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복음화(7) 2020.2.23


우리는 한 친족이라(창 13:1-13)


      주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말세의 마지막 때가 되면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사탄이 주님의 재림에 밀려서요. 이 땅위에서 극렬하게 역사해서요. 한 가지 중요한 말세의 증상이 나타나는데요.  종말장인 마태복음 24:12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증거 하시듯이요. 이 땅의 사랑이 다 식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가정에서도, 이웃에서도, 직장에서도, 심지어 사랑이 넘쳐야 할 교회에서까지도 이 사랑을 찾아보기가 너무도 어려운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래서 오죽하면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도 그의 단편소설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람은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나 향락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요. “사랑으로 산다”고 강조하였겠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가운데 나오는 큰 아버지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한 친족 인데도요. 불화와 분쟁을 가져오고 갈라서는 불행을 겪게 되는데요. 그들이 외롭고 힘든 끝없는 광야의 유랑생활 가운데에도 단 하나뿐인 친족인데도 왜 이러한 불화와 불행을 겪어야 했는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 안에서 한 영적인 친족임을 확인하면서요. 일생토록 은혜롭고 축복되고 행복하게 사랑의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지 이번 주 수요일부터 40일 동안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맞이하면서요.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모든 일에 감사를 잊어선 안됨(5-6절)
 본문 2절에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고 말씀하셨고요. 5절에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라는 것이 축복과 감사의 조건이지 결코 불행과 불화의 조건이 아니었던 거예요. 더구나 그들의 소유가 너무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다는 것은 더욱 더 감사할 일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그들의 마음속에서 감사가 사라지는 순간 한 친족이면서도 갈등과 불화가 싹트기 시작한 거예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복의 열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감사예요. 그런데 반대로 말세 마지막 때 사탄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극렬하게 빼앗아 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도 바로 이 감사예요. 그래서 매사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변해버려요. 그리고 입만 열면 불평하고 원망하는 거예요. 더욱이 온갖 거짓으로 비방하고 험담까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이나 이웃이나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온갖 불화와 분쟁을 일으키면서요. 주위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려요. 여러분, 이렇게 살려면 뭐하려고 예수님을 믿어요? 차라리 세상에서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마시고 싶은 것 다 마시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즐기고 싶은 것 다 즐기다가 떠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지요.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18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명령하세요. 여기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모든 환경 속에서 감사하라(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는 뜻인 거예요. 다시 말하면 행복한 때도, 불행할 때도 감사하고요. 건강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감사하고요. 부요할 때도, 가난할 때도 감사하고요. 형통할 때도, 실패할 때도 감사하고요. 마음에 들 때도, 마음에 안들 때도 감사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한 친족이었던 아브라함과 롯의 가정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었어요? 그들은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양과 소와 장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근본적으로 감사하지 못했던 거예요. 여러분, 그들이 이 많은 재산으로 인해서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한 것이 어떻게 불행의 조건이 되고요? 불화의 조건이 되고요? 분쟁의 조건이 되느냐는 거예요? 오히려 감사의 조건이 되고요. 행복의 조건이 되고요. 축복의 조건이 되어야 하지 않아요? 우리가 근본적으로 성령님으로 충만하지 못하고요. 육신에 사로잡히고요. 감정이 앞서고요. 혈기가 터져 나오다 보면요. 여지없이 수많은 감사의 조건조차도 감사하지 못하고요. 수많은 축복의 조건조차도 만족하지 못하고요. 수많은 행복의 조건조차도 불행하게 되어서요. 입만 열면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고요. 상처를 주고받으면서요. 시험에 빠져서요. 결국, 신앙을 떠나가 버리고요. 가정도 떠나가 버리고요. 심지어 교회도 떠나가 버려요. 다 하나님의 복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에요.


 이처럼 우리가 건강할 때는 감사하지 못하다가요. 건강을 잃고 나서 후회하고요. 순탄할 때는 감사하지 못하다가요. 사고가 터진 다음에 후회하고요. 주의 일을 할 수 있을 때는 감사하지 못하다가요. 주의 일을 할 수 없을 때 후회하고요. 살아 있을 때 감사하지 못하다가요. 죽고 나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아요? 그래서 우리는 절대 불평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면 새로운 은혜를 받고요. 넘치는 축복을 누리고요. 영원한 행복도 누리게 되는 거예요.

예화) ‘황금의 입(The Golden Mouth)’이란 별명을 가진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의 이야기


 그래서 유대인들은 매일 100가지 이상 감사할 거리를 찾는다고 해요. 감사하다가 보니까 불평, 불만이 다 사라지고요.
행복해질 수밖에 없고요. 그러다 보니까 건강하고 장수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감사가 최고의 항암제라고 하지 않아요?

