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복음화(41)-종말의 비유를 배우라
마태복음 24:32-44


 오늘 우리는 또다시 제 502주년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면서요. 계속되는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의 말씀 가운데 그동안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오늘은 비유를 통해 말씀하세요. 이 예수님의 종말의 비유의 교훈 가운데 우리가 말세 마지막 때 어떠한 개혁신앙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오늘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심판이 가까이 왔음을 깨달아야 함
 먼저 본문 32-33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요. 무화과나무에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예언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만 그것은 본문의 깊은 의미를 무시한 해석인 거예요. 유대인들에게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사계절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나무예요. 무화과나무는 3-4월 봄이 다가오면 가지가 연해지면서 작은 잎과 더불어 ‘파게(הגפ)’라는 첫 무화과나무 열매를 맺어요. 또 5-10월이 되면 잎사귀가 커지고 두 번째 무화과나무 열매인 ‘테에나(הנָאֵתְּ)’를 네 차례 정도 반복해서 맺어요. 이때가 이스라엘의 여름이에요. 또한 11월이 되면 무화과나무의 수액이 흘러나와 끈적거리고 공기 중의 흙먼지가 열매와 잎사귀에 달라붙어 지저분하게 보이는데요. 이때가 바로 가을인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 겨울에 무화과나무는 모든 잎이 떨어져 회색의 앙상한 가지만 남아요. 이처럼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사계절을 알려주는데 왜 이 종말의 말씀 가운데서 특별히 여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여름이라고 하면 ‘휴가’를 떠올리지만요. 유대인들은 ‘종말’을 떠올려요. 왜냐하면 이 ‘여름’이란 히브리어 ‘카이츠(ץיק)’이라는 단어와 ‘종말’이라는 히브리어 ‘케츠(ץק)’라는 단어의 어원이 같기 때문이에요. 더구나 이스라엘의 새해가 10월 가을부터 시작되기 때문에요. 그리하여 유대인의 사계절은 가을부터 시작해서 여름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듯이 앞서 말한 말세의 징조들을 보면서 주님의 심판이 문 앞에 이른 줄 깨달으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예화: 일본의 의류업체인 유니클로 회사의 광고와 89세의 양금덕 할머니>


 우리는 TV 광고 하나를 보고도 얼마나 놀랍게 눈치를 채면서도요. 말세의 종말의 징조를 보면서도 심판의 때가 우리 앞에 너무도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에요? 우리가 속을 비우고 내시경 검사를 통해 우리 몸에 펴져 잇는 갖가지 질병들을 조기 발견해서 치료를 하듯이요. 우리가 금식을 하면서라도 영적 내시경 검사를 스스로 해 보아서요. 우리가 온몸에 퍼져가는 영적인 질병들에 의해서 어떻게 병들고 죽어가고 있는가를 빨리 발견해서요. 조기 치료를 받아야 해요. 그런데 조기 치료의 기회를 놓치신 분들은 평소에 조기를 많이 드셔서라도 조기 은혜를 받고요. 자신의 영적인 병이 무엇인가를 조기 발견을 해서요. 영적인 조기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예요. 왜 우리의 삶 가운데 은혜가 마르고요. 축복을 잃어버리고요. 행복은 사라지고 있어요? 그것은 이미 여러분이 영적으로 잠들고 병들고 죽어가고 있다는 증거인 거예요. 그래서 한 주간의 영의 양식을 얻는 이 시간이라도 때로는 배에는 쓸지 몰라도요. 여러분의 영적 건강을 위해 쓰디쓴 말씀을 먹여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늘 강조하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뜻을 가장 먼저 성경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에 성경을 바로 배우고 읽어야 하고요. 그 말씀 앞에서 스스로 통회자복하며 믿음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일어서야 해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영적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Q.T., 경건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꼭 필요한 거예요. 그 다음으로 이 성경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해석과 적용을 해주는 설교 말씀을 통해서 내 자신의 영적인 문제가 무엇인가를 곧바로 깨닫고 돌이켜야 해요. 여러분은 어떻게 말씀을 받는지 모르지만요. 적어도 부족한 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요. 한 주간 내내 계속해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성령님의 음성을 받아 전하기 때문에요. 성령님께서 주셨다는 말씀의 확신이나 체험이 없이 그냥 의미 없이 전한 말씀은 결코 한 말씀도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도 안 되면 그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므로 개인적으로 사랑의 권면을 하게 돼요.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막다른 환경으로 몰고 가기도 하고요.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사건을 통해서라도 깨우쳐 주세요.


