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복음화(34)-영적으로 승리하라출애굽기 17:8-16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불화와 분쟁 가운데 살아가고 있어요. 조국의 해방 이후에는 남북간의 대립이 계속 되어왔고요. 6.25전쟁 후에는 지역간의 차별도 있었고요. 빈부간의 격차도 있었고, 세대간의 갈등도 있었고, 성별간의 대립도 있었고요. 그런데 지금은 이념간의 분쟁이 극도로 심화된 상태예요. 그러나 겉으로는 남북간, 지역간, 빈부간, 세대간, 성별간, 이념간의 문제인 것 같지만요. 실제로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는 영적 싸움인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에 있어서도 계속되어 왔지만요. 특별히 오늘 본문 가운데 나오는 아말렉과의 전쟁을 통해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육적인 세력을 잘 분별해야 함
   먼저 본문 8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나갈 때 지난번 홍해 앞에서는 죽게 되었다고 절망하며 모세를 원망하였고요(출14:11-12). 그들이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하고도요. 사흘길 후 마라에서는 목이 마른데 물이 쓰다고 무얼 마시느냐고 불평하며 모세를 원망해서요(출15:24).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게 생겼다고 또 다시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해서요(출16:3).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아침에는 그들에게 먹을 양식인 만나를 내려주셨어요. 그리고 저녁에는 메추라기까지 내려 주셨어요. 그런데도 르비딤에 이르러서는 목이 마르다고 물을 찾으면서 또 모세에게 원망하며 달려드는 것을 보세요(출17:2-3). 이처럼 광야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은 끊임없이 모세와 아론을 괴롭힌 내부의 적이었다면요. 출애굽에 이어서 아말렉의 등장은 또 다른 외부의 적이었어요. 아말렉은 출애굽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첫 번째로 공격해온 대적이었던 거예요. 원래 아말렉은 이삭의 큰아들이었지만 육의 아들인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와 첩 딤나와의 사이에 난 아들로서요(창36:12). 아말렉은 ‘전쟁을 좋아하는 골짜기 거주자’란 뜻으로서 시내 광야지역을 떠돌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해서 괴롭혔던 아주 거칠고 공격적인 유목민들이었는데요. 그들이 명백히 육적인 자손이요 육적인 세력이었음을 밝혀 주신 거예요. 우리도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요.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 등 내부뿐만 아니라요. 외부의 직장이나 사회 속에서도 끊임없이 육의 공격을 당하게 되요. 더욱이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다들 얼마나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요?
<예화: 코로나-19관련 유머 ‘아이구야?’>


   그런데 다들 어려움 속에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예배를 드리며 믿음을 지키려고 하는데요. 교회의 생명인 예배를 못 드리도록 계속해서 공격해 오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스크를 안 씁니까? 방역수칙을 안 지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의 85,000개에 이르는 교회 가운데서 30여개 교회가 감염이 되었다고 해서요. 더구나 신천지 이단이나 갖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교회에서 확진자가 양산되었다고 해서요. 코로나19를 종식시켜야 할 모든 교회의 문을 닫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거예요?
<예화: 대한의사협회 최대집 회장의 파업 선언>


   그런데도 놀라우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했다는 목사나 장로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교회 문을 닫은 것 좀 보십시오. 하나의 이익집단보다 못한 말세 마지막 때의 생명력 없는 무기력한 교회의 모습인 거예요.
<예화: ‘현직 의사의 직격탄’ 동영상의 내용>


   그래도 말세 마지막 때 이러한 안팎의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예배의 신앙을 지킨 영적으로 살아있는 교회가 정부의 파악에 의하면 서울, 부산, 인천, 경기, 충남 만해서요. 우리 치유하는 교회를 비롯해서 1,837개 교회에 이르렀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예요?
<예화: 2단계 방역조치로 인한 20명 예배>


   사실 그날 못 들어오시고 돌아가신 분들도 많았는데요. 많은 성도님들로부터 “함께 예배에 동참하지 못해 죄송해요!”, “힘내세요!”, “기도하고 있어요!” 등의 격려 메시지를 받으면서 얼마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저도 지난주일 설교를 하면서 그 어느 때 보다도 감격스러운 눈물이 많이 났지만요. 그날 함께 예배드린 모든 성도님들도 환난과 핍박 속에서 드리는 예배가 더욱 감격스럽고요. 큰 은혜가 되어서요. 그렇게 감격의 눈물이 났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휴대폰이나 TV로 온라인 예배를 보는데요. 그것은 그야말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말하면 내 편의대로 예배를 보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무슨 은혜가 있고, 축복이 있고, 행복이 있겠어요?
<예화: 정부의 2.5단계 방역조치로 실내 10명이상 집회 금지>  


