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돌아가자

호세아 5:12-6:3

<예화: 어떤 부부가 외출을 했다가 서로 말다툼을 벌이면서 돌아오는 부부>  
    우리는 자기가 자기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자기만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또 반대로, 사람은 남들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인정의 욕구가 있습니다. 서로를 좀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좀 알아주세요, 인정해주세요. 고생하는 것도 좀 알아주고 외모에서 멋진 데, 예쁜 데가 어디인지도 좀 알아주고 잘 하는 거 있으면 그것도 좀 알아주고  교회에서 열심히 하는 것도 좀 알아주고 남편도, 아내도, 아이들도 서로서로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가정이 천국 가정인 줄 믿습니다. 부부간에 부모자식 간에 맨날 지적질이나 해보세요. 가정 지옥 되는 거 순식간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래요. 교회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갈등이 뭐 "예수가 그리스도다 아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다 아니다" 그런 문제로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좀 알아줘야 하는데 알아주기는커녕 사람 무시하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갈등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옆에 계신 분 얼굴을 바라보면서 좀 알아줍시다. 알아주는 말, 인정해주는 말, 뭐라도 좋으니까 칭찬 한 가지씩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영어로 praise 라고 합니다. 그런데 praise 라는 단어 뜻이 원래 ‘칭찬하다, 칭송하다, 높여주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아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칭송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그것을 알아드리고 높여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만 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을 받고 또 그 하나님께 세상 그 누구도 받지 못한 엄청난 사랑을 받고도 그 은혜, 그 사랑을 다 잊어버리고 ‘여호와가 누구? 저를 아시는 분이신지?’ 그렇게 뻔뻔스런 말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런 은혜 받은 일이 없는 것처럼, 그런 사랑 받은 일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아드리지도 아니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경배하기는커녕 작정하고 무시하고, 등 돌리고 떠나버린 이스라엘을 향해 부르는 하나님의 가슴 아픈 사랑의 노래, 애틋한 사랑의 노래가 바로 호세아서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700여 년 전, 북 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호세아에게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호세아 1:2절 하반절입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호세아는 하나님의 이 명령이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드릴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었기에 그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일생을 함께 하는 것인데, 호세아는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그것도 부정한 여자를 만나 한 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음란한 여자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고, 또 하나님의 명령대로 음란한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또 그 자식들에게 붙여진 이름들을 보면, 축복의 이름들을 지어준 것이 아니라 다들 심판과 저주의 이름들이었습니다. 음란한 고멜은 자식을 세 명이나 낳고도 또 다른 남자한테 가서 음행을 계속하다가 가출을 하고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다가 결국에는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신세까지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또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호3:1절 하반절).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 같으면 이런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어요? 호세아는 그 일이 죽을 만큼 수치스럽고 괴로운 일이었지만 이번에도 자기 재산을 팔아 팔려간 고멜을 갚을 치르고 다시 데려와 씻기고 새 옷을 입히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여보, 이제 다시는 다른 남자한테 가면 안 돼! 여기가 당신 집이고, 내가 당신 남편이야~ 애들을 봐서라도 제발 정신 좀 차려”
    호세아 선지자를 묵상하면 눈물이 나요. 아니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항변이 터져 나와요. “아무리 하나님의 종이라지만 하나님 원 해도 해도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주의 종한테 “음란한 여자한테 장가들어라~ 음란한 자식을 낳아라!” 이제는 도저히 데리고 살수도 없는 그런 상태에 있는 여자를 “돈까지 치르고 데려와 또 다시 사랑하라...” 이런 불쌍한 선지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예화: 고목사의 신세한탄>
    하나님께서 선지자 호세아에게 왜 그런 참담한 일을 시키셨을까요? 호세아 1:2절 하반절에서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도 죄악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제는 양심마저 화인 맞아버린 사람처럼 무감각해지고, 마비되어버린 이스라엘에게 “봐라~ 너희들이 지금 하는 짓이 바로 저 음란하고 수치스러운 고멜의 모습이 아니냐?” 하시면서 피부에 와 닿도록 충격요법을 쓰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제라도 나 여호와에게로 돌아오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이런 패륜 무도한 이야기는 한 음란한 여자 고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적으로 음부가 되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였고, 이 가슴 저미는 한 남편의 이야기는 선지자 호세아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의 이야기였습니다. 더 나아가 이 이야기는 2700여 년 전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과 그 백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 본질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말고 세상에 사랑하는 것들, 마음을 빼앗기는 것들이 너무 많이 생겨버린 오늘날 교회들의 이야기이고,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바로 나 자신의 신앙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 5: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본문 5장12절부터 15절까지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평소에는 자신들이 얼마나 심각한 중병에 걸렸는지 알지 못하고 좀이 먹어가고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다가 고난당할 때에... 이 고난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나라의 멸망을 말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나라가 멸망당하고 이방 나라로 포로로 끌려가고 여기저기 흩어져버리고 이방민족과 혼혈민족이 돼버리고 남왕국 유다도 주전 586년에 신흥제국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멸망당하고 다 짓밟히는 그런 고난을 받을 때에... 그때에, 그때에야 비로소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I. 돌아감: 관계회복
    저는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하나님은 방탕한 고멜과도 같은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보내 수도 없이 “돌아오라 돌아오라" 눈물로 호소했건만 끝끝내 외면하고 죄악의 길로 갔다가 나라를 잃어버리고 성전 불타 버리고 다 망해버렸는데... 그제서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그렇게 한탄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애들아~ 그때에라도...
