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복음화(35) 이렇게 살라(2)

우상을 만들지 말라출애굽기 20:4-6


 우리 인생은 자신들이 사모하고 흠모하는 우상을 만들고 살아가요.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마음의 공허함을 인간적이고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채울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러한 우상을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결코 만족이 될 수가 없고요. 자신만 불행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요. 자손들의 축복까지도 다 막아버리고요.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광까지도 다 가리워 버리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본문 5절 하반절부터 6절에 다음과 같이 경고하세요.“......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신다는 거예요.
<예화: 가계에 흐르는 죄의 저주에 대해 연구한 다세대적 가족치료학자 머레이 보웬(Murray Bowen)>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축복의 약속을 믿으면서 십계명 중 제2계명의 말씀 가운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다함께 본문 4-5절 상반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원래 캐톨릭과 루터교는 제1계명과 2계명을 하나로 봐요. 그런데 우리 개신교와 성공회는 제1계명과 2계명을 나눠서 봐요. 우리가 제1계명과 2계명을 나누어야 하는 이유는 제1계명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믿음의 계명이라면요. 제2계명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하는 섬김의 계명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본문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시면서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고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경고하세요. 그런데 가장 먼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우상을 만들지 말아야 절하지도 않고요. 섬기지도 않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만들고 절하고 섬기는 우상이 무엇인가 하는 거예요. 말세 마지막 때 우리는 과거처럼 그렇게 눈에 보이는 석상이나 목상이나 어떤 형태를 만들어 섬기는 유형 우상을 섬기는 경우는 드물지만요.


우리의 부모님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나 손주 등 우리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아요?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 우상을 섬기는 경우도 얼마나 많이 있어요? 돈이나 명예나 세상 향락도 있고요. 우리가 주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 줘도요. 주님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자기의 헛된 교만이나 기질이나 이념이나 주장이나 편견이나 아집 등이 결국 주님을 섬기는 데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는 우상들인 거예요.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철저히 깨어지고 부서지고 죽어지기 전에는 더 이상의 은혜도 없고요. 축복도 없고요. 행복의 감격도 없고요.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의 암적 존재로 걸림돌만 되다가 인생을 끝내버린다면 이보다도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이 어디에 있어요? 그래서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요. 골로새서 3:5-6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경고하신 거예요. 자신이 아무리 혼자 잘 믿는다고 큰 소리를 쳐도요.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탐심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우상이고요. 이러한 탐심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하고요.  불행과 고통 가운데 인생을 끝내고 만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말세 마지막 때 이렇게 우리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가장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곳이 요한일서 2:15-17의 말씀이에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지 않는데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첫째는 뭐라고 그랬어요? ‘육신의 정욕’이에요.


1. 육신의 정욕을 피해야 함
 말세 마지막 때 우리의 육신의 정욕이 우리를 주님과의 처음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는 첫 번째 우상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말세 마지막 때를 ‘3S시대’라고 하잖아요? Sports(운동경기) Screen(영화, 오락, 음악 등 엔터테인먼트) Sex(성)으로 가득한 세상이에요. 특히 성(Sex)에 대해서 이제는 남녀 간에도 성도 부족해서요. 동성 간에도 성교를 하고요. 동물과도 성교를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으니 주님께서 심판하러 다시 오실 날이 너무도 임박해진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도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회사의 회식 때나 인터넷이나 동창회나 동호인회 등을 통해서 얼마나 유혹을 많이 받아요? 목회를 하면서도 보면요. 어렸을 때 부모님의 사랑을 못 받거나 결혼해서 남편의 사랑마저도 못 받은 교인들은 목사님의 사랑의 관심을 은근히 기대해요. 그런데 목사님이 말씀의 은혜와 기도의 능력이 있으면 더욱 목사님께 매어달려요. 그런데 목사님이 인물까지 받쳐줘 봐요. 그럼 막 달려들어요. 그러니 우리 부목사님들이나 제가 목회하기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러나 이 모든 육신의 정욕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은 다른 방법은 없어요. 디모데후서 2:22에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분명히 명령하시지 않습니까? 정욕은 피해야 하는 거예요. 피하지 않고는 성군이었던 다윗도, 그 어떠한 신앙의 위인도 이겨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를 유혹하는 시간을 피해야 하고요. 유혹하는 장소도 피해야 하고요. 유혹하는 어떠한 대상도 피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이 육신의 정욕의 소극적인 대처법이라면요. 보다 더 적극적으로도 주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이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라야 해요. 우리가 더욱 열심히 주님의 전에 나아와서 함께 예배드리고요. 찬양하고요. 하나님의 말씀도 받고요. 기도도 드리면서요. 믿음으로 일어서서요. 정욕의 시험과 유혹 많은 세상을 이겨내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코로나19의 고난 속에서 정부의 방역 실패를 교회에 전가시키면서 천주교 불교와는 달리 교회만 전면적인 집회금지라는 정부의 행정명령에 의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박해를 받는 상황 속에서도요.


