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복음화(47)                                                                                   (2019.12.8)
요한복음 13:3-17 /

이후에는 알리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 가운데서도 고난 주간 목요일 저녁 예수님께서 최후에 만찬을 하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는 사건을 통해서 “이후에 알리라”라고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함(3-5절)
 먼저 본문 3-5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본문 3절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계셨기 때문에요. 당시 유대사회의 관습의 통념을 깨시고요. 선생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요. 겉옷을 벗으시고요. 수건을 가져다가요. 허리에 두르시고요. 대야에 물을 떠다가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요. 두르신 수건으로 물기를 다 닦아주신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주여 주님께서 어떻게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주님께서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고 하니깐요. 본문 7절에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이 세족의 영적인 비밀을 다시 한 번 반복하여 깨우쳐 주시면서요. 예수님께서 “네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시니깐요. 베드로가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하신 거예요.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세족은 제자들의 구원과 연관되어 있음을 영적으로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거예요. 온 몸을 다 목욕한 자는 지옥 가는 원죄가 용서받은 자이지만요. 발을 씻기신 것은 그들의 삶 가운데서 지은 일상생활의 죄(자범죄)를 씻김 받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롯 유다가 있을 것을 미리 아시고요. 이를 예언하신 거예요. 그러니 이 세족이 얼마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우리 구원의 깊은 영적인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이루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지난 주일 마태복음 20:28에서도 말씀하셨지만요. 오늘 마가복음 10:45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증거하신 거예요. 그러면 “왜 주님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통하여 힘들여 반복하여 말씀하시는가?”하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네 권의 복음서는 다 다른 각도로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사역을 조명하고 있어요.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고요. 마가복음은 로마인을 대상으로 섬김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고요. 누가복음은 헬라인을 대상으로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고요. 요한복음은 세계인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어요. 특별히 로마인을 대상으로 한 이 마가복음이 더욱 더 섬김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잘 증거하시는데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요. 자신의 목숨을 수많은 인류의 죄악과 상처와 질병을 대신 지시고요. 모두 다 용서 받고  치유 받고  치료 받는 길을 열어주신 거예요.


그러므로 기독교는 세상의 다른 모든 수도 종교와는 달리요. 인간의 힘으로 우리 자신의 죄악과 상처와 질병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으니깐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십자가에서 모든 영. 혼. 육의 구원을 이루게 하신 계시의 종교인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 친척, 친구, 이웃의 영혼의 죄악의 구원과 상처의 치유와 질병의 치료를 위해서 우리도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가슴 아프고요. 우리가 육신이 힘들고요. 물질로 손해 보고요. 언제까지 인내하면서 이 섬김을 이루어야 하는가 하는 인생과 신앙의 회의가 생길 때도요.


온 천하보다 귀한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과 치유와 양육을 위하여 끝까지 참고 견디며 섬겨야 하는 거예요.
 지난 주간에는 수도권의 중대형교회 목사님들의 모임인 21세기 목회 연구회 수련회에 가서요. 서로의 목회에 대해서 소개했는데요. 저는 우리 치유하는 교회의 치유 목회에 대해 말하면서요. 성경적인 목회이기도 하지만요
풍요 속의 빈곤이 심각한 말세 마지막 때에 이 치유목회가 절실한데요. 우리가 낮아져서 끝까지 인내하면서 섬기며 치유해 나가야지요. 내가 목사다, 장로다, 권사다, 집사다 하고요. 다 된 것처럼 교만하고요. 나의 권위나 내세우고요.
자기 영광을 구하고요.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신앙생활이나 목회를 해서는 결단코 안 된다는 거였어요. 그렇게 교만한 순간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다 끌어내리시고요. 더 이상 안 쓰시고요. 버리시고 마는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가 이 섬김이 가장 약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나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 더 이상의 은혜도 메말라버리고요. 축복도 잃어버리고요. 행복도 사라져버리고 마는 거예요. 그러므로 다른 길이 없어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우리가 낮아지고요. 깨어지고요 죽어지고요. 끝까지 섬기는 길 밖에 없는 거예요.  그리함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시고요.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요. 귀하게 쓰시고요. 부족함이 없는 축복을 부어 주시고요. 넘치는 행복의 감격 속에 크게 영광 돌리게 하시는 거예요.
그 결과 우리의 사랑의 섬김을 통해 얼마나 많은 영혼의 구원 받고요? 치유 받고요? 양육 되는 주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과 행복을 체험하고요. 감격하며요 눈물을 흘리게 되느냐는 거예요?


