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복음화(5)                                                                                     (2020.2.9.)
인생의 바벨탑을 허물라(창세기 11:1-9)

 지난 주일에 인류의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의 삼인종의 기원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요. 오늘 본문 가운데서는 인류의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 말씀하세요. 우리는 흔히들 언어의 기원을 알지 못하니깐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까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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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계 어느 종교 경전이나 세상의 어떠한 서적에도 이러한 인류의 언어의 기원을 밝히지 못하는데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만 이러한 언어의 기원의 비밀조차도 명백하게 다 밝히고 있어요.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각 나라마다 다른 언어를 주셨는가 하는 각 나라의 언어들의 기원을 밝히면서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교훈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인위적인 방법의 바벨탑을 허물어야 함(3절)
 인간 창조 이후 원래 온 땅의 언어는 하나였어요. 그런데 흩어져 살던 인간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에서 만나게 된 거예요. 시날(Shinar) 평지는 오늘날의 인류 문명의 발상지였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을 말하는데요. 그 시날 평지에 거주하면서요. 탑을 쌓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왜 그들이 이 시날 평지에서 탑을 쌓기 시작했느냐는 거예요. 시날 평지는 바그다드에서 갈대아 우르까지 펼쳐져 있는데요. 평지는 자동차로 5시간을 달릴 정도로 바둑판처럼 평평하게 끝없이 펼쳐지는 지형이었기 때문이에요. 산은 고사하고 언덕조차도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잘 닦여진 땅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곳을 선택하고요. 자신들의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탑을 쌓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탑을 쌓다 보니까 돌이 많지 않은 사막에서 물자가 부족하니까요. 정품인 돌 대신 벽돌로 하고요. 벽돌 사이를 붙이는 접착제인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에서 홍수로 쓸려 내려온 진흙대신 역청으로 대신한 거예요. 그리하여 견고한 탑을 쌓은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편의주의에 의한 땜질식 탑을 쌓았던 거예요. 이는 한마디로 인간들의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한 바벨탑을 쌓았던 거예요.


 말세 마지막 때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요. 다 자신들의 이해관계, 감정, 인간관계뿐만 아니라요. 자신들의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편리한대로  인위적인 방법으로 인생의 바벨탑을 쌓을 때가 얼마나 많으냐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먼저 허물어 뜨려야 할 바벨탑은 인간의 수단과 방법에 의한 인위적인 신앙생활 이예요. 우리의 목적이 순수하면 방법도 순수해지는 거예요. 그러나 목적이 불순하면 방법도 불순해지고 마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들의 목적이 무엇이었어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요? 더 가까이 나아가고요? 더 영광 돌리기 위함이었어요? 결코 아니에요! 그들은 자신들이 높아지기 원했고요.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였고요. 자신들이 흩어짐을 면하기 위함이었던 거예요. 그렇게 목적이 불순하니깐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요.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요.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면서 탑을 쌓았던 거예요.


 그렇다면 그들의 인위적인 방법으로 바벨탑을 쌓았을 때 그 탑이 견고해서요. 아무도 허물 수 없을 줄 알았겠지만요. 그러나 인위적인 방법은 하나님 앞에서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아요. 왜냐하면 목적이 순수하지 못하니깐요.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고요.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에요.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인위적인 방법으로 평생을 바벨탑을 쌓아도요. 한 순간에 다 무너지고 마는 거예요.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모든 노력을 쏟으면서요. 인생을 다 허비하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인위적인 방법으로 일생을 아무리 다 살아봐도 남는 건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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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수고해도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으면요. 우리가 평생토록 물질과 건강과 행복을 쌓아도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무시는 순간 우리의 모든 생명도, 수고도 다 헛되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최고의 지혜서인 잠언 16:3, 9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분명히 강조하시지 않아요? 그러므로 다른 길이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어떻게 깨우쳐 주시고요. 성령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를 주목하면서요.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대로만 살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리할 때 우리의 일생이 인위적인 방법으로 알아온 인생의 바벨탑을 다 무너뜨리고요. 인위적인 방법으로 그토록 힘들여 애쓰고 수고하지 않아도요.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보람되고 축복되고 행복하게 인생을 살아가게 될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육신적인 교만의 바벨탑도 허물어야 함(4절 상반절)
