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복음화(16)                                                                                                                          (2019. 4. 14)
 죽음의 위기가 닥쳐올 때(요한복음 11:17-27)

                                                                                           
      

나사로가 세상을 떠난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어요.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베다니 동편과 나사로가 죽었던 베다니 서편의 거리는 약 25마일(42km)이었으므로 하룻길이었어요. 예수님께서 사람을 보낸 후 나사로는 곧 바로 세상을 떠났고요. 유대인의 풍속을 따라 그날 해지기 전에 장례를 치러야 했어요. 예수님께 심부름을 간 사람이 예수님께서 계시던 베다니 동편으로 간 하루와 예수님께서 그곳에 머무셨던 이틀과 베다니 서편의 죽은 나사로에게 오신 하루를 더하니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어요. 죽은 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나흘이 지났을 때는 중동의 무더운 날씨와 당시의 장례여건을 감안한다면 이미 부패되기 시작했을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는 회생이 불가능한 완전한 죽음의 상태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이요 고난주일을 또 다시 맞이하면서요. 나사로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었는가를 보면서 우리의 인생에 죽음의

기가 닥쳐올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치유의 주님과 함께 해야 함(21절,32절)

       베다니는 예루살렘이 한 오리쯤 된다고 했는데요. 원어성경에는 1.5스타디온(σταδίων, 2마일, 3Km)도 안 되는 거리였으므로 조문객들이 얼마나 많이 왔겠어요? 당시 풍속으로는 사람이 죽으면 당일로 장례를 하고요. 3일간은 엄격하게 상을 치루고요. 그 후 4일간은 가볍게 상을 치러요. 그러니 많은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누나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왔어요. 그때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서 맞이하면서요.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동생이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하고요. 동생 마리아도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동생이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고백해요. 바로 이 누나들의 예수님께서 함께 하셨다면 동생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의 고백이 죽은 동생 나사로를 살려내는 기적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거예요.
예화)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너무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탈무드 이야기
예화) “하나님은 치료, 우리는 봉사”를 외치며 하나님의 치료를 강조했던 스위스 의학자 폴 투르니에
유머) 삼계탕과 베드로가 치유받은 이야기


       그래서 마태복음 8:17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분명히 증거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뿐만 아니라 우리의 연약한 상처와 질병까지 대신 지셨다고 이사야 53:4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요. 예수님께서 직접 확증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우리의 죄악과 상처와 질병의 치유의 복음적 의미를 분명이 깨닫고요. 확실히 믿음으로써요. 주님의 치유를 놀랍게 체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간증) 안수기도 받은 후 위의 물혹과 종양이 사라진 두 명의 성도와 주의 종 치유의 이야기


       모든 응답은 우리의 믿음대로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많은 죄인들과 병자들까지도 치유하실 때마다 “네 믿음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믿음이 네 병 고침을 받았느니라. 너의 믿음대로 될 지어다!...”라고 우리의 믿음을 강조하셨던 거예요. 그런데도 아직도 불치의 병으로 고통스럽게 투병중인 성도님들도 있습니다만 결코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종도 하나님께서 불러 가시는 마지막 순간 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어 달려 부르짖어요. 그런데 목회를 하다 보면 이 목사보다 더 믿음이 좋으신 분들을 만날 때마다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간증) 대장암과 폐암을 통해 어머니와 아버지를 전도한 청년 이야기


       지금 우리는 말 못할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얼마나 많은 죽음의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어요? 다른 때는 몰라도 내일부터 시작하는 마지막 고난 주간에는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와 고난의 아주 특별한 밤에 나아와서 십자가 앞에 우리의 모든 죄악과 상처와 질병을 치료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기적적인 치유의 응답을 체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치유의 주님과 함께 하며 부르짖는 자들에게 어떠한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기필코 치유의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육의 치유의 기적을 허락해 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2. 구하는 자에게 응답해 주심을 믿어야 함(22절)