 그러므로 부족한 종의 지난 42년의 목회 생활에 가장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가운데 갈라디아서 6:9의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는 약속의 말씀처럼 우리가 평생토록 섬김의 삶을 살아갈 때 언젠가 우리를 통해서 이 섬김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과 행복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됨을 이후에는 꼭 알게 되고 체험하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함(15절)
 계속해서 본문 15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요. 다시 앉으셔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과 또는 주님이라고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13:12-13)고 말씀하세요. 여기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라는 말씀을 헬라어 원어 성경에서 보면 “Ὁ Διδάσκαλος (호 디다스칼로스), Ὁ Κύριος (호 퀴리오스)”라고 ‘Ὁ(호)’라는 정관사를 붙이고요. 그것을 대문자로 기록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4000년 동안 예언해 왔던 바로 그 선생님이셨고요. 그 주님이셨다는 것을 강조하신 거예요. 이것은 우리의 불신앙이나 불순종으로 이를 결단코 부인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의 사실이고요.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세주가 그 분이심을 강조하신 거예요. 더 나아가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님과 선생님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3:14)”고 말씀하시면서요. 본문 15절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말하신 거예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발 씻기신 섬김의 본을 따라 제자들도 행할 것을 명령하신 거예요.
우리도 아무리 평생토록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봉사를 해도요. 주위에 본이 되지 않으면서요. 어떠한 감동도 없고요. 열매도 못맺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의 섬김의 신앙생활 가운데 우리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 안에서 본이 되는 삶이 이렇게너무도 중요한 거예요.
예화) 김안나 전도사 이야기


 자식이 우리를 노년에 모셔주면 너무도 감사하지만요. 꼭 그걸 바라서라기보다는요. 그때 제 마음속에 깨달아지는 것은 우리가 자녀들에게 잔소리하고요. 큰소리 치고요. 아무리 매질해도 변화 안 되는 것조차도 우리가 그들의 신앙과 인격과 삶의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갈 때 그들을 진정으로 감동하고 변화시키고 열매를 맺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캐나다의 유명한 사회심리학자인 앨버트 밴두라(Albert Bandura) 박사는 자녀 양육이나 주위 사람의 감동과 변화의 최고의 방법은 모델링(Modeling)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평소에 주위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 살아가면요. 주위 사람들이 그대로 보고 배우면서 닮아가게 된다는 거예요. 그리하여 이 이상의 감동적이고 효과적인 변화의 삶의 방법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4:14-16에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서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강조하신 거예요. 우리가 이제는 가족이나 친척이나 이웃이나 교인이라도 사랑하는 자녀처럼 대하면요. 다 불쌍히 여기게 되고요. 다 용서 할 수 있고요. 사랑으로 섬겨서요. 우리가 누구를 대하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랑으로 본이 되어서요. 감동시키고요. 변화시켜서요. 그들을 복음으로 거듭나게 해서 구원하게 되고요. 치유하게 되고요. 양육하게 된다는 거예요.
예화) 어느 말기암 환자 이야기  
저는 그 “아이 콘텍트” 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요. 자식 앞에서는 그토록 원수 같이 헤어졌던 부부관계도 지난 날의 모든 상처가 눈 녹듯이 녹아지고요. 회복 되어지는 것을 보면서요. 아무리 원수라도 내가 사랑해야 할 영적인 자식이라고 생각하면요. 다 용서하데 되고요. 기쁨으로 섬기게 되고요. 우리가 삶의 본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슴 속 깊이 깨닫게 되었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환경 속에서든지 우리의 신앙과 인격과 삶의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갈 때 이후에는 다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감동을 받고 변화가 일어나고 열매를 맺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함(16-17절) 
 본문 16-17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강조하여 말씀하실 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시고요. 더욱 강조하여 말씀하실 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시고요. 가장 강조하여 말씀하실 때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시지 않겠어요? 이렇게 주님께서 강조하시면서요.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요.  보냄을 받는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고 말씀하시면서요.
우리 중 어느 누구가 주님보다 더 나을 수 있고. 더 잘 할 수 있고요. 더 높아질 수 있느냐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주님께서 이렇게 발을 씻는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으니 이제부터는  우리가 겸손히 낮아지고 깨어지고 죽어져서요. 주님께서 발을 씻으신 이 영적 교훈을 잘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분명히 축복을 약속하신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유대인들처럼 이것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요. 알고 행할 때 복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이처럼 우리는 복을 받기를 바라면서도요. 한 편으로는 그렇게 복을 구하면 이를 “기복신앙이다”, “번영신학이다”고 하면서 비난을 해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정말 배고파 죽게 되고요. 병들어 죽게 되고요. 불행가운데 죽게 되어 보세요. “하나님 아버지, 저 좀 살려 주시옵소서! 저 좀 고쳐 주시옵소서!    저 좀 도와 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께 복을 간구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렇다면 ‘기복 신앙, 번영 신학’과 ‘복음 신앙, 복음 신학’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세요? ‘기복 신앙과 번영 신학’은 자기 자신만 위한 것이고요. 자식들만 잘 되길 바라고요. 복을 누리고도요. 자식들에게 다 물려주고 떠나 버려요. 그래서 주님께서 가장 가슴아파하시는 불행하고 비참한 삶의 종말을 맞이하고 말아요. 그러나 ‘복음 신앙과 복음 신학’은 주님과 고통당하는 사람을 위해서 구하고요. 주님과 고통당하는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고요. 주님과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남기고 떠나는 거예요.
예화) 키다리 아저씨 이야기