   진정한 예배는 적어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나와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솔직히 부족한 종은 43년 전 주의 종으로 소명을 받고 나서 갈라디아서 1:10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목회해 왔어요. 우리는 많은 때 무슨 일을 결정할 때 얼마나 나에게 유익한가? 얼마나 우리 편이 많은가? 얼마나 세상 사람들이 좋아할까를 우선시 하면서 살아가요.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는 당연히 육적인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낳고 마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결정하기 전에는 항상 가장 먼저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인가? 교회의 양떼들에게 유익한 것인가? 하나님의 복음의 통로로 쓰임 받을 수 있는가에 주목해야 해요. 제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목회를 했다면요. 치유하는 교회에 처음 와서 10년 동안 싸울 이유가 없었어요. 삯군 목사라면 그저 교인들 눈치보고요. 그들의 귀를 간지럽게 하고 입맛에 맞는 말씀만 전해야지요. 그래야 교회도 평안하고 저도 쫓겨나지 않을 것 아니에요? 그렇게 하면 교회는 평안하겠지만, 영적으로 다 죽어버리고, 사탄의 밥이 되고 말아요. 그러나 저는 끝까지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편에 섰기 때문에 처음 10년 동안 그 격렬한 영적 싸움도 이겨낼 수 있었던 거예요. 앞으로도 교회 내부의 적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우습게 여기고, 교회를 박해한다고 해도 순교적 각오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고, 성전을 지키고, 예배를 지켜나가야 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드림을 막을 권한은 그 어떤 인간에게도 없는 거예요. 분명한 건, 이 모든 것은 영적인 싸움이예요. 안팎의 육적인 세력과의 영적 싸움인 거예요. 그래서 그 결말에 대해 로마서 8:5-6에 분명히 증거하지 있어요. 우리가 육적인 길을 따르면 한 때는 힘을 쓸지 몰라도, 결국에는 고통과 사망으로 끝이 나고 말아요. 그러나 우리가 육적인 세력을 잘 분별하고, 영적인 주님의 뜻을 따르면, 한때는 아무리 핍박당하고 환난 가운데 있어도 결국에는 생명과 평안의 삶을 살게 되고, 영적으로 기필코 승리하게 될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영적인 무기를 잘 사용해야 함
   계속해서 본문 12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싸울 병사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도록 해요. 그러나 모세는 전쟁의 승패가 이스라엘 병사의 수나 무기나 전술에 있지 않음을 알고,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의 남편이었던 훌과 함께 산꼭대기에 올라가요. 그런데 히브리어로 일반적인 산을 지칭할 때 ‘하르’인데요. 여기서는 ‘기브아’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 당시 신전이나 산당을 세웠던 언덕과 같이 낮은 산을 말하는데요. 당시 르비딤의 북단에 해발 220m 높이의 ‘와디 페이란’이라는 산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모세가 그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요. 팔이 피곤해서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기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를 앉게 하고요.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서요. 해가 지도록 팔이 내려오지 않게 하니깐요. 결국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물리쳐 승리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세가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올라갔다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 손을 든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도할 때 취하는 자세였던 거예요. 다시 말하면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붙잡고 기도로 매어달릴 때 이스라엘 병사들이 기적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거예요.


우리도 영적 싸움의 승리의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아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이나 함께 하는 사람의 숫자나 힘 있는 사람들의 배경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진정한 승리를 위해서 우리가 사용해야 할 영적 공격용 무기에 대해서 에베소서 6:17-18에 증거하고 계세요.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인데요. 모든 영적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우리는 이것이 성경에 근거한 것인가를 먼저 확인해야 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하고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면 안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이성이나 지식이나 경험에 의해서 판단하고 결정하기 때문에요. 다 자기 뜻대로 살다가 결국 패배하고 망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 살면 돼요. 흔히들 비대면(On-line) 예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 성구로 요한복음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는 말씀을 많이 인용하는데요. 우리는 이 말씀의 배경을 바로 알아야 해요. 당시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복음증거를 회피하려고 “북 이스라엘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려 왔는데 당신들, 남 유다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데 어느 곳이 옳으냐”고 예수님께 질문을 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심 성전(평양 봉수교회)이냐, 예루살렘 성전(서울 치유하는교회)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성령)과 진리(성경) 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시면서요. 어느 성전에서든지 중심을 다해서 예배를 드리라고 강조하셨던 것이지 아무데서나 예배드리라는 것을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 또한 로마서 12:1의 말씀은 어디서나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성전에 나와서 은혜 받고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라는 말씀인데요. 자기 맘대로 성경을 해석해서 어디서나 예배를 드려도 된다고 성경을 왜곡하는 거예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게 되면,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예배드리면 된다는 자기 편의의 인본주의 신앙이 결국 말세에 우리로 하여금 무교회주의로 빠지게 하는 사탄의 교묘한 계략이라는 것을 우리는 영적으로 잘 분별하고 물리쳐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대해서 구약성경에서 보면 아브라함에게도(창 22:2), 모세와 아론에게도(출 5:1, 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신명기에서만 해도 19번이나 강조하시고요.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예배드리기 위해서 항상 “택하신 곳”을 강조하셨어요. 그래서 출애굽 후에는 성막에서, 왕정시대에는 성전에서, 포로시대에는 회당에서, 신약시대에는 교회에 이르기까지 늘 ‘성전예배’를 강조하셨던 거예요. 더 나아가 모든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의 제4계명까지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셨던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제 어디서나 예배드릴 수 있겠지만요. 몸소 꼭 성전이나 회당을 찾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이신 거예요. 그리고 결론적으로 히브리서 10:25에서 쐐기를 박아버리신 거예요. 이처럼 우리는 최근의 코로나19의 임박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생명과 같고 신앙생활의 젖줄인 예배를 드리라고 명령하시면 우리는 그대로 순종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는 여기에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벌금형 받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교회 폐쇄령을 내리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등 인간적인 조건을 붙여요. 우리가 언제부터 세상 사람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어요? 우리가 믿는 분은 주님이시고, 세상의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최우선시 해야 하는 거예요.
<예화: 노아의 홍수 심판>


