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복음화(30)                                                       (2019. 7. 28)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마태복음 21:23-27


  예수님께서 고난주일에는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고요. 월요일에는 성전을 개혁하시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어요. 그리고 화요일에는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시면서요.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인 당시의 이스라엘의 최고의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들과 문답하시는 것을 보면서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영적인 권위에 순종해야 함
먼저 본문 23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시오, 영원한 대제사장이시오, 대선지자로 이 땅에 오셔서요. 그동안 얼마나 수많은 은혜로우신 말씀들을 전하시고요? 얼마나 수많은 귀신들을 쫒아내시고요? 얼마나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요? 얼마나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어요? 거기다가 그 전날까지만 해도 성전을 개혁하시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데요. 거기에다 대놓고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런 권위를 주었느냐?”고 시비를 거는 것 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권위임을 믿지 않고요. 하나님께서 이 권위를 주심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십시오. 그러니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있겠어요? 이 모든 불신앙이 근본적으로 어디서부터 온 문제인지 아세요? 영적 교만에서 온 거예요. 자신들이 대제사장이고 장로가 됐으면 됐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판단할 수가 있느냐는 거예요. 그들의 영적 교만이 바로 그들의 결정적인 병이었던 거예요.
예화) 권위가 상실된 시대
예화) 폴 워셔(Paul Washer)목사의 확신(Gospel Assurance and Warnings)」이란 책


  그래서 로마서 13:1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다 된 줄로 착각하지도 말고요. 다 선 줄로 착각하지 말아야 하고요. 몸에 힘을 들이지도 말고요. 목에 힘을 주지도 말고요. 얼굴에 인상 쓰지 말고요. 더 이상 영적인 권위에 도전하며 살려고도 하지 말아야 해요. 그럴수록 그러한 인생은 지옥과 같은 종교생활 가운데 피곤하고요. 지치고요. 짜증나고요. 불행하고요. 고통스럽고요. 실패하고요. 결국에는 인생이 파멸해 버리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13:17의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는 말씀처럼이요. 우리를 가르치는 교사나 목자나 주의 종들에 이르기까지 기쁨으로 순종하든지요. 억지로라도 복종해야 하는 거예요. 그들은 자기들이 회개해야 할 것처럼 하는데요. 우리가 순종이나 복종까지도 안하면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무런 유익이 없는 거예요. 사실 이것은 영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이고요. 말씀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요. 더 나아가 엄밀한 의미에서 영적으로 잘 분별해서 보면 하나님께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무서운 사탄의 범죄행위인 거예요. 그것이 평생의 사명인 사람들은 평생을 그렇게 복을 다 잃어버리고 살다가 떠나가더라고요. 그러므로 우리보다 우리 자손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적인 권위에 순종해야 하는 거예요.
 예화) 신월파출소 옆 유명한 보리밥과 팥 칼국수집 화분
 예화) 주의 종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가르침을 주신 위임목사님의 부모님의 신앙교육


  우리가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요. 주님의 영적 권위를 철저히 인정하고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하고 고백하면서요. 주님의 인도하심에 다 맡겨 버리고요. 주님의 역사하심에 온전히 순종하고요. 주님의 영광만 드러내는데 다 드려지면요. 날마다 순간마다 “아, 이것이 영적인 세계이구나! 말로만 들었던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의 삶이구나! 기적이 상식이 되는 믿음의 세계이구나!......”하는 것을 분명히 확신하게 되고요. 체험하게 되고요. 선언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영적인 권위에 도전하면서 지옥과 같은 종교생활을 해선 안 되고요. 영적인 권위에 기쁨으로 순종하면서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을 회복함으로써요.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분명히 목격하고 체험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으로부터라면 믿어야 함
계속해서 본문 25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영적인 권위를 허물어뜨리려는 악의가 담긴 질문을 하니깐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고 역질문을 하시면서요. 그들의 허를 찌르면서 지혜롭게 그들의 덫을 피해 나가세요.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하고 물으세요. 그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 두려운 거예요. 사실 요한의 세례의 근원이 하늘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배척하고요? 심지어 헤롯왕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목을 베어 죽일 수 있느냐는 거예요(마 14:10). 말세의 마지막 때에도 성령님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신다고 약속 하셨듯이요.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주의 종들이나 성도들이나 교회들이나 선교지에는 초대교회와 같은 성령님의 불같은 역사가 계속해서 불일 듯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나 이를 믿지 않은 주의 종들이나 교인들이나 교회들이나 선교지에는 어떠한 성령님의 기적의 역사는 더 이상 안 나타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데에는 여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단어가 있어요. 그것은 요한의 ‘세례’라는 단어예요. ‘세례’라는 단어는 원래 헬라어로 ‘βάπτισμα(밮티스마)’라고 해서요. ‘잠김, 씻음, 연합’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로마서 6:3-4에 이 세례의 뜻이 가장 잘 나와 있는데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세례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죽고 장사 지내고요. 예수님과 함께 의에 대하여 새 생명 가운데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해요. 그래서 원래는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물속에 잠기셨다가 나오시는 예식을 받으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거예요. 우리도 지난날의 내 이성이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감정이나 기질에 대하여 죽어지지 않고는 결코 주님이 살아 역사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철저히 깨어지고 죽어질 때까지 어쩌면 일생토록 주님께서 나를 연단하시는 것이 우리의 일생의 광야의 훈련인 거예요.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그걸 머리로는 잘 알지 모르지만요. 가슴으로 느끼고 깨닫지 못하고요. 삶으로 행하지 못함으로써 평생을 그 연단의 불행과 고통을 겪다가 인생을 끝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예화) 세상에서 가장 멀고 긴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까지 30cm


