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복음화(44)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출애굽기 20:17)


우리가 십계명의 말씀을 나눈지 열 주일이 되었어요. 제1-4 계명이 하나님께 대해 지켜야 하는 말씀이라면 제5-10 계명은 사람들에 대해서 지켜야 할 말씀인데요. 제5 계명은 부모 존중에 대해서 말씀하시고요. 제6 계명은 생명 존중에 대해서 말씀하시고요. 제7 계명은 가정 존중에 대해서 말씀하시고요. 제8 계명은 물질 존중에 대해서 말씀하시고요. 제9 계명은 언어 존중에 대해서 말씀하시고요. 오늘 마지막 제10 계명은 이웃 존중에 대해서 말씀하세요. 이웃 존중에 대한 제10 계명의 말씀인 출애굽기 20:17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여기 본문에 나오는 ‘집’이란 히브리어로 ‘תיִבַּ(베트)’라고 하는데요. 단순히 거주지로서의 ‘집’(레 25:29)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요. 이웃의 가진 모든 소유를 ‘집’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한 거예요. 그래서 여기 ’이웃의 집’이란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의 소나 나귀 등 이웃의 모든 소유를 말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을 신약의 복음으로 재해석하고 완성시키는 말씀이 어디에 있는가 기도하는 가운데 골로새서 3:1-17 말씀 가운데서 찾게 되었어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고 명령하시면서요. 골로새서 3:5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이웃의 집을 탐내지 않고 살 것인가 이 시간도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음란과 악한 정욕에 대해서 죽어져야 함(골 3:5상)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악한 정욕과......” 우리가 하늘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지 않기 위해서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하는데요. 가장 먼저 음란과 악한 정욕을 죽여야 한다는 거예요. 여기 ‘음란’이란 헬라어로 ‘πορνείαν(포르네이안)’이라고 해서 ‘성적 부도덕(sexual immorality)’을 의미하고요. ‘악한 정욕’은 헬라어로 ‘ἐπιθυμίαν κακήν(에피튀미안 카켄)’이라고 해서 ‘악한 욕망(evil desires)’을 의미하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출애굽기 20:17 상반절의 제10 계명의 맨 처음 나오는 “......네 이웃의 아내(남편)......”를 탐내는 거예요. 지금 말세 마지막 때 온 세상이 지난 날 노아의 때처럼 장가 들고 시집 가는 것을 경고한 거예요(마 24:37-38). 그것은 장가 들고 시집 가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요.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이혼하고 재혼하면서 우리의 가정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신 거예요. 그리함으로 노아의 때 대홍수의 심판이 있었는데요. 또한 말세 마지막 때 롯의 때 동성애가 난무했던 것처럼 성적 타락에서 그치지 않고요. 변태성욕이라는 성도착증뿐만 아니라 동성애라는 성정체성장애에 이를 정도로 극도로 타락해버렸다는 거예요. 그리함으로 롯의 때 유황불의 심판이 임했던 것처럼 말세 마지막 때 지옥불의 심판이 점점 임박해오고 있는 현실이에요. 여러분, 왜 말세 마지막 때 많은 사람들이 성적인 타락에 빠져드는지 아세요? 어린 시절의 사랑의 상처와 결핍이 우리 인생을 공허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우리의 공허함을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나 향락으로 채울려고 하는데요. 그 가운데 특별히 성적인 타락에 빠져드는 거예요. 그리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적인 만족을 구하지만요.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는 참된 만족과 행복을 결코 누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점점 성중독증에 빠져들고 마는 거예요.
유머) 외도한 배우자에게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국가별 국민성 이야기


 그런데 우리가 극도의 성적 타락의 말세 마지막 때의 이러한 정욕에 대해서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다른 길이 없어요. 디모데후서 2:22에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분명히 증거하잖아요? 정욕의 유혹은 무조건 피해 버리고요.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성도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기 위해서요. 열심히 주님 앞에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보면 가정예배, 야외예배, 감사예배, 특별예배 등 비공식예배(Informal worship)로서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드릴 수 있지만요. 적어도 공식예배(Formal worship service)인 주일 낮예배만은 코로나19의 어떠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인 성전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면요. 그때에 우리가 성령님의 은혜를 뜨겁게 체험하고요.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서요. 우리의 힘으로는 음란과 악한 정욕을 결단코 이겨낼 수 없지만요.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능히 이겨내고요. 육신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쾌락과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부정과 사욕에 대해서 죽어져야 함(골 3:5중)
 “......부정과 사욕과......” 여기 나오는 ‘부정’이란 헬라어로 ‘ἀκαθαρσίαν(아카타르시안)’이라고 해서 ‘깨끗하지 못하고 순수하지 못함(impurity)’을 의미하고요. 그 다음의 ‘사욕’은 헬라어로 ‘πάθος(파토스)’라고 해서 ‘욕망(lust)’을 의미하는 거예요. 한 마디로 ‘불순한 욕망’을 의미하는데요. 출애굽기 20:17 중반절의 제10 계명의 중간에 나오는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을 탐내는 것인데요. 우리 주위사람들까지도 탐내고 동원하여 자신의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불순한 욕망을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왜 자꾸 세상의 이러한 불순한 욕망에 목을 매는 줄 아세요? 역시 인생의 공허함을 세상의 명예로도 채울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세상의 불순한 욕망으로 자꾸 편을 가르고요. 자기 세력을 만들려고 하고요. 세를 과시할려고 해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다 허물어버리실 인간 바벨탑을 쌓는 헛고생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오히려 지난 날에 쌓아놓은 명예조차도 다 허물어 뜨리고요. 파멸에 이르고 마는 거예요.
예화) 인간적인 불순한 욕망이나 계락으로 인하여 미국대선에 실패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