예화) 팔이 부러진 딸을 위해 감사기도하는 할머니 이야기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감사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골로새서 3:15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세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삶 가운데 차고 넘치게 하기 위해서는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요. 어떻게 감사하는 자가 되느냐는 거예요. 골로새서 3:16-17에 계속해서 증거하고 있어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풍성히 거해야 우리가 감사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하며 듣고요, 읽고요, 배우고요, 묵상하고요. 암송하면서요. 삶 가운데 실천해야 하는 거예요. 그리할 때 나도 모르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편의 찬양이나 예배의 찬송가나 신령한 복음성가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하고요.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게 되는 거예요.

간증) 지난 수요일 새벽 하늘나라로 떠나가신 이충자 은퇴권사님 이야기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남은 여생이라도 지난날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하지 못함으로 육신적인 불평과 원망을 일삼고요. 온갖 거짓으로 비방과 험담을 하면서요.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요. 시험에 빠뜨려서요. 연자 맷돌을 메게 하는 사람들은 결단코 영적인 성도가 아닌 육적인 교인이므로 그러한 교인들을 절대 가까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지난날 불평하고 원망하고 험담하고 비방하며 살아왔다면요. 지금까지 사탄의 도구로 이용당해 왔음을 철저히 통회 자복하고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의 평강을 회복하고요. 주님께 찬양하고요. 감사를 회복하게 될 때 우리가 모두 다 주님 안에서 한 친족임을 기억하면서 더욱 더 화평하고 행복하며 축복되게 살아가게 될 줄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사랑으로 양보할 수 있어야 함(8-9절)
 아브라함과 롯은 한 친족이므로 둘 사이에 다툴 일도 없었고요.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툴 일도 없었어요. 여기 ‘한 친족’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םחיא יםשיאנ(아나쉼 아힘)’이라고 해서 직역하면 ‘형제들의 사람들’인데요. 의역하면 ‘한 형제’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한 형제의 목자들 사이에 서로 가축들에게 좋은 풀을 먹이는 목초지를 찾고요. 가축들에게 물을 주기 위해 우물을 먼저 차지하겠다고 이렇게 다투고 싸우니깐요. 큰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우리 앞에 넓은 땅이 펼쳐져 있는데 이 좁은 땅에서 우리가 싸울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요. 차라리 이렇게 다툴 바에는 서로 헤어져 떠나가는 것이 낫겠다고 권하면서요.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고 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나라와 같이 이스라엘도 엄격한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문화였고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연세가 많은 이와 적은 이 사이에 순서가 있는데요. 큰 아버지인 아브라함과 막내 동생 하란의 아들인 롯 사이에 누가 먼저 선택권이 있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우선 선택권을 양보했으면요. 조카 롯이 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그래도 큰 아버지께서 먼저 결정하셔야 하지 않느냐?”고 양보해야 하는데요. 육신적인 롯이 결코 그렇게 큰 아버지에게 양보를 하지 않아요. 그러나 이렇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용서하고 수용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바로 영적 성숙함이 있었던 거예요.


 말세 마지막 때에도 보면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한 교인들일수록 그 좁은 신앙으로 자기 이해관계에 걸리고요. 자기 자존심을 앞세우고요. 감정을 터트리면서요. 자기 의를 내세우고요. 큰 소리 치면서요. 자기 주장을 끝까지 관철시키려는 공통점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어린 아이와 같이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하고요. 육적이고요 미성숙하다 보니깐요. 절대 양보할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나 이것이 복음에 관한 것이 아니고요. 인간의 생사가 걸린 문제가 아니고요. 이단과 정통이 걸린 교리의 문제가 아니면요. 꼭 성령님이 충만하고요. 영적으로 성숙하고요. 마음이 넓은 사람들이 양보하고요. 포용하고요. 인내하면서요. 사랑으로 섬기며 나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족한 종도 짧은 인생을 살아보고요. 42년 목회를 해오면서 보면요. 놀라운 사실은 세월이 지난 후에 보면 그렇게 사랑으로 먼저 양보한 사람들이 결국 놀라운 은혜를 받고요. 축복을 누리고요. 행복하게 쓰임 받는 것을 봐요. 그러나 그 얕은 신앙으로 절대 양보하지 않으면서요. 자기 고집을 세우고요. 자신의 이익을 채우고요. 감정대로 하고요. 어떻게 작당을 해서라도요. 목표한 것을 이루는 것 같지만요.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절대 손을 들어 주시지 않고요. 축복을 내려주시지 않고요. 귀하게 쓰시지 않으시니깐요. 결국에는 나중에는 다 안 되고요, 망하고요, 지리멸렬한 인생으로 끝나 버리더라고요.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도요. 이 길이 자신들이나 교회에 진정으로 은혜롭고요. 축복되고요. 행복하게 쓰임 받는 길인데도요. 교인들이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고요. 끝까지 반대하고요. 따라오지 않으면요. 정말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들이 깨닫고 돌아올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자신의 생각과 달라도 믿음으로 양보하고요. 사랑의 권면에 순종하는 분들이 결국 주님의 은혜와 축복과 행복을 다 누리게 돼요.