 우리 치유하는교회는 연세 높으셔서 노약하시고 생계의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을 제외하고는 지난 9개월 동안 한 주일도 빠짐없이 순교적 신앙으로 나아온 우리 치유하는교회의 영적 그루터기들인 은퇴하신 우리 원로목사님들과 원로장로님들과 은퇴권사님들과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우리 장로님들과 권사님들과 집사님들과 성도님들이 주의 종들과 함께 주님 앞에 나아와서요.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예배 드리니깐요.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서요. 세상에서 돌아다니다가는 코로나19에 감염될 수 있어도요. 지난 9개월 동안 수천 명의 양떼들 가운데에도 교회에서는 코로나19에 감염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안 나오는 것 보세요. 경상남도교회총연합회도 도지사와 담판을 하고서 대면예배를 계속해왔는데요. 광화문집회 참석한 확진자 6명 외에 확진자가 계속해서 지금까지도 안 나오는 것 보세요.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 코로나19도 막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지난 3주간 초대교회 시대처럼 영적인 카타콤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은혜롭고요. 축복 되고요. 행복의 감격 속에서요. 눈물 없이는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정욕을 피하고 주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함으로써 어떠한 육신의 정욕의 우상도 능히 이겨내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함께 복되게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안목의 정욕을 물리쳐야 함
 말세 마지막 때 우리를 주님과의 처음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는 두 번째 우상은 우리의 안목의 정욕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욕심인 소유욕, 물질욕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린 시절에 비하면 예수님을 믿고 얼마나 복 받고 잘 살아요? 멀리 갈 것도 없어요. 처음 결혼하고 신혼살림 할 때에 비해서도 얼마나 복 받고 잘 살아요? 그런데도 서양속담에 “돈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해진다”는 말이 있듯이요. 현재의 삶에 감사와 만족이 없으면요. 점점 욕심의 불행과 고통이 깊어만 가는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가는 우리의 인생에게 이렇게 물질의 축복을 부어주셨는지를 깨닫지를 못하는 거예요. 주님과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께 바쳐야 할 온전한 십일조부터 도둑질을 시작하고요.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는 마음껏 쓰면서도요. 율법을 다 지켰다는 부자 관리가 물질이 아까워서 영생을 잃어버린 것처럼(마 19장, 막 10장, 눅 18장) 물질이 아까워서 주님과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해서는 쓰지도 못하고요. 모으고 쌓아놓는 낙으로 살다가요.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나버리면 세상에 이런 졸부(猝富)들이 어디 있어요? 지금까지 모으고 쌓아놓고 자랑했던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더구나 유고의 가문의식이 깊은 우리는 죽을 때 그동안 모은 재산을 자식들에게 다 물려주고 떠나면요. 자식들은 재산 싸움으로 인해 형제들 사이의 의가 다 상하고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흩으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5:26, 30)고 분명히 경고하세요. 우리가 일생토록 뼈 빠지게 고생하고 수고한 것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요. 영원한 불행과 고통만 남는 거예요. 그러니 세상에 얼마나 불행하고 불쌍한 인생이냐는 거예요.
<예화: 「왕의 재정」이란 책을 쓴 황의 재정학교 훈련 책임자 김미진 간사>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부터 시작해서 감사헌금, 구제헌금, 장학헌금, 선교헌금에 이르기까지 조그마한 물질이라도 믿음의 정성을 다해서 바치고 나누고 베풀면서요. 이 땅 위에서의 물질적 사명을 잘 감당하고요.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23)하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누리게 될 거예요.
<예화: 미국의 신신한 크리스천 거부들>
<예화: 호텔왕 배런 힐튼(Barron Hilton) 이야기>
<예화: 부동산 전문기업인 광원산업 이수영 회장님 이야기>