   우리도 이제는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성경해석이나 하찮은 자신의 생각, 이론, 주장을 더 이상 내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코로나19의 어떠한 위험 속에서도 얼마든지 우리는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면서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명령을 따라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수 있는 길들이 분명히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영적 무기가 그 다음에 에베소서 6:18에 바로 나와요. 지금까지 우리는 공격용 무기가 하나님의 말씀 뿐인줄 알았지만요.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그 다음에 나오는 또 다른 강력한 영적 무기인 기도의 무한한 권능을 우리는 잘 활용해야 해요. 그런데 일제의 탄압이나 6.25전쟁 공산치하의 박해를 안 받아본 말세의 교인들은 ‘이 편한 세상’에 사니 부족함이 없지요. 더욱이 아파트 몇 채 있고 은행에 돈 몇 억, 몇 십억씩 있는 사람들이 뭐가 아쉬워서 하나님께 눈물로 울부짖고, 금식하며 부르짖으며, 눈물의 예배의 감격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40일을 금식하시고요. 광야에서 신명기 말씀들로 다 이겨내셨던 거예요.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기도가 없으면 사탄의 계략에 무력하게 물러서고 말지만요. 우리가 기도하면 길이 열려져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고요. 지혜와 능력을 부어주셔서 기적적인 최후의 승리가 주어지는 거예요.
<도서:『결말을 알면 두렵지 않다』,한홍 목사>
   코로나19 때도 두려워서 교회에 못나오고요. 이 정부의 눈치가 무서워서 예배를 못 드리는데요. 김정은 공산당이 쳐들어오면 몇 명이나 교회에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앞이 암담한 거예요. 순탄하고 형통할 때는 절대 그 신앙을 몰라요.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그의 진정한 신앙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탄식하셨던 거예요.
<예화: 지난 23일 주일 예배 이야기>


   절대 영적 싸움은 우리의 원하는 대로도, 우리의 힘으로도 , 우리의 뜻대로도 결말이 나지 않는 거예요. 다 지나고 보면 주님께서 사람들을 붙이시고, 주님 주신 힘으로 이겨내고요. 주님의 뜻대로 승리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영적 무기를 잘 사용하면서 끝까지 이겨낼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영적 승리를 기필코 거두게 해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3.평생토록 영적 싸움을 잘 해야 함
   마지막으로 본문 16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을 이기고 승리하게 되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후세를 위한 교훈으로 삼기 위해 첫 번째 이 승리의 역사를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려 해요.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에는 ‘여호와의 전쟁의 책’이 있었는데요. 이 책은 이스라엘이 치룬 전쟁들에 대해서 계속해서 기록해서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서 듣게 하라고 해요. 그리하여 후대 자손들에게 용기를 주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대대로 증거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리고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승리의 깃발)’이라고 이름 붙여요. 그런데 마지막에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말씀하셨어요. 사실 아말렉과의 전쟁은 다윗왕 때 아말렉의 전멸로 다 끝나는데요. 왜 하나님께서는 아말렉과 대대로 싸운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여생과 자손 대대로 육의 세력과의 영적 싸움이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됨을 경고하신 거예요. 우리도 흔히 지금 건강하고, 축복되고, 행복하면, 평생 그럴 줄 알아요. 그러나 인간의 장래는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잠언 27:1에 경고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땅에 사는 동안 최후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고요. 사탄의 종노릇을 하는 육의 세력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가정에 불행을 안겨 주고요. 직장에도 고통을 주고요. 교회에도 불화를 일으키면서요. 우리의 평생토록 육의 세력과의 영적 싸움이 있을 것을 경고하신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가실 때까지 에베소서 6:12-13 말씀을 우리는 결단코 잊어서는 안돼요.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가 가정의 문제이고, 직장의 문제이고, 교회의 문제 같고요. 남편과 아내사이의 문제이고, 부모님과의 문제이고, 자녀와의 문제 같고요. 목사의 문제이고, 장로의 문제이고, 교인들의 문제 같지만요. 결국 우리를 불행과 고통으로 몰고 가는 사탄의 무리들, 악의 영들, 육의 세력들이 그 문제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돼요. 그러므로 우리가 결단코 두려워하지 말고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요. 방어용 무기로서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쓰고요. 가슴에는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요. 허리에는 진리의 허리 띠를 띠고요. 발에는 평화의 복음의 신을 신고요. 한 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들고요. 공격용 무기로서 또 다른 손에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요. 모든 기도와 간구로 깨어 구하기를 힘쓰면서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영적 완전 무장을 하고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적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는 거예요.
<도서:『20세기 마지막 순교자 캐시 버낼』, 콜럼바인 총기난사 사건과 1999년 미국 청소년 부흥운동>


