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복음화(35)

이렇게 살라(1) - 참 하나님만 섬기라 출애굽기 20:1-3


 지금 우리는 영적 사사시대를 살아가고 있어요.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는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시대예요. 이러한 우리의 영적 혼란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혼란을 가져오는지 몰라요. 그 결과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누려야 할 그 풍성한 은혜와 넘치는 축복과 행복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출애굽기의 순서를 따라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십계명의 말씀이 나오는데요. 이 혼란의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어서 또 다시 얼마나 전율하며 감격했는지 몰라요? 성경에 나와 있는 율법의 말씀 가운데 ‘하라’는 말씀이 248가지이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가지이고 합해서 613가지가 있는데요. 그 핵심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로 이 십계명에 요약 정리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은혜시대에 사니깐요. 이제는 율법을 안 지켜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요. 소홀히 하기 쉬워요.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적어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기쁨으로 지켜야 하고요.


그중에서도 율법의 핵심인 이 십계명만은 지켜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십계명은 출애굽기 20:3-17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과거와의 결별의 의미로 주어지고요. 또 다시 신명기 5:7-21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미래의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 살아갈 것을 되풀이해서 강조하신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십계명에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본문 2절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내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밝히세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430년만의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분이심을 밝히세요. 사실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은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지만요. 죄 없으신 그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악과 상처와 질병을 대신 지심으로 영원히 살 길을 열어주신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십계명을 구원 받기 위해서 억지로 마지 못해서 죄의식 속에서 지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의 감격 속에서 그 놀라우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지켜나가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먼저 1-4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계명을 말씀하시고요. 5-10계명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계명을 말씀하시는데요. 오늘 그 첫째 계명의 말씀 가운데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가장 먼저 제 1계명으로 본문 3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출했던 애굽은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교였어요. 또한 그들이 들어가려던 가나안도 여러 우상을 섬기는 다신교였어요.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관이었던 거예요.


우리도 갖가지 종교와 세상의 이념이 수없이 많은 말세의 마지막 때 어떠한 복음적인 신관을 갖느냐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제1계명이 다른 모든 계명의 근간이 되었듯이요. 먼저 참 하나님을 믿고 나서 그 다음에 이웃과의 관계도 풀어지는데요. 말세 마지막 때가 되니까 참 하나님을 먼저 바로 믿지 않고 이웃부터 생각하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인본주의 신앙이요, 기복주의 신앙이요, 세속주의 신앙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적인 신관을 갖는데서부터 우리의 참된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있길 바랍니다.


1. 무신론을 물리쳐야 함


 이처럼 우리가 복음적인 신관을 갖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 내려있는 무신론부터 물리쳐야 해요.
그런데 우리 주위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믿으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지 말고 내 주먹을 믿으라!”고 까지 큰소리를 치는 사람도 보았어요. 저는 그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주먹을 시멘트 콘크리트에 내리쳐보라고 해요. 시멘트 콘크리트 하나 이겨내지 못하고 피 흘리는 주먹을 뭐하러 믿느냐는 거예요? 저는 목회해 오면서 수많은 임종자들을 보았지만요. 아무리 살아 생전에 자신을 믿는다고 큰 소리를 치던 사람들도 병들어 죽게 되거나 갑작스런 사고를 당해 죽게 되었을 때는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극복도 못하더라고요.
<예화: 무신론을 주장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말로>


 아무리 우리 인간의 지식이 앞서고요. 문명이 발달하고요. 능력이 있어 보일지 몰라도요. 코로나19 전염병 한번 감염되고요. 8호 태풍 ‘나비’에 이어서 ‘마이삭’이라는 9호 태풍이 덮치고요. 또 ‘하이선’이란 10호 태풍이 닥쳐온다고 하잖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것 보세요. 여러분, 이렇게 무기력한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예요. 그래서 시편 53:1에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고 탄식하셨던 거예요.
<예화: 유럽의 지성의 최고봉인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이 쓴 명상록이요, 변증록인 「팡세(Pensées)」의 내용>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머지않아 갑작스런 죽음을 맞기 전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꼭 만나야 해요.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려고 했던 사람이 있어요.
<예화: 무신론 자요, 무관심자였던 루 월리스(Lew Wallace)의 회심 이야기>