(찬송가 273장 가사)
    요엘 선지자도 패역한 유다를 향해 이렇게 호소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요엘2:12) 이제라도... even now 대단히 늦었지만, 너무 멀리 와버렸지만... 그러나 지금이라도~ 이제라도~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되겠다...  하나님은 그래도 받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는 '돌아오라' 그리고 ‘나를 알라’ 이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야다’라는 단어로 기록된 '알다' 이것은 머리로 아는 지식적 앎이 아니라 히브리적 개념의 안다는 것은 언제나 서로간의 릴레이션십,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개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어떤 나라, 어떤 민족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많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달달 외웠으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철저한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삶에서 경험하는 실패와 아픔과 상처와 심지어 육신의 질병까지도 그것이 ‘이제라도 돌아오라’고 주시는 기회로 알고 상처입고 피 흘리고 오물투성이 지저분하고 초라한 모습이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II. 돌아감의 축복들
 1) 상처의 치유가 일어납니다.
    때로는 우리의 실패가 은혜입니다. 육신의 병듦도 은혜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온 마음을 쏟아 세운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리는 것도 은혜입니다. 맞아보면 정신 차린다고, 삶의 문제가 생기면, 삶에 어려움이 찾아오면~ 내 힘으로 안 되는 문제가 찾아오면... 그때서야 깨닫고 그때서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스라엘이 늦게나마 자기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런데 그 병을 치유하기 위해 그들이 찾아간 곳이 어디입니까? 본문 5:13절 말씀을 보니까 그들이 찾아간 곳은 앗수르였어요. 앗수르의 왕이었어요. 한마디로, 힘있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찾아갔어요. 그들이 이렇게 헛다리를 짚은 이유가 뭐겠어요? 자신들이 지금 병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왜 병들었는지, 왜 이 병이 찾아왔는지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려면 반드시 두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어느 위치, 어떤 상황,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화: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 여러 버전>
    누가복음 15장에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집 나간 둘째 아들도,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고 병들고 먹을 것이 없어 돼지 사료인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는 신세가 되었을 때에 자신의 한심하고 처량한 현실을 자각했을 때~ ‘아! 나에겐 집이 있었지 너그러우시고 부요한 아버지가 계셨지 우리 집에서는 종들도 배고픈 사람이 없지 아버지께 돌아가면 살겠구나.’ 그 순간부터 그의 삶에 치유가 일어난 줄 믿습니다.
    둘째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청소년 아이들이 가출을 해서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이제나 돌아올까 저제나 돌아올까? 애태우며 밤마다 문 열어놓고 기다리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 이 꼴로 돌아가면 부모님이 받아주실까? 용서해주실까?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화: 장로님 사랑하는 대학생 외동딸 신천지에 빠졌다가 돌아옴.>
    누가복음15장에도 집나갔던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가 먼저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얼마나 우셨습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자'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래도록 병원에 다녀도 낫지 않는 질병이 있습니까? 억누르고 있다가도 순간순간 올라오는 감정과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죄의 문제가 있습니까? 무릎으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고,   낫게 해주시고, 치유해주시고, 회복시켜주실 줄 믿습니다.