 어리석은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서요. “내가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 하리라”고 하니깐요.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하고 물으세요. 그러시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어리석은 부자를 책망하시는 말씀이라고 하시면서요(눅 12:16-21). 누가복음 12:15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리라”고 경고하신 거예요. 특별히 코로나19로 인해서 모두들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렵게들 살아가요? 이렇게 어렵고 힘들수록 그동안 축복 받은 성도들이 고통당하는 사랑하는 형제와 이웃을 돕도록 하기 위해서 구제와 봉사와 섬김의 거룩한 사명감을 가져야 해요. 이때를 위해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가야 할 우리에게 이렇게 넘치는 축복을 부어 주신 것 아니겠어요?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매”(행 2:44-45)와 같이 진정한 주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해요. 지금까지 그렇게 살지 못했다 할지라도 얼마 남지 않은 남은 여생이라도 맘모니즘(Mammonism)즉 황금만능주의의 우상을 과감하게 내려놓고요.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거룩한 부자가 되어야 해요. 그러므로 우리가 물질욕의 탐심을 물리치고 더 이상 물질 아까워하지 않고 나누고 베풀고 섬기게 될 때 우리는 어떠한 안목의 정욕의 우상도 능히 이겨낼 뿐만 아니라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여생과 자손들에 이르기까지 천배나 만배나 갚아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이생의 자랑을 낮춰야 함
 마지막으로 말세 마지막 때 우리를 주님과의 처음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는 마지막 우상은 이생의 자랑이라는 거예요. 사람이 먹고 살만 하면 마지막으로 이 이생의 자랑인 명예욕의 시험을 받게 돼요. 나이가 들수록 이 명예욕이 심해져서 노욕으로 변하고 마는 거예요. 더욱이 세상에서 명예욕이 충족이 안 될 때 교회에 와서 그 명예욕을 충족시킬려고 해요. 그래서 처음 초신자 때가 제일 예수님을 닮아서 온유하고 겸손해요. 그런데 서리집사가 되면 점점 목에 힘이 들어가고 자기 주장을 펼치기 시작해요. 그러다가 안수집사나 권사가 되면 목에 깁스를 하고 제직회 때 큰 소리를 치기 시작해요. 그러다가 목사나 장로가 되면 아예 목에 철근 콘크리트를 깔아버려요(우리 치유하는교회 빼놓고요). 예수님을 믿어도 너무 잘못 믿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는 목사가 높냐, 장로가 높냐 하는 명예욕의 큰 시험에 빠져 있어요. 여러분, 목사나 장로가 세상의 명예나 감투에요? 그것은 가장 낮아져서 섬기는 자리에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하는 직분이에요. 목숨 걸고 예배를 드리고 성전을 지키며 충성을 다하라고 주신 사명인 거예요. 그런데 자기 희생은 하나도 안 하면서 영광만 얻으려고 하니 이것이 말세 목사와 장로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에요. 그래서 말세의 마지막 때가 되다 보니깐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행 20:28) 자기의 소유처럼 생각하고 좌지우지를 할려고 하고요. 심지어 자신의 하찮은 신앙과 성경지식을 가지고 목회까지도 좌지우지 할려고 하고 목회의 발목을 잡을려고 해요. 그럴수록 교회는 사탄의 계략에 속아서요. 갈등과 불화를 거듭하게 되고요. 침체와 파탄에 이르고 마는 거예요. 그렇게 목회를 하고 싶으면 빨리 주의 종의 소명을 받고요. 신학을 공부하고요. 목회훈련을 받고요. 목사가 되어서요. 평생 맘껏 목회를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때부터 하나님의 교회는 주의 종들을 세워서 목회를 하게 하였고요. 평신도(집사)들을 세워서 행정과 재정을 돕도록 한 거예요. 우리가 병원에 가면 의사의 말씀을 듣고요. 학교에 가면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요. 체육관에 가면 관장님의 말씀을 듣듯이요. 교회에 오면 주의 종이 비성경적이거나 비신앙적이거나 비신학적이거나 비목회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면 기쁨으로 순종하고요. 설령 내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신앙과 다르면 성경을 가지고 와서 토론을 하든지 아니면 일단 믿음으로 복종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틀림없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에게 큰 복이 될 거예요.
<예화: 수요밤 JTBC 좌담프로그램에서 진보적인 두 목사님의 좌담>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지만요. 성전이 된 우리 몸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라고 하였지요(고전 3:16, 6:19). 각자 자기 마음대로 어디서나 비대면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도 없는 거예요. 오히려 초대교회도 그러했고요. 말세가 될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고 강조하셨던 거예요(히 10:25). 그런데도 이를 영적으로 분별하지 못하고 다 속아서 그렇게 비복음적으로 따라 하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다 무너지고 마는 거예요. 지금처럼 비대면예배를 드려서 여러분이 더욱 더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되고 행복의 감격이 되면 저라도 나서서 코로나19가 끝나고도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거예요. 그러나 불신 정부의 말대로 비대면예배를 지금처럼 계속 드려 보십시오. 여러분, 영적으로 다 죽고 말아요. 부모가 자식에게 절대 나쁜 것을 안 가르쳐 주듯이요. 주의 종도 양떼들을 결단코 잘못된 길로 못 가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도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충동질을 해서요. 우리가 다 된 줄로 알고요. 다 안 것처럼 여기게 하고요. 자신이 최고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요. 우리가 그 명예욕의 시험에 넘어지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 교인일수록 먼저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지 않으시고요. 주의 종들도 인정하지 않고요.  교인들도 다 등을 돌리고 돌아서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0:12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고요. 갈라디아서 6:3에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경고하셨던 거예요.
<예화: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신앙 이야기>


 그래서 누가복음 18:14에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고 분명히 약속하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명예욕의 유혹을 과감히 물리치며 자신을 낮추고요. 주님의 십자가에서 철저히 깨어지고요. 부서지고요. 죽어갈 때 우리는 어떠한 이생의 자랑의 우상도 능히 이겨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으며 큰 영광을 돌리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김의식 위임목사님의 목회 이야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우리를 뒤흔드는 헛된 우상들이 얼마나 많아요? 이러한 우상들은 우리의 인생을 결국 공허와 허무와 파멸로 몰고 가는 것뿐이에요. 그러나 어떠한 육신의 정욕도 피하고요. 안목의 정욕도 물리치고요. 이생의 자랑도 낮출 때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어떠한 우상도 만들지 않고 절하지 않고 섬기지 않으면서요. 주님만 섬기는 그 풍성한 은혜와 넘치는 축복과  행복의 감격을 일생토록 누리며 영광 돌리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