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복음화(37)-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여 Ⅱ
마태복음 23:13-28(2019. 9. 22)


 지난 주일에 이어서 마태복음 23장 한 장 전체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7번이나 강조하며 책망하시는데요.
유대인들에게 7이라는 수는 하늘의 수 3과 땅의 수 4를 더한 완전수로써 끝없이 강조하여 책망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가르치고 잘 지킨다고 하면서도요. 실제로는 율법의 짐에 눌려서 복음의 눈을 뜨지 못한 가장 심각한 영적 문제를 안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겉으로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되었다고 하지만요. 말세 마지막 때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신앙으로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는 우리의 영적으로 잠든 신앙을 일깨워 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에요. 남을 탓할 것 아무 것도 없이요. 오늘 이 시간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여”하고 나 자신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천국 문을 막아서는 안 됨

 먼저 본문 13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왜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하고 책망하시면서요. 가장 먼저 그들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요. 그들도 들어가지 않고요.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책망하였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말씀하셨듯이요.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고요.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셨는데요. 외식하는 자들은 사탄에게 속아서요.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소중한 줄을 몰라요.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도 보면 일 년 내내, 아니 평생토록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 한 명 구원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가정에서나 이웃에서나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도요.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어서요. 시험에 빠지게 해서요. 교회를 떠나가게 할려고요. 주의 종부터 시작해서요. 장로들, 권사들, 집사들에 이르기까지 교회에 대해서 온갖 비방과 험담을 늘어놓는 거예요. 그러면 신앙이 약하고 분별력이 없는 교인일수록 곧바로 상처를 받고요. 시험에 빠져서요. 신앙이 흔들리고요. 견디다 못해서 교회를 떠나 버려요. 결국 사탄의 계략에 여지없이 빠지고 만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영혼에 상처를 주고 시험에 빠뜨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마태복음 18:6에 뭐라고 경고하세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얼마나 무서운 경고에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두렵고 떨림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예화: 하나님의 심판>


 그러므로 말세 마지막 때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 할수록 사탄이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 달려들어도요. 우리가 비둘기같이 순결하기도 해야 하지만요. 뱀과 같이 지혜롭게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쓰러뜨릴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다 맡기고요. 이러한 사탄의 계략을 영적으로 잘 분별하면서요. 우리가 이러한 시험에 절대 넘어가서는 안 되는 거예요. 오히려 우리에게 어떠한 상처를 줄려고 해도 다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뭐라고 했어요? 아무리 사탄이 우리의 신앙을 뒤흔들고 쓰러뜨릴려고 갖가지 상처를 줘도요. “No, thank you!(천만에요!)”하고 결단코 어떠한 상처도 거절하고 안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뭘 그렇게 미련하게 이 상처, 저 상처 다 받아들이고요? 심지어는 자기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인데도 자기가 나서서 상처를 다 받아 버리는 상처 수집가(?)까지 있어요. 제가 가끔 웃음의 소리로 “저는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인물 빼놓고......”라는 말을 하는데요.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을 때 지루하고 딱딱하게 느낄까 봐서 웃음의 소리로 하는데요.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목사님이 무슨 인물이 잘 생겼다고 자꾸 저런 소리를 하느냐?”고 시험들 분들이 계실지 몰라요. 우리의 마음에 상처가 있으면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요. 모든 환경에 감사하지 못해요. 그러니 얼마나 스스로 불행하고요? 얼마나 어리석고 우둔한 신앙생활이에요?
<예화: 윌리엄 캐리(William Carrey) 선교사>


 우리도 영혼을 살리고 주의 사명을 헌신적으로 충성스럽게 감당할려고 하면요. 사탄은 여지없이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방해하고 발목을 잡을려고 공격해 와요. 그러나 그러한 핍박은 예수님도 겪으셨고요. 초대교회 사도들도 겪었고요. 2000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주의 종들과 충성스러운 성도들을 끊임없이 어떠한 사탄의 공격을 받았던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외식하는 자들의 어떠한 공격에도 낙심하지 말고요. 끝까지 영혼을 살리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해요.
<예화: 기도 받으러 찾아 온 두 권사님>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천국 문을 가로막고 나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막는 일들을 중단함으로써 외식하는 자의 화도 더 이상 당하지 말고요.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모두 다 구원하고 치유하고 양육하여 주님의 제자 삼는 놀라운 축복을 다함께 누리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온전한 십일조의 삶을 살아야 함

 본문 23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두 번째 결정적인 문제는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의 말씀처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들(the latter), 즉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행하고요. 저것들(the former), 즉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도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거예요. 여기 박하는 ‘ἡδύοσμον(헤뒤오스몬)’이라고 해서 ‘향기롭고 달콤한 냄새’라는 의미이지만 박하는 다 아실 거예요. 회향은 ‘ἄνηθον(아네톤)’이라고 해서 미나리과에 속하는 식물로서 양념의 향료로 사용되었다고 하고요. 또 근채는 ‘κύμινον(퀴미논)’이라고 해서 역시 미나리과에 속하는 식물로 양념이나 약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가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도 둘 다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요. 그런데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루살이 즉 성지의 포도주에 섞여 있는 가장 작은 벌레인 하기 쉬운 십일조는 걸러 내고요. 약대 즉 성지에서 가장 큰 동물인 하기 어려운 십일조는 삼킨다는 거예요. 그러나 율법서인 레위기 11:4에 보면 이는 부정한 동물로서 먹을 수 없는 것으로서요. 우리가 삼켜선 안 된다는 거예요.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신약의 복음임을 강조하시면서요. 이러한 신앙의 십일조와 소득의 십일조까지도 버려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에 분명히 말씀하셨고요.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 목사님도 “네 지갑이 회개하기 전에는 진정한 회개는 없다”고 지적하셨던 거예요.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경우 십일조 헌금에서 걸려 버리는 거예요. 주님과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한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고요. 축복의 통로인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도둑질하는 교인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아요? 더욱이 월급의 십일조는 잘 바치다가도요. 퇴직금 등 목돈이 생기거나 부동산 매매 차익 등 큰 수입이 생기면 다 띄어 먹어 버리는 거예요. 그러나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축복은 자신의 인생에서 더 새어 나가고 마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한 십일조 생활이 얼마나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지를 말라기 3:10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분명히 약속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시험해 보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여기밖에 없어요?
<예화: 「십일조의 비결을 안 최고의 부자 록펠러」 책>