 그래서 우리의 심판은 죽음 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의 우리의 삶 가운데 그대로 드러나요.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는 내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요. 구원의 기쁨을 다 잃어버려요.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된 평안을 잃어버리고요. 입만 열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말만 터져 나오고요. 비방이나 하고 험담이나 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 사랑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완전히 사탄에게 속아 잘못 믿고 사는 거예요. 이보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이 어디에 있겠어요? 더 나아가 자신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정도 불행을 겪는 거예요. 영적인 기갈로 인해 가정이 불행과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거예요. 결국 천국과 같아야 할 우리의 가정이 지옥으로 변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더 나아가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쳐요. 전에는 물질로 큰 어려움이 없었는데요. 갈수록 경제적인 어려움이 더욱 심각해져 가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다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 계속되는 상처와 스트레스로 인해 자신의 건강마저도 무너져 버리고 마는 거예요. 결국에는 스스로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어느 날 갑자기 죽음에 이르고 마는 거예요. 이 얼마나 불행하고 불쌍한 인생이에요? 더 나아가서 가장 두려운 것은 주님이나 주의 종들이나 영적인 성도들마저도 그들로부터 더 이상의 희망을 갖지 못하게 될 때 그러한 사람들은 이미 회복하기 어려운 불행과 고통의 최악의 슬럼프에 빠져 있는 거예요. 부족한 종은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있으면서 세계 최강 최정예 경호훈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요. 치유하는 교회에 와서도 지난 20년 동안 산전, 수전, 지하전, 해상전, 공중전, 사탄과의 우주전까지 다 겪어 봐서요. 여러분이 웬만큼 괴롭혀 가지고는 안 괴로워버려요. 그러나 오히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다 상해 버려요.


 저는 지난 42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그러한 교인들을 종종 보았어요. 처음 예수님 믿을 때 그렇게 온유하고 겸손했던 분들이 장로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나서요. 점점 영적으로 교만해지더니요. 결국 마음이 강퍅하고 완악해져서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요.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하면서요. 하나님의 교회를 자신의 소유처럼 여기고요. 주의 종들을 자신의 종처럼 생각하고요. 교인들 앞에서 본이 되지 못하고요. 하나님의 교회의 걸림돌만 되고 암적 존재로 살다가요. 하나님의 영광을 다 가리우고 살다가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가는 교인들을 종종 보았어요. 그때마다 그가 처음처럼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겼다면 일생토록 신실한 장로로서, 안수집사로서, 권사로서 자손 대대로 복 되게 쓰임 받으며 주님께 큰 영광을 돌렸을 텐데 왜 저렇게 자신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며 살아가다가요. 저렇게 비참하게 인생을 끝내버릴까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 아프고 눈물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우리의 삶 가운데 끊임없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요. 깨닫지 못하고요. 돌이키지 못하고요. 영적으로 잠들고요. 병들고요.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해 이사야 6:9-10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강력히 권면하셨던 거예요.