 그런데 우리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아요? 그러니까 우리를 위해 단 한분만 없으신 죄 없으신 아들 예수님을 죽게 하면서 사랑해 주시고요. 오늘까지 부족함이 없으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요. 빈 손으로 이 땅에 온 우리에게 이렇게 놀라우신 축복을 부어 주셨는데도 우리는 입술로만 감사하고요. 진정으로 우리의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삶의 감사를 하지 못하고요. 보답도 해드리지 못하고요. 자신이 잘 믿어서 코로나19에도 안 걸리고요. 자신의 신앙이 옳아서 이 어려운 때에도 큰 어려움이 없이 지내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결코 안돼요.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의 사명을 기억하고요. 지금까지의 주님의 모든 은혜에 감사하면서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요, 가장 기뻐 받으시는 성전예배의 신앙부터 회복해야 해요. 그리하여 우리가 철저히 방역수칙을 지키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데도요. 성경에 근거도 없는 자기 편의에 의한 인본주의 신앙의 ‘비대면(On-line) 예배’라는 것을 만들어서요. 인간 바벨탑을 쌓아놓고요. 그것으로 예배 다 드렸다고 자위하는 말세 마지막 때 목사나 교인들을 보면서요. 예수님께서도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탄식하시지 않으셨어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진정으로 기뻐 받으시고요. 우리의 합심기도에 어떠한 질병도 기적적으로 치료하신다는 믿음이 없는 거예요. 이것이 말세 마지막 때의 신앙인의 불신앙인 거예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고 연구하면서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찾고 찾으면요.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기필코 기적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돼요. 그래서 이사야 55:3, 6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분명히 증거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리고요.
하나님을 찾고 찾아서요. 기필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요. 하나님의 살아계신 확실한 증거를 얻게 됨으로써 말세 마지막 때 우리의 신앙조차도 뒤흔드는 우리 주위의 갖가지 사탄의 역사에 의한 무신론조차도 기필코 물리치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다신론에도 속아선 안됨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 가운데 수많은 인간들이 외롭고 힘들고요. 삶의 한계와 절망 속에서요. 스스로 위안을 삼기 위해 만든 수많은 신들이 있었어요. 각 나라마다 있었고요. 각 민족마다 있었어요. 그래서 그리스 · 로마신화도 생겼고요. 일본에는 800만 개의 잡신이 있다고 하잖아요? 우리나라도 저희 어렸을 때만 해도 정한수(우물물)를 떠놓고요. 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고요.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하기도 했고요. 심지어 요즘에도 삶이 고통스럽고 불안하면요. 점집에 가서 점을 치기도 해요.


그런데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안하요? 얼마나 불안하고 막막하면 그렇겠어요? (그렇다고 우리 교인 중에는 그런 사람이 절대 없겠지요?  예배 마치고 집에 가다가 절대 유혹 받지 마세요) 그러한 귀신이나 점괘를 통해서 우리의 과거나 현재를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미래는 가끔은 문고리 잡듯이 맞출지 모르지만 절대로 못 맞추는 거예요. 그럴 것 같으면 자신들이 그걸 뜯어고쳐서 성공하고 부자 되어버리지요. 뭐하고 그 짓 하고 있겠어요?


 이러한 것들이 무속신앙이라면 적어도 믿는 신을 두고 경전을 갖춘 종교들도 많아요. 우리가 주위에 흔히 접하는 불교(사실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범신론)나 유교(조상신을 섬기지만 자기 수양의 도덕 사상)나 이슬람교(이슬람교의 예언자 마호멧을 믿는 종교)가 있어요. 이런 인간이 만든 종교들을 분별하지 못하고요. 가관인 것은 이러한 세상의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가 나오고요. 세계종교평화협의회까지 만들고요. 세계종교문화축제까지 해요. 또 그런데 그러한 인간이 만든 종교연합행사에까지 참석하는 캐톨릭교회와 개신교회까지 있으니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듭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신앙이 있는 것인가 하는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는 이렇게 갖가지 다신교를 믿으며 우상숭배도 수용하고 그들과 연합하는 사람들을 사랑이 많고요. 마음이 너그럽고요. 포용력이 있다고 하는데요. 여러분, 물과 기름이 결코 섞일 수 없듯이요. 진리와 비진리가 결코 합해질 수가 없기 때문에요. 이러한 그럴듯한 속임수에 절대 속아 넘어가서는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6:14-17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명령하셨던 거예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우리가 우상숭배에 빠지는게 아니라요. 처음에는 함께 하고요. 사귀고요. 조화되고요. 상관하고요. 일치가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따로 있고요. 부정한 것을 만지지도 말아야 하는 거예요.