 사실 인간이 아무리 탑을 잘 쌓아도요. 인간의 눈에 보이는 첫째 하늘인 성층권에 이르지 못하고요. 둘째 하늘인 우주권에는 더 더욱 이르지 못하고요. 셋째 하늘인 영계권에는 결단코 이를 수 없는데요. 인간의 그 짧은 지식과 경험과 능력을 가지고요. 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겠다는 오만방자한 생각을 하고요. 큰 소리를 치면서요. 바벨 탑을 쌓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두 번째로 허물어야 할 바벨탑은 바로 우리의 육신적인 교만의 탑인 거예요. 교만은 사탄을 타락하게 한 결정적인 동기였고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던 또 하나의 동기였고요. 오늘 본문의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게 된 동기도 우리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서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고 그들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교만 때문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말세 교인들이 타락하는 결정적인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는 거예요. 말세의 마지막 때 많은 교인들이 사탄의 속삭임에 속아서요. 자기가 좀 좋은 집안에 태어나고요. 인물 좀 뛰어나고요. 지식 좀 많이 쌓고요. 높은 지위에 오르고요. 재력이 좀 있고요. 심지어 영적인 체험도 좀 하고요. 신앙의 직분도 좀 높아지면요. 자신도 모르게 교만의 시험에 빠지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 잊어버리고요.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다 알고요. 하나님과 같이 다 옳고요. 하나님과 같이 다 할 수 있을 줄로 교만의 착각에 빠지고 마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사탄의 시험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다 메마르고요. 축복을 다 잃어버리고요. 행복도 다 사라져 버리고요. 주위 사람들마저도 다 그를 외면하고요. 결국 인생이 다 황폐해지고 무너지고 마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뒤늦게 깨달은 들 이미 때는 늦은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전서 5:5-6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강조하신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은혜가 안 되고요. 축복이 사라지고요. 행복이 느껴지지 않으면요. 그때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 거예요. “주님, 왜 이렇게 신앙생활에 은혜가 안 됩니까? 축복이 사라집니까? 행복하지 못합니까?”하고 엎드려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요. 성령님께서 틀림없이 깨우쳐 주시는 음성이 들려올 거예요. “네가 너무 커버렸다. 너무 교만해져서 강팍하고 완악해져 버렸다. 네가 뭔데 주님의 말씀 앞에서 은혜가 안 된다고 그러느냐? 네가 뭔데 입만 열면 그렇게 불평과 불만이 많으냐? 네가 뭔데 그렇게 못마땅하고 못견디는 신앙생활을 하느냐?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같으니라고! 네 자신부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라! 그래야 네가 진정으로 은혜 받고, 축복 누리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회복할 것이다!”라는 성령님의 깨우침을 받게 될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성령님의 깨우치시는 음성을 하나도 못 듣는 사람들은 완전히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들로서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사람들인 거예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인 거예요. 왜냐하면 세상의 낙도 누리지 못하고요. 신앙의 행복도 못 느끼니 양쪽 세상을 다 잃어버린 가장 불쌍하고 불쌍한 인생 아니에요? 그러므로 다른 길이 없어요. 우리는 욥기 25:6의 고백과 같이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라는 고백과 같이 우리 자신의 존재를 겸손히 받아드리고요. 누가복음 18:13의 세리와 같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겸손한 신앙의 고백이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끊이지 않아야 해요. 그리할 때 우리는 육신적인 교만을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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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우리도 날마다 순간마다 육신적인 교만을 철저히 깨뜨리고요. 평생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말도 없이 겸손히 낮아져 섬기면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고요. 모두에게 칭찬을 들으면서요. 우리가 떠난 후에도 영원히 잊지 못할 감동적이고 복된 생애를 모두 다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힘의 과시의 바벨탑도 허물어져야 함(4절 하반절)
 당시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흩어지지 않고 그들이 힘을 쓰고요. 그들의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길 원했던 거예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요. 의사소통을 막아 버리신 거예요. 그래서 지금 현재 세계 언어 수가 약 6,000 개에 이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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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벽돌을 달라고 하면 역청을 가져다주고요. 역청을 달라고 하면 모래를 가져다주고요. 모래를 가져다 달라고 하면 물을 가져다 주니깐요. 결국 그들의 언어가 통하지 않자 바벨탑을 쌓으려는 그들의 뜻이 좌절되고 만 거예요. 여기서 ‘혼잡, 혼란’이란 뜻의 ‘바벨’이란 이름이 붙여지고요. 지금도 시날 평지에 가면 ‘지구라트(Ziggurat)’라고 하는 가로(앞면) 60m, 세로(옆면) 45m, 높이 21m 까지만의 유적이 남아 있다고 해요. 우리도 말세 마지막 때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마지막으로 경계해야 할 바벨탑은 우리의 힘의 과시인 거예요. 