   우리도 한번 왔다가 떠나가는 인생인데요. 어떠한 믿음으로 살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해야 하겠어요? 이번에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정부의 강화된 방역과 차별적 탄압 속에서도 4,500명에 이르는 성도님들이 1부, 2부, 4부 동영상 예배에 동참하면서요. “성전이 그리워요!”, “예배는 언제 회복되요?”, “기도할께요!”,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등의 수많은 격려문자 메시지가 사랑하는 우리 치유하는 교회의 성도님들로부터 와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큰 감격 속에서 지난주일 예배를 드렸는데요. 결정적인 하나님의 위로는 마지막 3부 예배를 인도할 때, 새신자까지 보내주신 것이었어요. 저는 그때 심정이 예수님께서 저의 치유하는 교회에 찾아오신 것처럼 너무도 감격스러웠어요. 이처럼 우리는 환난과 핍박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만 드린 것이 아니라요. 온 천하보다 귀한 생명까지 구원할 수 있어서 얼마나 눈물 속에 감격했는지 몰라요. 오늘의 우리를 위협하는 코로나19도, 역사상 가장 힘이 세다는 “바비” 태풍의 피해도, 폭염도, 그에 따른 갖가지 질병이나 물질의 손실까지도, 또한 우리 사이의 영적인 갈등까지도, 우리가 다 싸워나가야 할 영적 싸움이예요. 그러나 우리가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매어 달리면요. 평생토록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하나님의 교회에 어떠한 불행과 고통과 파멸을 문제를 안고 주려는 사탄 마귀에게 속은 육적 세력과의 영적 싸움에서도 기필코 영적으로 승리케 해주실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도서:『카타콤의 순교자(The Martyr of the Catacomb: A Tale of Ancient Rome)』, 13살의 순교자 마카스 폴리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초대교회 때나 일제의 탄압이나 공산당의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예배를 지키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 순교자의 길을 기쁨으로 갔는데요. 건강이나 생계문제로 주님 앞에 못 나오신 분들도 계시겠지만요. 우리가 코로나19와 정부의 처벌이 무서워서 우리의 신앙도, 예배도, 교회도 너무 쉽게 저버리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났어요. 솔직히 저는 지난주일 예배를 드리면서요. 예수님께 열광했던 군중들은 떠나가고요. 믿었던 제자들도 배신하고요. 홀로 외롭게 십자가를 지시고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슬픔의 고난의 길)을 가셨던 예수님의 심정이 가슴 깊이 느껴졌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갔던 무명의 예루살렘 여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많은 무명의 성도들이 주의 종들과 함께 십자가의 주님 앞에 나온 것을 보면서요. 저는 치유하는 교회에 와서 지난 20년 동안 목회하던 중 지난 주일에 가장 눈물을 많이 흘렸고요. 가장 감격스럽고요. 가장 행복한 예배를 드릴 수가 있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코로나19가 앞으로 언제 끝날지 우리는 아무도 몰라요. 그러나 어떠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주의 종들과 영적인 성도들과 함께 육적인 세력을 잘 분별하고요. 말씀과 기도의 영적인 무기를 잘 사용하면서요. 평생토록 영적 싸움을 잘 해나갈 때 우리는 기필코 최후에 영적으로 대역전의 승리를 거두며 복되게 쓰임 받으며 주님께 크게 영광 돌리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