 늘 강조하지만 기독교와 세상종교의 가장 큰 차이는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자신의 수양이나 도덕이나 고행이나 선행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인간이 만든 수도종교이지만요. 인간 스스로 죄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지셔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계시종교인 거예요. 그래서 불교와 우리 기독교를 엄밀하게 영적으로 비교해서 분별해보면요. 모든 종교가 비슷해 보이는 것 같지만요. 불교를 상징하는 卍(만자)는 굽은 십자가이고요. (독일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는 불교의 만자를 삐딱하게 세워 놓은 거예요. 다 사탄이 배후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불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이고요.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결국 영원한 지옥의 불못에 빠져 심판 받을 사람들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분별하고 경계하며 복음 전해서 구원해야 하는 거예요. 그리하여 요한복음 14: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증거하시고요. 이어서 사도행전 4: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확증하셨던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 자신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세주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해요. 예수님에 의해 인류의 역사가 주전(B.C, Before Christ)가 주후(A.D, Anno Domini)로 갈라졌고요.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전 세계 인류가 휴일(Sunday)로 쉬고요. 성탄절(Chrismas)을 인류 최대의 명절로 지키며 덕분에 최고의 호황을 누리면서도요. 예수(이름: 여호와가 구원하신다) 그리스도(직분: 구세주)를 못 믿고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영혼의 죄악과 용서와 마음의 상처의 치유와 육신의 질병의 치료를 못 받는다면 이보다 불행하고 불쌍한 인생이 어디에 있겠어요?


 더욱이 코로나19 때문에 교회 문을 열고 예배를 드린다고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고요. 기독교의 신뢰도가 떨어졌다는 설문조사 결과까지 나왔다고 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뒤흔들어요. 그러나 우리가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까지 신천지 이단이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친 비복음적인 교회들이 코로나19 확진자들이 많이 나왔다고 해서요.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매일 기도하는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오히려 코로나19를 막지 못하고요. 현재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사탄의 계략을 깨닫지도 못하고요. 교회마다 “교회가 진심으로 미안합니다!”라는 플랭카드를 내거는 것은 교회가 코로나19의 주범처럼 인정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지난 주간 태풍으로 우리 교회의 “코로나19 함께 이겨내요!”라는 플랭카드가 찢어져서 “교회가 진심으로 미안합니다!”라는 플랭카드를 걸면 어떠냐고 해서요. “우리가 무슨 죄인이나 된 것처럼 그런 소리하지 마소! 왜 영적 분별력을 찾지 못하고 자꾸 사탄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는가?” 그래서요. 우리 교회는 “교회가 아픔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라고 걸어놓으라고 했어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돼요. 세상 사람들을 위한다고 우리의 신앙까지 포기하는 것은 그것은 본질적으로 앞뒤가 완전히 뒤바뀐 비복음적인 신앙인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 드리고요.


코로나19를 위해서 간구하고요. 세상의 방역수칙도 잘 지키면서요. 어둡고 썩어가는 세상 속에서도 모범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살아가면요. 언젠가는 세상 사람들도 우리의 진심을 알고요. 우리에게서 감동을 받고요. 변화될 날이 꼭 다가오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영적 분별력을 가지면 참된 진리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요. 결단코 인간이 만든 세상의 갖가지 다신교에 속지 않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3.유일신 하나님을 믿어야 함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무신론이나 다신교를 다 배척하고요.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해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유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요. 에베소서 4:6에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고 증거하실 뿐만 아니라요. 로마서 11:36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하고 증언하고 계세요. 사실 전 세계의 어느 경전에도 없는 천지 창조(창 1장)로 부터 시작해서요. 인간의 창조(창 2장)와 노아의 홍수의 심판(창6-8장)과 세 인종의 기원(창 9-10장)과 인류의 구원(사 53장, 마 27장, 막 15장, 눅 23장, 요 19장) 핵폭탄에 의한 인류의 심판(벧후 3장)과 영원한 세계(계 21-22장)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기원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심판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체계적으로 말씀하시고 기록하도록 하신 분은 여호와(הוהי, 스스로 계신 분) 하나님(םיהִלֹאֱ, 강하신 분) 밖에 안 계세요. 그래서 전 세계 인구의 1/3이 이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복을 받고 앞서 가는 선진국가들인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다 크리스천 국가들인 거예요.