  그러므로 가장 은혜롭고 지혜롭고 성령충만한 성도는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요. 육신이 건강하지 못하고요.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고요. 삶이 축복되지 못하고요. 신앙생활이 은혜롭지 못하면요. 곧바로 주님 앞에 엎드리는 거예요. 그러면 분명히 주님으로부터 깨우침의 음성을 듣게 되고요. 성령님의 은혜를 체험하고요. 믿음으로 결단하고요. 돌이켜서요.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지고요. 믿음으로 새롭게 일어서게 되는 거예요.
예화) 지난 목요일 밤 삼일·삼이여전도회 헌신예배와 은혜의 절정이었던 특별찬양 ‘요게벳의 노래’

  우리가 죽어지고요. 주님이 우리의 인생의 주인 되심을 믿고요.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드려질 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기적적인 일들이 주님으로부터 우리 가운데 놀랍게 일어나게 됨을 분명히 목격하고 체험하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봐야 함
마지막으로 본문 26-27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당시 헤롯왕도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믿지 않으면서도요. 유대 군중이 선지자로 인정을 하기 때문에 군중들이 두려워서 그를 함부로 처형하기를 두려워했고요(마 14:5).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도 실제로 그를 선지자라고 믿지 않으면서도요. 군중이 두려워서요. 믿는 척 하면서도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을 회피하니깐요.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하고 대답을 회피하시고요. 유대 교권자들의 모략적인 질문을 막으신 후에  다음 주일에 계속 되는 비유의 말씀들을 통해서 그들의 종교생활의 문제들을 더욱 더 깊이 있게 깨우쳐 주시고자 하신 거예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믿는다면 사람을 두려워해선 안 되고요. 신앙의 바른 양심을 가지고요. 바로 분별을 하고요. 바로 결단을 하고요. 바로 행동을 해 나가야 하는 거예요. 우리가 사람을 의식하는 순간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려 하고요.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불순종에 휘말리고요. 거짓과 위선의 삶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도 늘 유혹받는 것이 이러한 교인들의 소리예요. 교인들의 소리를 다 들어주면 제일 좋은데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안 맞고요. 교회에 유익하지도 못하고요. 하나님의 영광도 가리울 때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거예요. 그때마다 제 마음 속에 늘 떠오르는 말씀이 갈라디아서 1:10 말씀이에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과연 무엇이 하나님께 좋게 하는 영광을 위한 것이고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것이고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고요. 묵상하게 되고요.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외로운 결단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 결과 때로는 오해를 사기도 하고요. 반발을 일으키기도 하고요. 뒤돌아서는 교인들까지도 있어요. 그래도 이 목회가 목사의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서가 아니고요. 입신양명을 위해서도 아니고요. 장래의 무슨 꿈을 이루기 위해서도 아니에요. 그저 성도들 은혜 받고요. 축복 받고요.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요. 어떠한 감정도 없고요. 위축될 것도 없고요.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세월이 흐르고 나면 진심이 전해지기도 하고요. 진실이 밝혀지기도 하고요. 진리가 승리를 하더라고요. 이처럼 끝까지 기다림 속에서 지내는 것이 목회라는 것을 40년의 세월동안 목회를 한 후에야 알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고요. 치유하는 교회에 온 지도 벌써 그렇게 20년이란 금방 세월이 지나버렸어요.
예화) 청·장년 농촌전도봉사활동
예화) 탈북민 대안학교인 다음학교 종업식 설교


  여러분도 신앙생활 가운데 때로는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할 때도 있고요. 세상에 해도 해도 너무 한다고 할 때도 있고요. 세상보다 더 한다고 느낄 때도 있을 거예요. 그래서 늘 말씀 드리지만 절대로 사람을 바라보면 실망하고요. 세상을 바라보면 실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요. 히브리서 12:1-2의 말씀처럼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는 말씀처럼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 바라보게 될 때 내 부모가 나를 버리고요. 내 남편도, 아내도 내 마음을 몰라주고요. 내 자식도 내 곁을 떠나가도요. 우리 주님만은 우리 곁에서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하시면서요. 우리의 어떠한 하소연에도 귀 기울여 주시고요. 우리를 그의 따뜻한 품에 안아 주시고요. 우리의 상처 난 가슴을 어루만져주시고요. 우리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시고요. 우리의 지친 무릎을 일으켜 세워주시고요. 우리의 손목을 붙잡아 주시고요. 우리의 나아갈 앞길을 이끌어주셔서요. 언젠가는 사랑하는 가족들만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요. 주위 사람들까지도 다 높여 주고요.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궁극적인 승리의 삶으로 영광 거둬 주실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영화「1919 유관순」
예화) 세계적인 과학잡지 PNAS에 실린 일본 방사능 오염지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늘 강조하지만 우리 인생은 절대 우리 뜻대로 안 되고요. 우리 힘으로도 안 되고요. 우리 목표대로도 안 돼요.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고요. 하나님의 힘으로 되고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거예요. 우리가 이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이제 남은 여생이라도 영적인 권위에 순종하고요. 하나님으로부터라면 믿어야 하고요.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기적적인 일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끊임없이 불일듯 일어나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