 세상의 안 믿는 사람들도 이렇게 추운 겨울이 되면 불쌍한 이웃을 돕는데요.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고 하면서도 연말에 불우한 형제나 이웃이나 선교사님들 돕는 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요.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린다면 이보다 무관심하고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기복적인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나누고 베풀고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고 보람 있고 복된 삶이에요? 우리가 다른 때는 구제를 못해도 연말 성탄의 계절에 외롭고 힘들게 고통당하는 형제와 이웃과 오직 선교사님을 위해 조그마한 물질이나 선물을 함께 나누게 될 때 우리에게 더욱 차고 넘치는 큰 복이 임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3에 증거 하는 거예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가 그 가운데서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증거 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요 듣고요 지켜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거예요
예화) 김동엽 증경 총회장님 이야기
예화) 박강민 목사님의 성령체험 이야기


 그런데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말씀이 마지막에 나오는 “때가 가까움이라” 는 말씀이에요. 주님 다시 오시고요. 우리들 세상 떠날 때가 얼마나 남나 있다고요.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세상 것 붙잡고 그걸 못 놓고 살아요.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세상 떠나면요. 그 많이 모으고  쌓고 자랑하던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예요.
예화) 김수한 추기경의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라는 신앙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은 다른 길이 없어요. 장로교회 창시자 존 캘빈(John Calvin)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성경을 읽으라고 말씀하시면 우리가 읽으면 복되고요. 하나님께서 성경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면 우리가 읽으면 복되고요.  하나님께서 성경을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가 행하면 복되고요.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가 사랑하며 살면 복되고요. 하나님께서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가 감사하며 살면 복되고요.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가 기도하며 살면 복되고요. 하나님께서 헌신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가 헌신하며 살면 복되고요. 하나님께서 봉사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가 봉사하며 살면 복되고요. 하나님께서 헌금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가 십일조헌금 안 떼어 먹고 바치면 복되게 살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구제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가 구제하고 살면 복되고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이 진정으로 복된다는 것을 이후에는 다 알게 되고요. 하나님의 복을 기적적으로 풍성히 체험하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위임목사님의 목회여정 이야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말로 하지만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요? 적어도 우리가 오늘이 마지막 날이듯이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고요.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고요.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삶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후에 알게 될 날이 꼭 다가오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