       마르다는 동생 나사로가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었지만요. “이제라도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줄을 아나이다”고 예수님께 그녀의 믿음을 고백해요. 바로 누나 마르다의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응답해 주신다는 바로 이 믿음이 죽은 동생 나사로를 살리는데 또 하나의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던 거예요. 우리도 기도나 금식을 해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응답해 주신다는 이 믿음으로 해야 해요. 그러면 기적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화) “10만원만 주옵소서” 외치며 기도하다 현장에서 응답받은 청년 이야기
예화) 기도를 통해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케 했던 제너럴 모터스사의 엔지니어 찰스 케터링(Charles Ketteting) 이야기
간증) 실패한 목회적 상황에서도 김밥가게를 운영하며 개척교회를 섬기고 주의 일을 가능하게 하신 목회자가정 이야기
예화)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대한독립을 믿음으로 선포하며 하나님사랑, 나라사랑을 실천했던 백범 김구 선생님 이야기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상처를 받고요. 시험에 들고요. 낙심을 하고요. 좌절을 하고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요.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고요.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요. 기도하면 너무도 당연하게 기적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7:11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약속하셨고요. 누가복음 11:13에도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분명히 약속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번 고난주간의 마지막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와 고난의 아주 특별한 밤에 나아와서 이러한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기도하며 매어 달리고요. 기도해도 안 되면 금식하면서라도 부르짖을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살아계신 주님께서 부활의 기적의 응답의 역사를 기필코 뜨겁게 체험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3. 부활의 소망을 가져야 함(25-27절)
       예수님께서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 하세요. 지금 요한복음 본문의 번역상의 문제가 있는데요. 본문 이전 2, 21, 32절은 ‘오라버니’ 즉 ‘손위 오빠’라고 번역되어 있는데요. 그런데 본문 19절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23절에는 ‘오라비’즉 ‘손아래 동생’으로 번역되어 있어요. 전전 주일에도 말씀 드렸듯이 그동안 우리가 성경을 잘못 배우고 잘못 이해해 왔던 거예요. 그토록 가혹했던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풍습문화 가운데서도 본문 이전 5절에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연령 순서로 했을 뿐만 아니라요. 누가복음 10:38-42에서도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에 방문했을 때도 나사로가 너무 어렸을 때였으므로 성경에 언급이 안 된 것으로 보아 나이 순서를 바로 파악할 수 있는 거예요.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네 남자 동생이 다시 살아나리라”고 현재의 부활을 약속하시는데요.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하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의 미래의 부활을 기대했던 거예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세요.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요. 육적으로 볼 때 믿는 자는 나사로처럼 죽었어도 주님 다시 오실 때 무덤에 잠자던 성도들이 부활할 때 다시 살고요. 살아있는 신자는 마르다처럼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거예요  (고후 5:3-4). 또한 영적으로 볼 때 믿는 그 육신은 죽어도 살지만 그 영혼은 영적으로 현재부터 살아 있고(요 5:24, 롬 8:10, 엡 2:6) 또한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22, 24절에 마르다는 계속해서 “내가 아나이다”라고 해서요. 헬라어 원어로 “οἶδα(오이다)”라고 해서요. 체험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라 지식적인 고백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네가 믿느냐?” 물으시면서요. 그의 믿음을 확인코자 하신 거예요. 그때 비로소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 라고 대답하게 되요. 바로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진 믿음이 결국 죽은 동생 나사로를 살리게 돼요. 우리도 바로 이러한 부활의 소망을 가져야 해요. 아무리 예수님을 오래 믿고도요. 부활의 소망을 갖지 않으면요. 그 신앙은 다 무너져 버리고 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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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도 살다보면 안개가 밀려와 해변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어요. 믿는 사람에게 발등을 찍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기도 하고요. 좋은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기도 하고요. 예상하지 못한 건강 문제나 경제적 난관이 순식간에 인정사정없이 몰아닥치기도 하고요. 이처럼 안개가 짙을 때 우리는 시야를 잃기 쉬워요. 상황이 실제보다 더 안 좋게 여겨져요. 실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을 가엾이 여기기 시작해요. 그래서 하던 것을 그만두고 안개를 탓해요. 그래도 자신이 포기자라고 느끼지 않아요. 포기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상황이 안 좋아서 더는 계속할 수 없었던 것뿐이라고 말해요. 힘든 상황과 고통스러운 환경에 처할 때 흔히 시야를 잃고 믿음을 잃어버려요. 눈앞의 상처만 보여요. 그 순간 상처가 엄청나게 커 보여요. 그러나 조금만 시야를 확보하고요. 부활의 소망 가운데 모든 것을 보면요. 모든 상황이 달라지게 되고요. 결국 부활의 승리의 영광이 함께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5:3-4말씀은 우리를 강력히 일깨워 줘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땅의 멀고 험난한 인생살이지만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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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또 다시 고난주일을 맞이하면서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다시 한번 감사하고 감격하면서요. 치유의 주님과 함께 하고요.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을 믿고요. 부활의 소망을 안고 일어서게 될 때 우리는 어떠한 죽음의 절망 속에서도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