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과 피로 눈물을 만들다마태복음 21:33-46

<예화: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노인>
    벽과 이야기 하는 느낌. 벽 앞에 서 있는 기분. 그 답답함. 여러분도 사시면서 여러 번 느껴 보셨죠?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는 것 같고, 힘껏 뛰어 봐도 항상 그 자리이고, 열심히 뿌리는데 열매는 안보이고, 마음 다해 사모해도 여름날 저수지 바닥처럼 심령이 쩍쩍 갈라지는 듯한 그런 상황가운데 신앙의 권태기가 찾아옵니다. 영적 골다공증에 걸린 듯이 작은 시련에도 믿음의 뼈가 부서지듯이 무너져 내리고 소망도 비전도 잃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뭔가 열심히 주섬주섬 주어 담았는데 아무 쓸모없는 돌맹이예요. 그것조차 우리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수많은 벽을 경험하셨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때는 공생애 마지막 주간 셋째 날.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고 있을 때, 산헤드린 공회에서 보냄을 받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참 성전이신 예수님에게 나와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고작 성전에서 수종드는 일군들에 불과한 그들이 예수님보다 자기들의 권위가 높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벽과 이야기하는 느낌은 아니었을까요? 틈만 나면 예수를 따라와 괴롭히는 저들과 상대하시랴, 십자가를 감당하기까지 철저히 버림받고 외면당하고, 심지어 폭행과 저주를 받으면서도 길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포도원을 향한 사랑,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 당신에게 맡기신 백성들과 교회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흔히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라고 불려지는데, 이 비유는 성경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를 관통하는 뜨거운 구속사의 물줄기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악한 농부의 관점이 아닌/ 포도원 주인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뜨거운 열정, 그 열정을 물려받은 아들의 죽음을 통한 헌신.. 이 뜨거운 땀과 피가 땅에 떨어져 다시금 포도원을 회복하시고 견고하게 세우시는 비전을 우리에게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여기 모인 치유하는 교회 가족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은 포도원을 위해 땀을 흘리심.
    본문 33절 말씀입니다.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어떤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원을 비유로 드신 이유는 성경에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백성들을 포도나무로 비유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것이 이사야 5장의 “포도원의 노래”인데 특히 이사야 5장 1-2,7절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포도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이 포동원은 기성품이 아닙니다. 즉 이미 잘 조성된 포도원을 산 것이 아닙니다. 위치도 좋고, 포도나무도 좋고, 도둑도 안 들고, 게다가 열매도 풍성히 맺기 때문에 애정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사랑만 가지고는 장가도 시집도 못 간다고 합니다. 집안도 좋고, 좋은 스펙, 멋진 외모와 실력을 갖춰야 취직도 하고 연애도 한다는데... 요즘 최고의 신랑감으로 남성의 키가 중요한 스펙이라고 합디다.
<예화: 최고의 신랑감>


    그러나 하나님의 그 포도원을 조건을 보고 사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포도원 주인으로서 직접 산기슭의 땅을 파고, 직접 돌을 제거하고, 직접 포도나무를 심고, 직접 망대를 세우고, 직접 술틀을 파 주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땀을 흘리고 정성을 기울였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 하나님은 참 뜨겁고 열정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구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쉬지 않으시구나. 하나님 아버지는 대충대충 건성 건성이라는 것을 모르시는 분이시구나. 열심히 창조하시고, 열심히 보호하시며, 열심히 임재하시고 열심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열왕기하 19:31을 보시면,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이렇듯 하나님 마음에는 열심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열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에 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오십니다. 왜요? 하나님의 열심은 성령이시기 때문이요, 성령은 불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가진 사람은 불을 가진 사람이며, 불이 열심을 낳고 열심은 땀을 흘리게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눈에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래서 불을 가진 자는 땀을 흘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땀을 흘리십니까? 힘들이지 않고 할 영역을 넘어서는 순간에 땀이 납니다. 집중하면서 목적을 가지고 열심을 내면 땀이 납니다. 그래서 열심과 반대말은 게으름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다이어트에 관심 있는 사람은 땀을 흘리지만, 다이어트에 관심 없는 사람은 땀을 흘리지 않습니다. 열심의 동의어는 관심입니다. 왜 하나님이 포도원을 짓기 위해 땀을 흘리셨을까요? 바로 관심과 사랑과 목적 때문입니다. 포도원을 짓고 있는 주인이 포도원에 갖는 사랑의 관심과 목적은 무엇입니까? 포도 열매를 추수해서 포도즙을 만드는 것입니다. 포도즙은 단순한 음료수가 아니라 기쁨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한 여름 8-9월은 무더위와 물 부족 때문에 고통이 최고조. 저장해 둔 물은 거의 떨어져서 마실 물이 없습니다. 살인적인 무더위에 모든 생축들이 목말라 헐떡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이 시기가 바로 포도를 수확하는 시기입니다. 갈증에 목말라 하던 사람들은 포도를 수확해서 포도를 밟으면서 조금 있으면 마시게 될 포도즙을 생각하며 신이 나서 노래하고 기쁨과 흥분을 감추지를 못합니다.