<예화: 문제 앞에서 겸손히 낮아지신 장로님>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더 이상 고통이나 불행이나 파멸에 이르기 전에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종말의 징조를 보면서 주님의 심판이 우리에게도 너무도 가까이 왔음을 깨달으며 통회자복하고요. 돌이키고요. 새롭게 변화를 받게 될 때 거기서부터 풍성한 은혜와 축복과 복의 감격이 새롭게 시작될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멸망을 당하기 전에 복음을 깨달아야 함
 계속해서 본문 37-39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계속해서 노아의 때의 홍수의 심판을 통해 또 다시 종말에 대해 경고하세요. 말세의 마지막 때처럼 노아의 때에 육신에 빠져 살았던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어요.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고 경고하세요. 여러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죄악되었다는 것이 아니에요.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면서요. 성적으로 타락하고요. 가정의 거룩함을 무너뜨리고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데 그들의 죄악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육신에 사로잡힌 자들의 날이 120년이 되리라 한 것으로 보아서요(창 6:3). 노아의 방주를 짓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렸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요. 분명한 사실은 노아의 방주의 심판의 때까지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다는 거예요. 그러는 사이에 노아의 가족들이 얼마나 그들에게 경고하며 전도했겠어요?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찌는듯한 무더운 중동 땅에서 비도 잘 안 오는데 무슨 홍수가 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도 마!”하면서 다 비웃고 조롱하면서요.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막상 방주의 문이 닫히고요. 홍수가 나서요. 그들을 다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했으니 얼마나 어리석고 한탄스러운 일이에요? 그 때 방주의 문이 닫히고 홍수가 나니깐요. 많은 사람들이 방주로 몰려와서요.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했지만요.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창 7:16)에 말씀하셨듯이요.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셨기 때문에 아무도 열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 노아의 때 홍수의 심판은 결코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요. 실제로 있었던 사건으로서요. 노아의 방주는 이미 기독교 고고학자들에 의해 수없이 발견이 되었는데요. 성경에 기록한 대로 터키 북경 아라라트산 해발 4000m 지점에 눈과 화산재에 덮혀 보존된 것으로 탄소 연대측정결과 기원전 2500년 경 노아 시대 때의 것으로 증명이 된 거예요. 그 것도 성경에서 기록된 것보다 훼손이 된 길이 133m(원래 300규빗 즉 135m), 넓이 22m(원래 50규빗 즉 22.5m), 높이 13m(원래 30규빗 즉 13.5m) 규모의 방주가 실제로 발견된 거예요. 이처럼 노아의 방주로 분명히 이 땅을 심판하셨듯이 이것이 노아의 홍수의 심판의 영적인 교훈이고 경고인 거예요. 우리의 종말의 심판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말세다!”고 외친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요. 아직까지도 말세이니 언제 주님의 종말의 심판이 임하느냐고 의아해하고 의심하는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그러나 베드로후서 3:9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  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경고하신 거예요. 다시 말하면 아직도 주님을 믿지 않고 지옥 불못을 향해 떨어져 죽어가는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들이나 이웃들이 얼마나 많아요?
<예화: 최 목사의 비주얼>


 그래도 이렇게 전도하는 분들이 있으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은혜 받고 축복 누리며 사는 것 아니에요?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 회개하고요. 구원에 이르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속히 복음을 전해서 구원해야 하지만요. 그 때까지 참고 기다리고 계시는데요. 그 사랑을 외면하고 무시하다가는 결국 종말에 이르고 만다는 거예요. 그 종말이란 전 세계에 임하는 우주적인 종말도 있지만요. 언제 우리에게 닥쳐올지 모르는 개인적인 종말을 경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단코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는 이 땅에서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착각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벗어나서요.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요. 주님의 영광을 가리우면서 살다가요. 갑작스런 인생의 종말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불행하고 가슴 아픈 일이에요?
