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복음화(28)                                                                         (2019. 7. 14)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마태복음 21:12-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후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성전의 개혁이었어요. 요한복음 2장에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후 곧바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개혁을 하셨어요. 초기의 성전 개혁이 예언자적인 것이었다면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공생애 마지막 후기의 성전 개혁은 메시야(구세주)적인 거였어요. 그만큼 성전의 개혁이 중요했던 거예요. 이 성전은 영적으로는 성령을 모신 우리 자신(고전 3:16, 6:19)을 의미하기도 하지만요. 문자적으로는 교회 공동체를 의미했던 거예요. 이처럼 예루살렘 입성이 예수님의 공적인 메시야 선언이었다면 성전 개혁은 메시야의 권리를 행사하신 거였어요. 그런데 예루살렘의 제1 성전은 솔로몬 성전으로서 주전 580년 바벨론 군에 의해 무너졌고요. 제2 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으로서 주전 520년에 준공되어 이때까지 계속 되었는데요. 제3 성전은 헤롯성전으로서 대헤롯왕은 유대인의 환심을 얻기 위해 주전 19년에 확장공사를 시작하여 8년 후에 헌당을 하게 되었는데요. 구성전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 버렸어요. 그런데 이 성전은 그 후에도 공사가 계속되어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까지 46년이나 걸렸고요(요 2:20). 완성된 것은 주후 64년이었으나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주후 70년 로마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 다 파괴되고 말아요. 그런데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요.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요. 성전 내부가 장사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을 보시고요.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을 모두 다 내쫓으시고요.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교회설립 5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가 말세 마지막 때 강도의 소굴과 같은 교회가 아닌 어떠한 교회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이 시간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회복해야 함(13절 상).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 이 성전의 본질적 사명에 대해서 예언하셨는데요. 신약성경에서까지 예수님께서 이 성전의 본질적 사명을 인용하셨다면요. 바로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강조하여 밝히고 계시는 거예요. 그것은 교회가 기도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초대교회도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님의 강림을 간절히 기다리며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시작되었던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의 교회생활 가운데 기도가 가장 먼저 우선시되어야 하고요. 강조되어야 하고요. 마무리 되어야 하는 거예요. 기도가 없이는 교회의 시작도 없고요. 성령님의 역사도 없고요. 하나님의 영광도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먼저 기도의 불을 붙임으로써 교회의 본질인 사명을 회복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가장 가슴 아픈 일은 말세 마지막 때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주의 종들이나 교인들이나 예외 없이 가장 약한 것이 다름 아닌 바로 이 기도예요. 기도는 영적 호흡으로서 이 기도가 끊기면 우리의 영적 호흡이 끊기므로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마는데요.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소홀히 여기는 앞뒤가 뒤바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을 대표해서 사무엘 선지자는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상 12:23)라고 강조해서 증거했고요. 신약을 대표해서 바울 사도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강조해서 명령했는데요. 우리는 이것을 너무도 잘 알면서도요. 말세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약하고요. 가장 무기력하게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기도생활인 거예요.
예화) 경건의 시간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3가지 원인을 기록한 영성신학자 리처드 포스터의 「영적 성장을 위한 제자훈련」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기 전 ‘기름 짜는 틀’이라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시는데요. 3년 동안 영적으로 훈련시켰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한심한 일이예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무도 안타까운 심정으로 베드로에게 가셔서요. 마태복음 26:41에 뭐라고 말씀하세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세 번씩이나 가셔서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하셨는데요.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졸다가요. 결국 시험에 빠져서요. 계집여종 앞에서까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말았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그런 베드로에게 찾아가셔서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물으시고요.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세 번씩이나 당부하세요. 이 일련의 사건들은 영적으로 다 연결된 사건들이에요. 그런데 이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베드로 사도가 깨어 기도하지 않는데서부터 비롯되었던 거예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기도해야 하지만요. 시험에 들었다가도 여기서 헤어나오기 위해서라도 깨어 기도해야 하는 거예요. 어떠한 시험도 우리의 힘으로는 못 이겨내지만요.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서 우리가 못 이겨낼 시험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어요. 그런데도 우리가 지금까지 아무리 애쓰고 수고해도 얻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임을 각성하고요. 이제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패턴을 완전히 바꾸어야 해요.
예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발명왕이 된 토머스 에디슨처럼 기도의 땀을 흘려야 함.

간증) 누워서 기도하며 허리디스크 치료받은 위임목사님과 성도들의 이야기
간증) 7년 동안 임신 못하던 어느 권사님 아들내외가 위임목사님의 안수 기도와 믿음의 기도로 임신하게 된 이야기