 그러므로 다른 길이 없어요. 우리의 불순한 욕망에 대해서 철저히 다 죽어져야 해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분명히 증거하시지 않아요? 우리가 날마다 순간마다 깨어서요. 주님을 바라보면서요.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짖으면서요.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요.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지면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고요. 내 주장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놀랍게 순종하게 되고요. 내 이익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되게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31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담대히 외쳤던 거예요. 바울 사도는 이렇게 날마다 순간마다 죽어짐으로 수많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의 감동적인 모범이 되고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어서요.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 빛나는 영적인 스타가 되신 것처럼이요.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어질 때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진 우리를 주님께서 친히 구원해 주시고요. 높여주시고요. 귀하게 쓰시고요. 크게 영광 거두어 주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불순한 욕망에 대해서 날마다 순간마다 철저히 죽어질 때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께서 기뻐받으시는 복된 여생를 일생토록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탐심에 대해서도 죽어져야 함(골 3:5하)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여기 나오는 ‘탐심’이란 헬라어로 ‘πλεονεξίαν(플레오넥시안)’이라고 해서 문자 그대로 ‘탐욕(greed)’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것은 출애굽기 20:17 하반절의 제10 계명의 마지막에 나오는 “......그의 소나 그의 나귀.......” 등 이웃의 모든 소유를 말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모든 이웃의 소유에 대해서 더 이상 탐심을 부리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의 인간의 공허함이 세상의 정욕이나 명예욕으로도 만족이 안 되니깐요. 마지막으로 물질욕에 빠져들게 되는 거예요. 그리하여 그 물질을 붙잡고 위로를 받고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갈 인생인데 지금까지 먹고 입고 쓰고 즐기고 살았으면 되었지요. 그 이상 바랄 게 뭐가 있겠어요? 더구나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실 때 미련 없이 내어 놓고 바치고 나누고 베풀면서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요? 행복이냐는 거예요? 그것도 가지고 있을 것을 바치고 나누고 베풀면서 살아갈 때 진정으로 의미 있고 보람 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거예요.
유머) 김밥 한줄 나눠먹기 싫어서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지니라!’고 대답한 한 집사님 이야기


 누가복음 12:15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분명히 경고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지난 날 우리의 마음 속에 탐심이 생겨서요. 언젠가는 다 버리고 떠나야 할 그 물질이 그토록 아까워서 헌금도 못하고요. 구제도 못하고요. 봉사도 못하고요. 선교도 못했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탐심이에요? 다 물리쳐야 한다는 거예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고요. 사람의 성공이 그 물질의 넉넉한 데 있지 않고요. 사람의 행복이 그 쌓아둔 것의 넉넉한 데 있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예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베풀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케빈 제다이 목사님의 책 「초자연적 재정 이야기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코로나19로 인해 다 어렵고 힘들어도요. 모든 탐심을 물리치고요. 주님께서 쓰시겠다 하면 언제든지 기쁨으로 바치고 나누고 베품으로써 이 땅에 사는 동안 선한 청지기의 사명을 잘 감당해서요. 여생도 복되고 자손도 잘 되고 영원히 주님의 축복이 이어지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Miracle for Africa(아프리카를 위한 기적)’ 선교재단을 세우며 평생을 헌신한 백영심 선교사 이야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연약한 여인인 백 선교사님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말도 없이 이렇게 의미 있고 보람 되고 복된 여생을 살아왔는데요. 우리는 아직도 탐욕에 사로 잡혀서 살다가 인생을 끝내버린다면 이보다 불행하고 불쌍한 인생이 어디에 있어요? 이제라도 남은 여생 음란과 악한 정욕에 대해서 죽어지고요. 부정과 사욕에 대해서도 죽어지고요. 탐심에 대해서도 죽어질 때 우리가 하늘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지 않으며 진정으로 자손 대대로 영원히 복되게 살다가 주님께 큰 영광 돌리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