 2) 능력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이틀 후에, 셋째 날에... 이 말씀은 존 캘빈이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내려가셨다가 제 3일에 부활하실 것을 예표한 말씀이다’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것은 회복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에, 우리 주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자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능력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고 사신 주님의 부활의 권세 아래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같이 연약한 인생들이에요. 조금만 충격을 줘도 금방 상처 받고 금이 가고 깨어지고 부서지는 연약한 존재들이에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4:7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 같이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우리 인생이지만 그 가운데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면... 이어지는 말씀과 같이 (고후4:8-9절) “8.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연약하지만 깨어지기 쉽지만 우리 안에 부활의 능력이 되시는, 참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어떤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요? 어떤 사람들은 좀 배웠다고 좀 가졌다고 남들보다 좀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고, 심지어 남들보다 좀 더 건강한 몸을 가졌다고 우쭐대고 그것들을 자신의 능력의 원천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오직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고 그 인생에 고난의 밤이 찾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불신자들과 우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부활의 새벽이 약속되어 있어요. 보장되어 있어요.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목사이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인 토니 캠폴로(Tony Campolo)의 책 중에 “It's Friday but Sunday's Coming”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캠폴로 목사가 들었던,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명설교의 제목입니다. 'It's Friday but Sunday's Coming'  말 그대로 “지금은 금요일이지만 주일이 오고 있습니다.”이런 뜻입니다. 설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날은 금요일이었습니다. 금요일에 나의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건 금요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요일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금요일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눈이 빠지도록 울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목자를 잃은 양들처럼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건 금요일이었습니다. 일요일이, 주일이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이에요? 사탄은 우리에게 '다 끝나버렸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소망이 없다고, 해봤자 안 된다.’고 말합니다. ‘다시 일어서기는 틀렸다'고 말합니다.’ ‘헛수고 말라'고 말합니다. 그래요 지금은 아무런 소망이 안보일 수 있어요! 이러다 끝나는 거 아닌가? 생각 들 수 있어요! 사방팔방이 딱 막혀 더 이상의 길도 없고, 방법도 없고, 기회도 없고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두 다리 뻗고 울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그건 아직 금요일이기 때문입니다. 끝없는 터널 같은 막막한 어두움을 지나 Sunday, 주일이 오고 있습니다. 부활의 새아침이 밝아오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일요일의 광명한 새 아침이 반드시 오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세요. 그 능력 붙잡고 일어서세요. 울더라도 “주여~” 부르며 손 내밀면 주님이 붙들어주십니다.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주실 줄 믿습니다.             

 3) 삶에 축복의 단비가 쏟아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데 그것을 ‘땅을 적시는 늦은 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는 연중 두 번의 우기가 있는데 그것을 이른 비, 늦은 비 이렇게 부릅니다. 성령운동을 하는 분들은 이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역사를 성령강림과 연결해서 해석을 합니다. 이른 비는 2천 년 전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라고 하고 그리고 이제 주의 재림 전에 또 한 번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이것을 늦은 비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이 말씀이 바로 그 뜻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신학적 판단을 떠나서 여러분,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성령의 단비를 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시대 우리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갈등과 반목과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와 혼란과 분열과 도대체가 방향을 잃어버리고 표류하고 있는 것이 세상뿐입니까? 이 사회뿐입니까?  요즘은 세상이나 교회나 구분이 없어졌어요. 경계가 사라져버렸어요. 아니 어쩌면 교회가 더 나서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사회를, 세상을 그런 분위기로 흙탕물을 일으키며 이끌어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은 때에 폭포수와 같은 강력한 성령의 단비가 쏟아지지 않으면 이대로 다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노아의 때와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고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성령의 단비를 부어주시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나 자신이 여호와께 돌아가야 합니다.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의 자리, 교제의 자리, 바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우리의 눈물을 마중물 삼아 하나님께서 성령의 단비, 폭포수와 같은 은혜의 단비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돌아가야 돼요. 내 삶에, 내 가정에 우리 자녀들의 미래와 인생에 성령의 단비를 부어주시라고 울어야 되요. 땅을 적시는 늦은 비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