<예화: 「교회 오빠 이관희」책 이야기>


 그렇습니다. 우리의 남은 여생 세상에서 바랄게 더 이상 뭐가 있겠어요? 노아의 때처럼 언제 멸망 당할지 모르는 우리의 종말을 기억하면서요.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보다 더 신실하게 살아가고요.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하고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 주님께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복을 주시고요. 하늘에서도 상을 준비하여 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3.휴거의 때를 준비하며 소망 중에 살아야 함
 마지막으로 본문 40-42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두 남자가 밭에 있다가 한 남자는 데려가고 다른 남자는 버려짐을 당하고요. 두 여자가 집에서 맷돌질을 하다가 한 여자는 데려가고 다른 여자는 버려짐을 당할 것이라는 거예요. 이처럼 주님의 날이 언제 임할는지 알지 못하니까 “깨어 있으라”(:42, 43)고 두 번이나 말씀하시고요. “준비하고 있으라”(:44)고 또 다시 강조하신 거예요. 여기 나오는 종말의 비유는 데살로니가전서 4:16-17에 잘 나와 있어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께서 공중에 재림하실 때의 광경을 보여주고 있어요.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면요. 먼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살아 일어나고요. 그 다음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지는데요. 이 ‘끌어 올려 주님과 황홀함에 빠진다’는 의미에서 신학적으로 ‘휴거(rapture)’라고 표현한 거예요. 지금까지 성경의 모든 예언들이 다 성취되었듯이 이 예언의 말씀도 기필코 성취되지 않겠어요?
<예화: 자미선교회에 빠진 시한부 종말론자 집사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언젠가는 휴거를 경험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말세 마지막 때의 종말의 증거들을 통해 우리가 주님께서 언제 공중에 재림하시고요. 우리도 언제 휴거될지 아무도 모르니깐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듯이 항상 깨어 있고요. 종말의 때를 준비해야 하는 거예요. 그리할 때 우리가 날마다 순간마다 천국의 소망 가운데 깨어 있는 가운데 주님의 재림도 기쁨으로 맞이하지만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를 고통과 불행 가운데 파멸시키려는 사탄의 궤계를 능히 영적으로 다 분별하고요. 대적하고요.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39:6-7에도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고 강조하시지 않아요? 그러므로 이제는 남은 여생이라도 세상의 헛된 일에 마음이 뺏겨 소란하고요. 헛된 재물을 쌓느라고 주님의 사명도 감당을 못하다가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가지 마시고요. 늘 천국의 소망 가운데 모든 은혜와 축복과 행복의 통로인 예배의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고요. 말씀의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고요. 기도의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고요. 찬양의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고요. 교제의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고요. 봉사의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고요. 전도의 자리를 소중히 여기면서 나아오길 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남의 탓할 것 아무것도 없어요. 주의 종이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이요. 나 자신만 이 복의 통로인 예배를 목숨 같이 소중하게 여기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요. 쉬지 말고 간절히 기도하고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대로 십일조 헌금 온전히 바치고요. 어떠한 원수라도 뜨겁게 사랑하고요.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살리면서요. 주님께 대한 소망 가운데 마지막 때 사명에 충성을 다하다가 주님 앞에 이르는 것보다 더 의미있고 보람되고 복된 삶이 없는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제주 영락교회 치유성회, 아프가니스탄에서 순교한 배형규 목사님의 순교비와 아버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땅 위에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지만요. 우리에게도 어느 날 갑자기 이처럼 종말의 날이 닥쳐오는 거예요. 그러나 늘 강조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어떻게 살다가 인생을 마무리 하느냐는 거예요. 교회의 걸림돌만 되다가 비참하게 인생을 끝내느냐 아니면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살리며 복음의 통로로 쓰임 받으며 인생을 의미 있고 복되게 마무리 하느냐 하는 것은 오늘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의 결단과 선택에 달려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심판이 가까이 왔음을 깨달아야 하고요. 노아의 때를 기억하며 멸망당하기 전에 복음을 깨달아야 하고요. 휴거의 때를 준비하며 소망 중에 살아가게 될 때에 우리는 이 종말의 비유들을 통해 영적으로 깨어 주님의 다시 오심을 예비하며 얼마 남지 않은 남은 우리의 때를 개혁신앙으로 충만하게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