<예화: 투병하시던 아버지와 포도>


    이렇듯 포도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포도주는 목마름을 해결하는 음료수요, 고난과 고통을 없애주는 기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절기나 집안의 기쁜 행사에는 반드시 포도주를 식탁에 올려놓습니다. 안식일에는 한 잔의 포도주를 마셨고, 결혼식에는 두 잔의 포도주를,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심을 감사하는 유월절에는 넉 잔의 포도주를 마신다고 합니다. 집주인이 땀 흘리는 수고는 기억나지 않고 포도원을 보면서 흐믓한 마음을 갖듯이 우리 하나님께 우리 영적 이스라엘은 보고 또 봐도 사랑스럽고 존귀한 기쁨의 대상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스바냐 3:17)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격과 조건을 따지지 않고 택하시어 잠잠히 사랑하시도되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목적을 가지고, 지지하시며... 열심으로 포도원의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포도원을 위해 피를 흘리심.
본문 37~39절입니다.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주인이 포도원의 소출의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종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소출은 커녕 몹시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때리고 심지어 능욕하고 또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다시 세 번째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았습니다. 이제 주인에게는 더 이상 보낼 종이 없었습니다. 최후로 포도원 주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생각하기를 ‘아마도 농부들이 종들에게는 그처럼 심한 짓을 했을지라도 그러나 이제는 아들이니까, 그의 아들만큼은 존대하겠지..’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허나 포도원 주인의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악한 농부들의 생각은 ‘이제는 포도원 주인이 죽은 모양이구나. 그러니까 그의 아들이 왔지. 저 아들을 죽이자. 그러면 이 포도원은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되리라.’ 그래서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잡아 죽이고 그 몸을 땅에 묻지도 않고, 포도원 밖에 내던졌습니다. 짐승들의 밥으로 준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기대를 짓밟고 아들을 존대하기는커녕 도리어 심하게 멸시했습니다. 아들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을 다 아시면서도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원을 살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궁극으로는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부전자전.  예수님은 아버지를 참 닮으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직접 땀 흘려 세운 포도원을 세우셨고, 아들은 포도원을 위해 아낌없이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아버지를 닮았어요.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피보다 땀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조용히, 가만히, 적당히, 느긋하게 계시다가 십자가 지셔도 되십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땀도 흘리시고 마지막에는 피를 흘리십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평생 땀을 흘리며 뛰어다니셨습니다. 심지어 생애의 마지막 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데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어디 겟세마네 뿐입니까? 40일 금식하셨던 광야에도, 갈릴리의 언덕과 가버나움에서도, 불쌍한 여인을 찾아갔던 수가성에도, 요단강과 나사렛, 사마리아, 여리고에서도,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그의 땀으로 땅을 적셨습니다. 하나님의 일로 늘 분주하였던 예수님의 옷은 땀이 밴 하얀 소금기가 얼룩져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피 흘리기 위해 오신 분이 땀도 흘리셨습니다. 이 땅을 피로 적시기 전에 땀으로 적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피를 경험하기 전에 땀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다쏟아내어 구속의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오늘의 비유는 창세기부터 계시록을 관통하는 구속사적인 큰 물줄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복음서에는 초림의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44절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는 요한계시록 14장에 포도원을 추수하시기 위해 영광스런 금면류관을 쓰시고 예리한 낫을 가지신 심판주로서 재림의 예수님이 오신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재림의 주님이 오실 때 먼저 알곡을 추수하십니다. 알곡추수는 친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축복의 추수입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추수하십니다. 이 포도원 추수는 심판과 멸망의 추수입니다.


요한계시록 14:19-20을 읽겠습니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여기 포도를 거둔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포도송이는 악한 대적자들. 악한 농부들이 맺은 불법의 죄의 열매입니다. 구약에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때리고 박해하고 죽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아들을 죽인 극악무도한 죄를 상징하는 것이 포도송이입니다. 이 죄악의 상징인 포도열매를 거두어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져서 그 틀을 밟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다 익은 포도를 추수해서 틀에 넣고 밟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붉은 피 같은 포도즙이 쫙 퍼질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 회개치 아니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포도원을 헤쳤던 악한 자들에게 내리시는 심판이 얼마나 실감납니까? “성 밖에서” 심판을 받는 것은 버림을 받았다는 의미인데,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대의 비극이고 저주이고 슬픔입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녀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쌍합니까? 그래도 마음 다잡으면 나름대로 극복하며 이 세상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생,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인생은 이 세상 어디에 설 곳이 있으며, 어디 깊은 곳에 자기를 숨길 곳이 있겠습니까? 지금 추분이 지나고 가을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어느덧 추수의 계절입니다. 마찬가지로 머지않아 역사의 가을이 찾아올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몸 버려 피 흘려 우리를 구원하신 초림의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이전보다 더욱 예수님을 사랑하기 바랍니다. 아니 이 험악한 세상에서 예수 잘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다시 오실 재림의 주, 심판의 주로 오실 예수님을 인내로써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신부, 불법을 행하고, 포도원에 악한 열매를 맺는 자들은 마지막 때에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지만, 그러나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청지기는 눈물로써 응답해야 함. 
