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복음화(3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여(Ⅰ) 마태복음 23:1-12 


 지난 주일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의 시험도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명쾌하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으로 요약하셨는데요. 사실 우리가 추석 연휴에 사랑하는 부모, 형제, 자녀손들을 만나면서 이를 실천하기가 결단코 쉽지 않았을 거예요.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실망을 하고 상처를 받고 시험에 빠져 돌아온 분들도 있을 거예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신실한 자들을 보면 나도 저렇게 돼야겠다고 다짐하며 은혜를 받고요. 외식하는 자들을 보면 나는 저렇게 안 돼야겠다고 결단하면서 은혜를 받는 거예요. 지난 주일예배를 마치고 추석 선물 택배 배달원에서 문자메시지가 왔는데요. ‘김외식 목사 고객님...’ 거기에 쓰여져 있었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주님께서 내가 외식하는 목사여서 안 되겠다 싶어 나를 깨우쳐 주실려고 김외식 목사 고객님이라고 적게 하셨을까?......”하는 등 별의 별 생각이 들어서요. 한 동안 그 문자 메시지를 묵상해 보았어요. 우리 자신이 겉과 속이 다르고요. 앞과 뒤가 다르고요. 전과 후가 다르게 살아가면서도요. 자신이 외식하는 자인 줄은 깨닫지 못하고요.자신도 모르게 영적으로 점점 잠들고요. 병들고요. 죽어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보면서요. 우리가 남은 여생 외식하는 자의 화를 안 당할려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 이 시간도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삶의 본이 되어야 함
 먼저 본문 3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과 사두개인들과 율법사의 시험을 다 이겨내신 후에요. 모여든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셨어요. 당시 유대 랍비들은 앉아서 가르치시는 것이 습관이었는데요. 그들은 “모세가 계명을 받아 여호수아에게 주었고, 여호수아는 12지파 장로들에게 주었고, 장로들은 선지자들에게 주었고, 선지자들은 회당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주었다”(Aboth 1:1)고 믿었기 때문에요.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모세의 권위를 독점한 것처럼 모세의 자리에 앉았는데요. 그들이 신앙적으로 최고인 것처럼 교만한 모습을 보여준 거예요. 그런데 여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결정적인 문제는 그들은 말은 잘 하는데 삶이 받쳐주질 못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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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우리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언제, 어디에서나 어떠한 말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믿는 자로
서 삶의 본이 되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전서 5:2-4에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고 분명히 약속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삶의 본이 되어 살아갈 때 우리는 더 이상 외식하는 자로서 화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요.


오히려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나 이웃들에게 신앙의 큰 모범이 되고 감동이 될 뿐만 아니라요. 이 땅의 복과 더불어 천국의 영광의 면류관을 모두 다 누리게 될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수고의 짐을 나눠져야 함
 계속해서 본문 4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온갖 까다로운 규례들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가르치면서도요. 자신들은 궤변적인 예외 조항을 만들어서 율법의 의무에서 빠져 나갔어요.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손가락 까닥하지 않으면서도 백성들에게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워 줘서요. 이러한 것들로 부터 헤어 나올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의 모범과는 정반대였어요.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시고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과 상처와 질병의 모든 짐을 대신 져 주시고요.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던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감동적인 희생이었어요?
믿음의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사랑으로 섬길 때 그의 영혼에 감동을 주고요.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고요. 그들의 상처 난 가슴을 싸매고 치유하고요. 주님의 제자로 양육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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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다른 길이 없어요. 우리도 지금까지도 수없이 억울하고 원통하게 고통 당하고 있는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과 이웃을 위해서요. 갈라디아서 6:2-3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강조하셨던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의 수고의 짐을 나눠지고요. 결단코 자신이 다 된 줄로 착각하지 않을 때 우리가 더 이상 외식하는 자의 화를 당하지 아니하고요. 오히려 주님께서 그런 사람을 인정하시고요. 주위에서 더욱 높임을 받고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크게 써 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겸손히 낮아져 섬겨야 함
 마지막으로 본문 12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들에게 보일려고요. 경문의 띠를 입게 했는데요. 여기 ‘경문’이란 신명기 6:8에 나오듯이 히브리어로는 ‘תפֹ֖טָטֹ(토타포트)’라고 하는데요. 유월절 규례(출 13:2-10)와 장자 성별 규례(출 13:11-17)와 신앙교육 명령(신 6:4-9)과 율법에 대한 복종 규례(신 11:13-22) 등 4종류의 성구를 적은 양피지를 담은 네모난 조그만 성구함이었는데요. 손목과 이마에 붙여 그들의 호신구로 삼았는데요. 예수님께서 경문을 차는 것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랍비들에게 경문의 규격도 정해져 있었으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자기 마음대로 그것을 넓게 만들어 붙여 더욱 더 경건하게 보일려고 하는 것을 책망하신 거예요. 또 ‘옷술’은 히브리어로 ‘תצִ֛יצִ(치치트)’라고 해서요(민 15:38). 겉옷의 가장자리에 술을 드리우고 푸른 실로 장식을 하였는데요. 율법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 예수님도 입으셔서 혈루증 앓는 여인이 잡았던 ‘옷가’가 바로 이 ‘옷술’을 말했던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신이 경건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 길게 늘어뜨렸던 것을 책망하셨던 거예요. 또한 잔치의 윗자리 연회장의 우측 끝에 앉아서 세상적인 영광을 누릴려고 했고요. 회당의 높은 자리인 율법을 넣어 둔 궤 앞에 앉아서 종교적인 영광까지 누릴려고 했던 거예요. 또한 시장에서 문안을 받으려고 하고요. 또한 율법 교사들을 신약시대에 이르러 랍비 힐렐 이후부터 불리워졌던 랍비 즉 ‘나의 큰자’ ‘선생’이라고 불려지며 존경받기를 원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생’이라고 높임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요. 심지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나 ‘지도자’라고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선생은 한 분 즉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고요. “너희는 형제니라”고 철저히 겸손히 살 것을 강조하셨던 거예요.


 그런데 말세 마지막 때 오늘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사탄에게 다 속아서 교만에 빠져서요. 형제된 사랑을 하나 됨을 지킬려고 하지 않고요. 이 모든 것이 하나 됨을 지켜 나가야 할 하나님의 교회마저도 사탄의 맹렬한 융단폭격 가운데 교만에 빠져서 순종도 않고요. 복종도 않으니깐요. 심령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서요. 행복도 못 얻는 황폐한 신앙생활을 평생토록 해나가는 거예요. 이 얼마나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신앙생활이에요?
그래서 본문 마지막 12절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 강조하셨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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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주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지금까지 생존케 하시고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갈 인생에 이렇게 큰 복을 주셨을까요? 우리만 복 받고요. 우리 자손들만 잘 살라고 그러셨을까요? 저는 결코 그렇게 믿지 않아요. 적어도 우리 주위의 외롭고 힘들고 불행하고 고통 당하는 형제와 이웃을 돌보라고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더 이상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화를 당하지 않으려면요. 이제 우리의 남은 여생이라도
우리가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이 되고요.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수고의 짐을 나눠지고요. 교만의 멸망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낮아져 섬길 때 우리가 더 이상 외식하는 화를 당하지 아니하고요. 오히려 자손대대로 더욱 더 진솔하고 복되게 살아가며 영광 돌리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