으세요. ‘예’하고 대답하지 않으셨던 것은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정복의 왕으로서의 메시야(구세주)가 아니셨고요. ‘아니요’라고 대답하지 않으셨던 것은 사실상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섬김의 종으로서의 그리스도(구세주)이셨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2번이나 되풀이하시며 한탄하셨던 거예요. 여러분, 양의 특징 중의 하나는 시력이 나쁘다는 거예요. 그래서 야생 개들은 앞을 제대로 못 보고 목자를 잘 알아보지 못하는 양 떼를 교묘히 유도하여 좁은 골짜기에 몰아넣은 후 잡아먹곤 했어요. 이처럼 양들은 목자를 바로 믿지 않고요. 제대로 잘 따르지 않으면 죽음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말세의 마지막 때에도 우리가 주님의 양이 되지 못하면요. 염소처럼 되어서 목자를 뿔로 받고요. 이리처럼 되어서 양들을 해치고 잡아먹는 사탄의 무리들이 교회 안팎에 얼마나 많아요?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양이라면 가장 먼저 주님을 바로 믿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근본적으로 가장 약한 것이 바로 이 믿음이에요.
유머) 한 청년의 데이트 이야기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700여 년 전에 이사야 53:4-5에서 예언하신 바와 같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예언하신 바와 같이요.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육신의 질병(질고)과 마음의 상처(슬픔)와 영혼의 죄악을 대신 지셨던 거예요.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영혼의 죄악만 대신 지셨다고 강조하고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 마음의 상처도 대신 지신 것을 바로 깨우쳐 주지 않으니깐요. 자신의 감정을 십자가의 주님 앞에 내어놓지도 못하고요. 어떠한 원수라도 용서하지도 못하고요. 마음의 상처가 치유 받을 길이 없어서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불행과 고통 가운데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요. 우리의 삶이 불화와 분쟁을 헤어 나올 길이 없는 거예요.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육신의 질병도 대신 지신 것을 증거하지 않으니깐요. 아프기만 하면 의사나 한의사나 약사와 간호사만 찾아가고요. 의약이나 의술만 의지하는 거예요. 이처럼 약을 의지하는 믿음이 인간의 의약이나 의술을 뛰어넘는 주님의 치유의 기적을 다 막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신앙생활을 해 온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영혼의 죄악과 마음의 상처와 육신의 질병의 기적적인 치유를 확실히 믿어야 해요.
예화)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목사님의 어록
     우리 치유하는 교회는 이렇게 십자가의 주님을 뜨겁게 믿고 체험하니까요. 이 치유의 복음을 땅끝까지 이르러 전하며 얼마나 많은 치유의 은혜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거예요.
예화) 김제 제일교회 부흥성회 이야기
예화) 췌장암으로 고통 당하신 어느 사모님과 어느 서리집사님 치유 간증 이야기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얕은 지식이나 경험이나 능력을 믿는 것이 결코 아니라요. 십자가의 주님의 영혼의 죄악과 마음의 상처와 육신의 질병의 치유를 확실히 믿는 데서부터 주님의 양으로 거듭나서요. 날마다 순간마다 기적적인 십자가의 은혜와 평강과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주님의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됨(27절 상반절)
     계속해서 본문 27절 상반절 말씀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양은 시력이 나빠서 앞을 제대로 못 보니깐요. 청각이 발달하게 되어서요.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요. 목자는 양 떼들이 수백 마리가 되어도 각자의 이름을 정해 놓고 불렀고요. 그 양떼들은 자기를 부르는 목자의 음성이 들려올 때 따라다녔던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우리도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말세의 마지막 때가 될수록 사람들은 점점 주님의 음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요. 그러나 우리는 가장 먼저 예배나 기도회나 성경공부에 열심히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요. 또 주의 종들의 말씀이나 영적인 성도로의 권면을 들으면서도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해요.
     저는 우리 교회에 등록한 지 얼마 안 되는 성도들이 무섭게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보면서 전율하곤 해요.
주일 낮예배, 수요 밤예배, 금요밤 치유집회, 새벽기도회까지 한 주간 10번 안 빠지고 나오게 되면요. 주일 낮예배 한 번만 나오는 교인이 10년 신앙생활한 믿음을 1년 만에 따라잡고요. 20년 신앙생활한 믿음을 2년 만에 따라잡고요. 30년 신앙생활한 믿음을 3년 만에 따라잡고요. 40년 신앙생활한 믿음을 4년 만에 따라잡고요. 50년 신앙생활한 믿음을 5년 만에 따라잡아 버릴 뿐만 아니라요. 그들이 순수한 믿음으로 주의 종들이나 주위의 영적인 성도들의 권면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는지요? 그러보니까 자신의 능력이나 수고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이 주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축복과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처럼 우리가 이렇게 주님 앞에 나오지도 않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도 않으면 우리의 환경을 통해서 몰고 가시면서 말씀하시고요. 그래도 안 되면요.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사건을 터뜨려서라도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말씀을 하세요.
예화)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어록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온유하고 겸손한 심령으로 영적 민감성(Spiritual Sensitivity)을 가지고 깨어 있어야 해요.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서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해요. 그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복되게 쓰임 받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이 완전한 신앙이나 가지고 있는 것처럼 교만에 빠져서요. 자신의 신앙이 최고인 줄 착각하고요. 강퍅하고요. 완악해서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요. 자신의 그 얄팍한 신학 지식과 신앙 경험이나 앞세워 살아가면요. 주님은, 아니 주위의 가족들도, 주의 종들도, 영적인 성도들도 다 인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요. 결국에 그 인생은 다 무너지고 말아요.