 그러므로 남은 여생이라도 더 이상 우리가 외식하는 자들처럼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지 않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함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복을 잃어버리지 않고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삶도 살고요. 온전한 십일조도 드려질 때 복의 근원 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쌓을 곳이 없도록 차고 넘치도록 채워 주시고 부어 주시고 갚아 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겉과 속까지도 깨끗이 해야 함
 본문 27-28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회칠한 무덤과 같이요.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려고 거룩, 거룩, 거룩하면서 아름답게 보였지만요.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즉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였다고 예수님께서 책망하세요.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내가 목사다, 장로다, 권사다, 집사다 목에 힘을 주고요. 위선적이고 가식적이고 거짓된 삶을 살아선 안 된다는 거예요. 지난 날 우리의 속이 어떠했는가를 돌이켜 보고요. 겉과 속이 같은 신앙생활을 회복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상담치유학에서도 상담관계 즉 상담자와 내담자의 친밀관계(Rapport), 신뢰관계, 사랑의 인간관계가 가장 중요한데요. 이를 상담관계를 위해서 시카고가 낳은 세계적인 심리학자요, 노벨 평화상 후보로까지 추천되었던 인간 중심 상담을 외쳤던 칼 로저스(Carl Rogers) 박사는 첫째, 순수성(일치성), 둘째, 무조건적 수용, 셋째, 정확한 공감적 이해를 강조하였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우리의 사랑의 인간관계를 무너뜨리는 죄악으로 마태복음 15:19-20에 구체적으로 지적하세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고 경고하고 계시는 거예요. 여기에 보면 우리의 마음 속을 더럽게 하는 외식과 불법이 무엇인가 분명히 밝히고 계세요. 악한 생각이나 살인이나 간음이나 음란이나 도둑질이나 거짓 증언이나 비방하는 것들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러한 불의한 것들이 다 우리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거예요.
<예화: 화성 연쇄살인의 용의자>


 그런데 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수고해도 안 돼요. 그것이 문제예요! 그러나 성령님만이 우리를 치유하시고 변화시킬 수 있어요. 오직 말씀과 기도로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는 길밖에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의 충만함을 위해서는 성령님의 치유의 은혜를 사모하고요. 그 치유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때만이 내가 애쓰고 수고하지 않아도요. 자연스럽게 치유되고 회복되어서요. 삶이 예수님을 닮아 온유하고 겸손히 배우고 섬기면서요. 깨어지고 낮아져서요. 겉과 속이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저는 적어도 우리 치유하는 교회를 목회해 나가면서요. 이렇게 치유되고 변화되는 교인들을 뵐 때마다 너무도 감격스럽고 감사해서요. 아무리 목회가 어렵고 힘들어도 큰 위로를 받고요. 새 힘을 얻는 거예요.
<예화: 한 장로님의 문자 메시지와 답장>


 이러한 성령님의 치유의 역사는 지난 주간 부산의 유일한 기도원인 금정산 가나안 수양관에서 있었던 치유성회에서도 예외 없이 성령님의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어요. 집회를 갈 때마다 느끼는 바 이지만 어느 곳에 가나 치유의 은혜에 갈급한 심령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요즘 교인들이 기도원에는 잘 안 가는데요. 그래도 치유의 은혜를 사모하는 주의 종들이나 교인들이 몰려들어서요. 여러분의 뜨거운 기도에 힘입어 이번에도 많은 영혼들이 함께 웃고 울면서 치유의 은혜를 크게 나누고 돌아올 수 있었어요.  다른 길이 없어요. 우리가 치유 받지 않으면 평생을 교회 다녀도 사탄에게 속아서요. 지옥과 같이 다른 사람만 해하다가요.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고요. 영원한 지옥 불못에 떨어지고 말지만요. 우리가 성령님의 뜨거운 치유의 은혜를 체험하고요. 겉과 속이 깨끗이 치유를 받으면요. 남은 여생은 날마다 순간마다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서요. 마지막 때 사명을 감당하며 복되게 살아가게 될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증경총회장 이상근 목사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오늘이라도 우리는 떠나갈 수밖에 없어요. 더구나 그동안 벌어놓고 모아놓고 쌓아놓은 것 다 내려놓고 떠나가야 하는데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이제는 결단코 천국 문을 막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요. 온전한 십일조의 삶을 살아야 하고요. 겉과 속까지도 깨끗하여서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부끄러움이 없이 인정받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더 이상 외식하는 자의 화를 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요. 진정으로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며 살다가요. 모두 다 평안하게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