2.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함(13절 하).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오면 바깥 담 사이에 이방인의 뜰이 있었는데요. 거기에 물건들을 파는 가게가 있었어요.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가 직영하던 가게였어요. 그런데 이 가게에서는 제사를 드리는데 필요한 소, 양, 비둘기 등 동물로부터 시작해서요. 밀가루, 올리브기름, 포도주, 나무까지 다 팔았어요. 그래서 제물도 다른 데서 가져오면 안 되고요. 이 가게에서 구입한 제물만 성전 제사에 적합한 규격품으로 인정을 받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당연히 가격이 시중가의 몇 배나 비쌌고요. 이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했던 거예요. 심지어 당시 20세 이상 유대인 남자들은 해마다 성전 관리 유지를 위해 한 차례씩 성전세로 반 세겔을 바쳐야 했는데요(출 30:13). 성전세로 바칠 반 세겔을 바꾸어 주는 환전상까지 이곳에 있었어요. 여기 반 세겔은 은 5.7g정도로서 두 데나리온에 해당하고 한화 20만 원 정도 되는 돈이었는데요. 환전의 차익을 노리기 위해 유대 동전을 받지 않고 두로 세겔(Tyrian shekel)을 받고요. 또 거기에다가 환전의 대가로 반 세겔의 1/24의 이익금을 덧붙여 받았다고 해요. 결국 이 대제사장들의 탐심이 거룩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던 거예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도요. 자신의 물질이나 명예 등 이해관계가 걸림이 되어서 교회생활이 무너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아요? 그러나 이러한 교회생활은 주님이 아닌 또 다른 우상을 섬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골로새서 3:5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경고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속에 이런 탐심이 생기면 “주여! 주여!” 부르짖으면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육신의 탐심에 대해서 날마다 순간마다 죽어져야 해요. 내가 죽어지지 않으면 평생 그 탐심의 불행과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이러한 탐심을 이겨내지 못하니깐요. 결국에는 불만과 불평과 불행의 삼총사(?)에게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 거예요.
예화) 탐심으로 인하여 한일관계도 악화시키고 동북아 분업구조를 깨뜨리며 오히려 자국민의 손해를 감수하도록 이끌어가는 일본의 정치인들
예화) 탐심으로 큰일 당할 뻔한 어느 부목사님 사모님 이야기
예화) 감사함으로 어려운 인생을 행복인생으로 바꾼 정신과 전문의 이근후 박사의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이야기
예화) “돈은 바닷물과 같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만 더해준다”는 서양속담 이야기


3. 치유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14절).
 당시 맹인과 저는 자들은 율법에 의해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레 21:18). 그래서 이들은 성전 입구에서 구걸하며 먹고 살아야 했던 거예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들을 고쳐 주시고요. 성전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셨어요. 이는 성전의 또 다른 기능인 치유를 보여 주셨던 거예요. 그런데도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성전에서 예수님이 치유하신 일과 또 시편 118:25-26의 예언처럼 그 일을 보고 어린이들이 “호산나(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찬양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고 감사해야 했는데요. 오히려 이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분노하였던 거예요. 그들은 성전이 치유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본질적 사명을 끝까지 외면하였던 거예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교회의 궁극적인 사명은 영혼의 죄악과 마음의 상처와 육신의 질병의 치유에 있어요. 그런데 치유라고 하면 마음의 상처만 생각하는데요. 이 영·혼·육 세 가지가 모두 전인치유를 받고 전인건강을 회복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 이상 바로 이 치유가 안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영혼의 죄악이 치유를 받지 못하면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요. 마음의 상처가 치유를 받지 못하면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요. 육신의 질병이 치유를 받지 못하면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늘 강조하지만 우리가 믿어야 할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7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실 일을 예언하신 이사야 53:4-5에 가장 잘 나와 있어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지 않아요?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육이 치유 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모든 죄악과 상처와 질병을 내려놓고요.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 이루신 주님의 치유를 확실히 믿음으로 받아들이고요. 치유의 응답의 때까지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다리는 거예요. 그리할 때 우리에게 영·혼·육의 전인치유가 이루어지고 전인건강이 회복되는 거예요.
예화) 우리가 먼저 치유받고 상처입은 치유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헨리 나우웬 박사가 쓴 「상처 입은 치유자」 이야기
간증) 일본에서 폐암투병중인 지인 집사님을 위해 위임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대신 녹음해가서 전달하는 안수집사님의 믿음 이야기
예화) 영적인 충전과 회복을 위해 공동체적 영적 나눔의 필요를 말씀하신 안수집사님의 이야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피눈물 나는 인생의 눈물의 골짜기를 겪고 왔겠지만요. 부족한 종도 주의 종으로 소명을 받고요. 지난 42년의 피눈물 나는 세월을 목회해 왔습니다만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눈물로 기도하며 부르짖지 않고는 이 사명을 감당할 수도 없었고요. 이렇게 살아남아서 행복한 목사를 될 수도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치유하는 교회에서의 지난 20년 동안도 매일 새벽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간절히 부르짖고요. 어떠한 탐심조차도 다 내어 버리고 저 자신부터 마음을 비우고요. 영혼을 향한 불타는 사랑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치유받고 치유하다 보니깐요. 오늘의 이 은혜롭고 행복한 우리 치유하는 교회를 이루게 된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도 지난 날 우리의 교회 생활을 돌이켜 보면서요. 맨날 말로만 떠들고 글만 쓰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나 주고 시험에 빠뜨리고 교회의 암적 존재로 살아감으로 결국 연자맷돌을 매는 심판을 당하게 될 텐데요. 일생을 강도의 소굴에서 불행과 고통 속에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을 끝내버린다면 이 얼마나 불행하고 불쌍한 인생이에요? 그러나 이름도 없고 빛도 없고 말도 없이 교회생활을 하면서도요. 이렇게 주의 종들이나 온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고 은혜를 끼치고 사랑과 존경을 받는 신앙생활을 하다가요. 그의 여생도 복 되고요. 자손도 귀하게 쓰임 받으면서요. 하나님의 영광을 마음껏 드러내다가요. 어느 날 주무시듯 평안하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요. 모든 성도들과 주의 종들의 눈물의 아쉬운 작별 속에서 하늘나라로 떠나간다면 이보다 영광스럽고 복된 삶이 어디에 있겠어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편의 교회생활을 하고 계세요? 강도의 소굴의 삶입니까? 아니면 천국의 치유 공동체의 삶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