마지막으로 40~41절입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포도원 주인은 악한 농부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악한 농부들을 풀무 불에 던져 넣으셔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하고 그들을 진멸하십니다. 그리고 주인은 포도원을 맡길 다른 일꾼들을 찾으시고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한 청지기들에게는 칭찬과 상을 주시고 기업을 맡기실 것입니다. 주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23) 이러한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사모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왜 예수님은 땀과 피를 흘리셨을까요? 포도원을 위해서는 이 두가지 액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시멘트로 건물을 짓고 밀가루로 양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물을 섞어서 반죽을 해야 하는 것과 동일한 이치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든, 가정을 변화시키든, 국가를 변화시키든, 교회를 회복시키시든, 나를 변화시키든 피와 땀이 그 변화를 위한 전부라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하고도 이렇게 세계에 자랑스런 국가경쟁력을 갖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나라가 말로 변화? 이 나라가 주문으로 변화? 시스템을 잘 도입해서 변화되었습니까? 땀과 눈물이 온 강산에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순교자들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순교에는 피 흘림의 순교가 먼저 있습니다. 교회는 그 순교의 피에 터를 잡습니다. 피 흘림의 순교 뒤에는 땀 흘림의 순교자들이 그 뒤를 따릅니다. 땀의 순교자들은 비록 목숨을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흘릴 수 있는 액체를 다 쏟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예화: 유년시절 다니던 교회이야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열심히 섬기지 않으면 이것은 섬김이 아닙니다. 이 열심의 옷을 우리 모두가 물려입고 교회와 가정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잘 섬겨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포도원을 경작하도록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영적 기업입니다. 그 기업이 사람일 수도 있고, 장소일 수도 있고. 비전일 수도 있고, 사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 땅은 좋은 땅입니까? 나쁜 땅입니까?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더 좋은 땅을 달라고 욕심 부리며 조르지 마세요. 남보다 못한 것을 주셨다고 한 숨 짓지 마세요.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땅을 들어갈 때가 군사적으로 강한 7족속이 이미 차지고 있는 땅을 주셨다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은 약속의 땅이고, 하나님이 주신 땅은 축복의 땅이라는 믿음의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기 전에 군사들의 땀과 피가 흘러서 지면을 적셨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약속과 이스라엘백성의 땀으로 지어지는 땅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젖과 꿀이 그냥 흐르는 땅이 좋은 땅이 아니라 피와 땀이 흐른 다음에 젖과 꿀이 흘러야 진짜 좋은 땅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땅은 좋고 나쁨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땅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보혈로 적셔놓은 땅이고, 갈아놓은 땅이고, 예수님의 보혈로 울타리와 망대를 세운 땅이기 때문입니다.
<예화: 유년시절 화학시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화학반응은 어떤 때는 눈에 안보일 뿐이지 급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영적반응입니까? 죽음과 사망의 땅이 생명과 부활의 땅으로 고통과 염려의 땅이 치유와 기도의 땅으로 변화되어집니다. 혼돈의 땅이 진리의 반석 위에 서는 영적 화학 반응이 급진적으로 일어납니다. 느껴질 수도 있고 느끼지 못하는데도 말입니다. 구약시대 때 계속 불타오르는 번제단 옆에서 사역했던 제사장들은 굵은 땀방울을 계속 흘립니다. 그 땀이 땅에... 제물들이 성막으로 들어오면 각을 뜹니다. 그러면 피가 땅에 도랑을 이루고 흐릅니다. 그러면 성막은 제사장의 땀과 제물의 피가 섞여서 다 젖어버립니다. 포도원에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땀과 영원한 제물이 되신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피가 흘러서 영적 이스라엘을 이루는 포도원에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땀과 예수님께서 흘려주신 땀과 피로 세운 포도원, 이제 우리가 흘릴 눈물과 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속한 이 포도원 공동체를 위해 이 제단을 위해 흘릴 눈물은 바로 내 몫입니다. 땀의 순교자, 눈물의 순교자가 되셔서 우리 교회의 포도원에 땀을 떨어뜨리기 시작할 때 반드시 영적 화학반응이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