 그런데 이처럼 우리가 믿는 복음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에요. 그 수많은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이스라엘 예루살렘부터 시작해서요. 로마, 스위스,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을 거쳐서 지금으로부터 154년 전인 1866년 9월 5일 대동강 변에서 토마스 선교사님이 순교하시면서 대한민국에까지 전해진 거예요. 그리고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축복 속에 개화가 되고 근대화가 되고 민주화가 되고 복지화가 되고 세계화까지 되었어요. 우리 개인이나 가정도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은혜 받고요. 축복 누리고요.  행복해진 거예요. 그런데 한국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요. 말세 마지막 때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고 하고 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3:16에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경고하신 거예요. 그리하여 한국교회의 촛대가 이제는 중국교회에 넘어가서요.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선교사를 많이 파송했지만요. 중국에 가보면 저희 어렸을 때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얼마나 뜨겁게 믿는지요? 13억의 인구 중에 1억 명이나 크리스천이 된 거예요. 그래서 중국이 옛날의 중국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축복 속에 이제는 과학, 경제, 정치, 군사,  외교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겨룰 수 있는 세계 2대 강국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몰라보고요. 오히려 시진핑 정권이 정치를 잘 한줄 알고 교만해 하면서요. 오히려 기독교를 박해하려다가 우한에서 코로나19가 터져나와서요. 결국 전 세계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요. 미국과 극도의 대립관계에 빠지고 만 거예요.


 이 코로가19가 우리나라에도 신천지 이단들에 의해 전파되어서요. 한국교회와 우리 정부가 손대지 못했던 신천지 이단을 격파할 수 있었고요. 매일 밖 이태원에서 수천 명의 동성애자들이 광란의 밤을 지새운 것을 우리는 몰랐는데 다 들춰주시고요. 이 혼란한 말세 마지막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요. 우리나라를 영적으로 바로 이끌어 나가야 할 교회가 이념에 빠져서 온통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니까 8.15집회를 통해 교회의 문까지 닫혀지고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까지 제약을 받고 있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다 인간의 우연 같지만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되어 온 역사를 영적으로 잘 분별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유일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게 될 때에 이러한 주님을 믿는 확실한 증거를 우리의 삶 가운데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인간의 생사화복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확실히 믿는다면 더 이상 코로나19에 대해서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요. 더더욱 정부의 처벌이 무서워해서 주일성수와 성전예배의 신앙까지 결단코 흔들려선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최근 충남 아산의 한 목사님이 교회 정문 앞에 붙인  안내문을 보고요. “시골목사가 내건 대자보가 엄청난 반전”이라고 언론이 호들갑을 떨고 있어요. 그 내용은 “예배 드리면 죽인다고 칼이 들어올 때 목숨을 걸고 예배 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배 모임이 칼이 되어 이웃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 모이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 (모든 모임 잠정 연기, 가정예배 전환)” 지금 이 정도의 정부의 박해에도 꼼짝도 못하고 교회 문을 닫고 예배에 안 나오는 목사님과 교인들이 공산당이 내려와서 교회 나오면 다 죽인다면 그때는 더 열심히 잘 나올 줄 아세요? 교회가 방역수칙 철저히 지키면서 코로나19의 한시라도 시급한 퇴치를 위해 기도하며 예배드린다고 무슨 이웃이게 칼이 되어 그렇게도 이웃의 목숨을 위태롭게 합니까? 더구나 공공관청이나 직장이나 마트나 지하철도 사람만 모이면 이웃에게 칼이 됩니까? 막 읽으면 그럴듯한 글이지만요.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궤변입니까? 그런데도 자세히 읽어보면 신앙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한 말을 들으면 다들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 상식이나 사회통념을 따라가는 것은 도덕이나 윤리이지 그것은 결코 진정한 신앙은 아닌 거예요. 진정한 신앙은 인간의 도덕이나 윤리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을 따르는 거예요. 그런데도 어제 인터넷에는 이젠 목사만 봐도 식겁한다는 ‘기독교 포비아(Phobia, 공포증)까지 주장하고 나서기 시작했어요. 이 얼마나 교묘하고 교활한 사탄의 거짓 공세예요?


 실제로 5,000만 국민 중 1,000만이 기독교인이라면요. 지금까지 우리나라 코로나19 확진자 20,000여 명 가운데 4,000여 명은 기독교 신자여야 하는데요. 실제로는 그의 1/4인 1,000여 명 밖에 안되는데도요. 이 모든 코로나19가 교회에서 확산된 것처럼 비방하고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금지하는 것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사탄만이 기뻐할 거예요. 더구나 우리나라 한 해 암으로 죽는 사람이 79,000여 명이고요. 한해 독감으로 죽는 사람이 4,400명이에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3,300여 명이고요. 그런데 코로나19의 치사율이 역대 전염병 중에서 제일 낮고요. 지금까지 코로나19로 죽는 사람이 330명도 안되고요. 감염률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한해 독감으로 죽는 사람보다 1/10도 훨씬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독감 위험하다고 예배를 안 드린 적이 있느냐는 거예요. 그런데 정부나 언론은 코로나19가 뭐가 그렇게 두려워해서 이러한 전염병을 치유해야 할 교회부터 막고요. 또 그 세상 논리에 넘어간 목사, 장로들이 왜 예배를 못 드리게 하는지 저는 목사의 신앙의 양심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더구나 이렇게 갖가지 이념이나 증오심으로 쫙 갈라진 세상을 영적으로 치유해 나가야 할 교회마저도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서요. 비복음적인 대형교회와 진보주의 교회들이 언제부터인가 정부와 언론과 손을 잡고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세상 사람들의 여론을 더 우선시하고요. 교회가 이웃의 생명을 해친다고 비난하고요. 성전건축 대출금과 교회 임대료 및 재정을 위해서 교회 문을 연다고 비방하면서요. 순교 신앙을 이어가고 교회를 지키고 예배를 사수하려는 복음적인 교회들을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몰상식한 집단으로 매도하고 나서고 있어요.
<예화: 대한의사협회와 정부, 여당과의 협상>