간증) 제 18기 치유동산 섬김이의 간증과 함께 한 미래로 교회 참가 간증


 우리가 자신의 고집을 꺾고요. 겉사람이 깨어지고요. 양보하고 순종하며 나아가면요. 그것이 얼마나 은혜를 받고 축복을 누리며 행복한 신앙생활의 지름길이 되는지 몰라요? 그래서 빌립보서 2:3-5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증거하신 거예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요.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면서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해야 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말세 마지막 때 우리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다 주님 안에서 한 친족임을 기억하면서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요. 나보다 다른 사람이 낫다고 여기고요. 사랑으로 먼저 양보를 하게 되면요.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의 기쁨이 충만해질 뿐만 아니라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다 기억해 주시고요.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이 땅의 기름진 복으로 천 배나 만 배나 다 보상해 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함(12절)
 조카 롯에게 먼저 우선 선택권이 주어지자 롯이 엎드려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는 기록이 없어요. 육신의 눈을 들어 이주해 갈 좋은 땅만 찾아본 거예요. 그래서 요단 지역을 바라보니깐요. 사해 동남쪽 소돔과 고모라로부터 사해 남쪽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고요. 여호와의 동산 같고요. 애굽 땅과 같이 풍요로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롯은 영적 분별력이 없었기 때문에 머지않아 멸망할 그 소돔과 고모라의 장래를 결코 깨닫지 못하고요. 소돔으로 떠나갔는데요. 그러나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늘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가고 기도하며 살았던 큰 아버지 아브라함은 창세기 12:7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와 같이 굳이 인간적인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을 확실히 믿는 믿음과 영적 분별력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조카 롯에게 사랑으로 양보했을 뿐만 아니라요.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그대로 머물렀던 거예요.


 이렇게 한 피를 나눈 한 친족임에도 불구하고 영적 분별력에 이렇게 큰 차이가 있을 수 없었어요. 그 결과 그 다음에 펼쳐진 일을 우리는 본문 다음 14-15절에서 확인할 수가 있어요.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여기서 보면 본문 11절에 조카 롯은 동쪽으로 옮겨서 사해 동편 소돔 땅으로 가서 망하고 말지만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영적 분별력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북쪽과 남쪽 그리고 롯이 옮겨간 동쪽과 서쪽까지 온 땅을 차지하라고 약속하신 거예요.


 우리도 주님 안에서 한 교회를 섬겨도요. 다 자라난 삶의 배경이 다르고요. 성격이 다르고요. 라이프스타일도 다르고요. 영적인 체험도 다르고요. 신앙의 칼라도 다 달라서요. 영적 분별력도 다 달라요. 그래서 우리가 때로는 영적인 분별을 잘못해서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도, 축복도, 행복도 다 잃어버리고 말 때가 얼마나 많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의 종들을 세우셔서요. 안팎에서 사탄의 역사가 극렬한 말세 마지막 때에 이를 영적으로 잘 분별해서요. 우리 양떼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행복을 잃어버리는 신앙생활을 결단코 하지 않도록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권면하고요. 위로하고요. 강권하면서요. 여러분의 삶을 인도해주시는 거예요.

예화) 중국으로 온 나라에 급속히 확산되는 코로나 바이러스 와 대구 신천지 이단 집단의 코로나 감염에 대한 영적 깨달음


 그러므로 말세 마지막 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성령님의 역사와 사탄의 역사를 잘 분별하는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데요.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자주 인용하지만요. 이 하나님의 뜻을 영적으로 잘 분별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어요. 로마서 12:1-2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대로 실천해야 해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드려지는 믿음의 헌신을 하고요. 더 이상 이제는 이 세상 유행 풍조를 결단코 따라가서는 안되고요. 오히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새롭게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그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친족임을 기억하면서요.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사탄의 역사를 담대히 물리치고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영적으로 분별하게 될 뿐만 아니라요. 하나님의 복을 풍성히 누리고요. 일생토록 귀하게 쓰임 받고요. 주님께 크게 영광 돌리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간증) 위임목사님의 강남교회 치유성회 간증과 고(故) 김성규 목사님 간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 것 같습니까? 하루살이 인생들인 우리는 내일 일뿐만 아니라 잠시 잠깐후의 일도 알지 못해요. 그런데 살면 얼마나 산다고 주님 안에서 한 친족인 우리가 정작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요. 우리 일생토록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할 주님께서 명령하신 지상 명령인 전도와 치유와 양육과 땅 끝까지 이르러 세계 선교의 사명은 하나도 감당을 안 하고요. 사탄에게 속아서 자신들의 자존심이나 살리고 명예나 높이고 이익이나 챙기고 큰 소리나 치면서 껍데기를 붙잡고요. 그렇게 불화하고 분쟁하여 육적인 소모전만 하며 살다가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나 이제 남은 여생이라도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한 친족임을 기억하면서요. 모든 일에 감사하고 먼저 사랑으로 양보하고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나아갈 때 어떠한 사탄의 역사도 물리치고요. 마지막 때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면서요. 자손 대대로 믿음의 복을 누리며 귀하게 쓰임 받으며 주님께 크게 영광 돌리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