예화) 어느 교회 젊은 집사들 이야기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행전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사도행전 28:26-27에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고 깨우쳐서 주시면서요. 이제는 교만한 신앙의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서요. 우리에게 치유의 길을 열어 주세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주님께서 고쳐 주셔서요. 이제는 영의 눈으로 영적인 세계를 보고요. 영의 귀로 영적인 음성을 듣게 되면서요. 날마다 놀라운 기적의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살아가게 돼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라도 우리의 신앙이 강팍하고 완악하고요. 거짓되고 교만하고요. 불의하고 사악한 죄인 됨을 다 내어 버리고요. 철저히 통회자복 해야 해요.
     그런데 말세의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의 마음이 점점 강팍하고 완악해져서요. 통회자복하는 심령이 안 생겨요.
그래서 우리가 늘 깨어 기도해야 하고요. 기도해도 안 되면 금식을 해서라도 통회자복하는 심령을 회복해야 해요. 특별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해 주신 이 사순절에 더욱 깨어 기도해야 하고요. 갖가지 삶의 문제를 놓고 금식하며 부르짖어야 해요. 그리할 때 다윗왕은 시편 51:17에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고 고백했던 거예요. 이처럼 날마다 순간마다 통회자복하는 심정으로 우리의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요. 주님의 뜻을 이루면서요. 주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는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주님의 양은 주님을 따라가게 됨(27절 하반절)
     마지막으로 본문 27절 하반절 말씀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양은 원래 이기적이고 자기 멋대로 살아서요. 배가 고파 어미로 보이는 양들에게 다가가서 젖을 얻어먹으려 하면 매정하게 뿌리치고 가버렸어요. 양이 순한 것 같지만 자기 먹을 것만 생각하는 굉장히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해요. 더구나 방향 감각이 없이 아무 데나 잘 가다가 가시덤불에나 걸려 굶어 죽거나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기도 했고요. 더구나 양들은 잘 넘어지기도 할 뿐만 아니라 넘어지면 혼자 못 일어나서요. 그래서 버둥거리다가 목자가 발견하지 못하면 배에 가스가 차면서 혈액순환이 안 되어서 죽기도 한다고 해요. 더욱이 양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다른 동물이 달려들어도 속수무책이었고요. 다른 동물들은 죽기까지 발버둥을 치지만 양은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체념하곤 했대요.
그러니 얼마나 불쌍한 동물이에요? 이처럼 양들은 목자가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가 없었기에 목자를 따라가야 했던 거예요. 우리도 영혼의 목자 되시는 주님을 따라갈 때 본문 마지막 28-30절에 분명히 약속하세요.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이 목자 되시는 양이라면 우리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해요.
예화) 군 입대한 아들 이야기     
     그런데 지난주 금요밤 치유집회에 우리 교회에서 파송, 후원하고 있는 일본 츠크바 그리스도의 사랑교회의 채연배 선교사님이 오셔서 너무도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요. 우리가 지난날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요. 우리 힘으로만 인생을 살아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 혼자 열심히 P(Plan, 계획하고) R(Run, 달리고) O(Oh my God, 아이고!)의 실패하고 망하는 인생을 살아왔는데요. 이제는 주님께 P(Pray, 기도하고) L(Listen, 음성을 듣고)  O(Obey, 복종하는)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할 때 마음이 평안하고 육신도 건강하고 모든 일이 형통하고 신앙생활이 행복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에 복종하며 따르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16:24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분명히 증거하지 않아요? 내가 살아있고요. 육신적인 감정이나 혈기 버리지 못하고요. 세상적인 욕심이나 욕망 죽이지 못하고요.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불행과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해요. 그런데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다 죽어지고요. 자아의 욕심과 욕망부터 십자가에 못 박고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요.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데요. 그런데 흔히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은 우리가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우리만 손해보고 우리만 희생하고 우리만 고생하는 것 같아서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고요. 벗어놓으려고 하고요. 달아나려고 해요.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나요? 난 분명 단 한 번도 일부러 다른 길로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앞만 보고 똑바로 걸었다고 생각했는데요. 우리의 인생길을 뒤돌아보면 많은 때 하나님을 떠나 나 혼자 다른 길로 돌아다닌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를 깨닫게 돼요 그러나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되면 그때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1:29-30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분명히 약속하시지 않아요? 사실이 그러해요. 우리의 마음의 평안의 안식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제는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요. 사랑의 주님만 보이고요. 사랑의 주님만 따라가게 되고요. 거기서부터 그 주님의 복의 문이 열려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먼저 죽어지고요.     그 주님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고요. 주님의 뒤를 따를 때 찬송가 216장 ‘성자의 귀한 몸’의 3, 4절 가사와 같이요. 어느 순간에 우리의 목자 되시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면서요. 눈물 흘리며 기쁨으로 그 십자가를 지고요. 일평생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게 될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병원 심방 이야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우리의 인생이 다 지나가요. 그러나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만을 믿고요. 주님의 음성을 듣고요. 주님만 따르게 될 때 일생토록 목자되시는 주님의 부족함이 없는 은혜와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성을 다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생애를 모두다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