 그러나 교회의 목사, 장로들은 다 뿔뿔이 흩어져 버리니깐요. 말만 앞서고 실제로 세상에 대해서 더 이상 복음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요. 무력해진 말세 마지막 때의 교회들의 모습을 보면서요. 참으로 처참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어요. 그러나 우리 치유하는교회 성도들이라도 이처럼 교회를 자본주의 마트나 시장 정도로 착각하고요. 주님의 몸 된 거룩한 교회를 세상의 공공의 적으로 만들려는 사탄의 교묘하고도 교활한 계략이 깔려있다는 것을 영적으로 잘 분별하고요. 대적하고요. 이러한 인본주의, 세속주의, 기복주의 신앙들을 물리치고요. 성경에 근거한 철저한 복음주의 신앙으로 똘똘 뭉쳐서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시고요,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생명인 예배를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세 마지막 때일수록 온갖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만왕의 왕이시요, 만유의 주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붙잡고 승리하며 나가야 하는 거예요. 그리할 때 믿음장인 히브리서 11:1-2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분명히 증거하지 않아요?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미래의 바라는 것들이 실제로 이뤄지고요. 과거에 보지 못한 것들의 확실한 증거를 얻게 돼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써 영적 싸움을 이루면서요. 얼마나 믿음으로 몸부림치며 살아왔어요? 그리하여 우리가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지난 날의 어떠한 죄악들도 다 용서함을 받고요. 얼마나 구원의 감격 속에 살아왔어요? 또한 지난날의 어떠한 상처조차도 우리가 체험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함으로 인해 얼마나 행복의 감격 속에 살아왔어요? 더 나아가 지난날의 어떠한 질병조차도 십자가의 치유의 능력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기적적인 치료 가운데 오늘날까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왔어요?
<실명위기에서 기적적으로 회복한 부산의 장로님 딸과 딸의 임신을 위해 매일 새벽기도후 쌍둥이를 임신한 한 목사님의 따님>


 이제는 우리가 평생을 유일신 하나님을 확신하고 믿음의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가야 할 때예요.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증거하신 거예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살아계신 분이심을 믿고요. 그가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이 땅에서는 복을 주시고 하늘에서는 상을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는 거예요. 먼저는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믿음의 복을 누리고요. 머지않아 우리가 다 세상을 떠날텐데요. 하늘나라의 상인 면류관을 누리게 될 거예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킨 자에게는 의의 면류관(딤후 4:7-8)이 주어지고요. 시험을 참고 죽도록 충성을 다한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이 주어지고요. 양 무리의 본이 된 자에게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2-4)이 주어지고요. 많은 영혼을 주님께 돌아오게 한 자에게는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20)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므로 말세 마지막 때 우리의 신앙을 지키기가 힘들고요. 코로나19로 인해 갖가지 환난과 핍박이 주어져도요. 우리는 유일신 참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기적적인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고요. 머지않아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늘의 상과 면류관을 모두 다 누리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이금선 사모님의 소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머지않아 곧 다들 떠나갈텐데요. 이 사모님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젊고요? 얼마나 건강하고요? 또 많이 배우고요? 가진 것도 많아요? 그러나 우리가 세상적으로 많이 배우고요. 높은 지위에 오르고요. 돈 좀 벌어놓고 쌓아놓아도요. 머지않아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주님과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해 쓰여지지 않는 세상 것들은 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다 날라가고 사라지고 아무 쓸모도 없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 없고요. 모아둔 것 없고요. 내세울 것 없어도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하는 무신론을 다 물리치고요. 다신론에도 속지 않고요. 유일신 참 하나님만을 믿고요. 주님과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해 살아갈 때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복 되게 쓰임 받고요. 영광 돌리고요. 머지않아 하늘나라에 이르러서도 영원한 상과 면류관을 누리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