우리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우리의 힘을 과시할려고 해서는 안돼요. 운동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 몸에 힘이 들어가면 그 유연성과 융통성과 탄력성 즉 생명력을 다 잃어버리고 마는 거예요. 대신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일생을 통해 기대하시는 일이 무엇이고요? 무엇이 주님의 몸된 교회에 유익하고요? 우리 삶을 통해 어떻게 현실을 복음의 통로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인가에 주목해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하고요. 무엇이 우리의 감정을 다 풀 수 있고요. 무엇이 우리의 뜻을 관철할 수 있을 것인가에만 집중해요. 그리고 이를 위해서 뜻을 나누고요. 힘을 합하고요. 세를 과시해요. 그래서 말세 마지막 교회마다 가서 보면 무슨 파가 그렇게 많은지 목사파, 장로파, 권사파, 집사파로 나뉘어져서 그렇게들 싸워요. 그래서 제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이 뭐라고요? ‘파’네요 ‘파!’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진절머리 나게 파를 보았는데요. 그 냄새나는 파를 왜 먹어야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교회가 정작 감당해야 할 전도와 치유와 양육과 봉사와 설교적인 사명은 감당하지 않고 싸우다 보니깐요. 말세 교회들마다 큰 시험에 빠져 무너져 가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말세 마지막 때 주님 앞에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인 거예요. 그렇게 해서 목적하는 뜻을 이룰지 모르지만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러한 사람들에게 더 이상 은혜도 베풀지 않으시고요. 축복도 내려주시지 않으시고요. 더 이상 귀하게 쓰시지도 않으세요. 이것이 바로 사탄에게 속아 자기 힘을 과시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신앙의 한계요, 불행한 종말인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어요. 성경을 가까이 하고 열심히 읽고요. 읽지 못하면 열심히 나아와 듣기라도 해야 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 주일에 한번밖에 말씀을 못 듣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달을 수 있겠어요? 더욱이 기도도 안 해요. 새벽기도에 한 번도 안 나와요. 더 더욱 놀라운 것은 성경공부도 안 하고요. 그러니 영적으로 더 이상 성장이나 성숙을 못하고요. 헌신도 안 하고요. 심지어 가정예배도 안 드려요. 평생을 장로, 권사, 집사를 해도 성도의 마땅한 본분인 헌신이나 십일조 헌금까지 다 도둑질하며 사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으로 자기 뜻만 내세우고요. 자기주장만 앞세우고요. 자기들의 힘만 과시할려고 해요.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절대 해악만 끼치고요. 걸림돌만 되고요. 암적 존재로 살아가다가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아요. 그러니 얼마나 불행하고 불쌍한 인생이냐는 거예요?


 그래서 주의 종들은 너무도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러한 삶들을 깨우치고요. 그들의 진정으로 은혜롭고요. 축복되고요.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하기 위해서는 혼신의 힘을 쏟아 가르치고요.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요. 끝까지 강단에서 외치다가 떠나가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요. 우리의 힘을 과시하고요.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데 힘을 쏟지 않고요. 가장 먼저 성령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가 깨닫고요. 성령님의 증인이 되고요. 성령님의 복음 전도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힘을 합해야 해요. 그래서 에베소서 4:1-3에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그토록 강조하셨던 거예요. 그리하여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 합심해서 기도하고 있을 때 약 3,000년이 지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16개 나라의 사람들이 모였지만요. 사도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아서요. 각 나라 말로 전파함으로 주님 안에서 소통이 되고요.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힘 있게 전해진 거예요. 성령님의 은혜를 뜨겁게 체험함으로 복음의 증인이 된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성령님의 은혜를 뜨겁게 체험하지 못하고 주님의 선교적 사명과 비전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 주위에 어려운 형제나 이웃도 많은데 왜 해외선교에만 힘을 쏟느냐고 불평을 털어놓을 때가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그렇다고 우리 주위에 어려운 형제들을 돕지 않는 것은 아니고요. 국내 전도에 힘쓰지 않는 것도 결단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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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요. 우리의 모든 있는 모든 힘을 결단코 힘을 과시하는 데 쓰지 않고요. 하나님의 복음 선교를 위해서 드려지고요.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쓰여질 때에 자손대대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고요. 크게 주님께 영광 돌리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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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리도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가 인생의 바벨탑을 쌓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심각하게 돌이켜보아야 해요. 그리고 과감하게 믿음으로 결단하면서 인위적인 방법의 바벨탑부터 허물고요. 육신적인 교만의 바벨탑도 허물고요. 힘의 과시의 바벨탑도 허물게 될 때 비로소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과 영통하게 되고요.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고요.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는 삶을 새롭게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