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복음화(49) 


이렇게 제물을 드려라   (레위기1:3, 2:1, 3:1, 4:3,5:16 )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재림을 준비하는 구주강림절 셋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코로나19의 2.5단계의 방역지침에 의해 이 2,500명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예배당 안에 20명밖에 들어올 수 없는 환난과 핍박의 서글픈 현실 속에서도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통해 우리의 예배를 어떻게 드리고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함
레위기 1: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여기 나오는 번제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5대 제사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하며 모든 제사의 대표로서 첫 번째로 나오는데요. 번제는 히브리어로 ‘הלָעֹ(올라)’라고 해서요. ‘올라간다’는 의미인데요. 희생 제물을 전부 불로 태워서 그 향기가 ‘하나님께 올라간다’(삿 13:20)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요. 영어로 ‘Burnt offering’이라고 하는 것은 불로 완전히 태워진다고 해서요. 번제는 한자어로 ‘불사를 번(燔)’, ‘제사 제(祭)’를 사용하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완전한 희생의 제물로 드리셨던 것을 상징하고 있는 거예요(히 10:14). 다시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헌신을 이룰 것을 보여주셨던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12: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명령하신 거예요. 그런데 이 말씀은 적어도 세 가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요. 가장 먼저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그냥 형식적이고 습관적으로 드리지 말고요. 헌신의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구약시대에는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죽은 제물로 제사를 드렸다면요. 이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헌신의 산 제물로 드려져야 한다는 거예요. 더 나아가 마지막으로는 교회 안에서만 예배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요. 매일 드려지는 번제처럼 교회 밖으로 나아가 세상 가운데서도 거룩한 산 제물로 헌신의 삶을 살아가라고 명령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갖가지 중한 질병이나 직장 사정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한다면 주님께서도 다 이해하시겠지만요. 나 자신의 편안이나 안일이나 코로나19의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주위의 환난이나 핍박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어요? 때로는 우리 자신의 물질이나 명예나 건강이나 세상의 것의 손해를 볼까봐 온전한 헌신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이 있어요? 그것은 진정한 예배나 헌신의 삶이 아닌 거예요. 진정한 헌신의 삶이란 주님의 살아계심부터 확실히 믿고요. 지금까지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과 행복에 감사하고 감격하면서요.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찬송가 336장을 부르면서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생명까지도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실 때 드려질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러한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신의 예배와 봉사와 충성을 다 기뻐 받아주시고요. 우리의 남은 여생에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한없는 축복을 내려주시고 행복의 감격 속에 살아가게 해주실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함
레위기 2: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   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여기 ‘소제’라고 하는 것은 5대 제사 중 유일하게 곡물로 드리는 제사로서요. 히브리어로 ‘החָנְמִ(미느하)’라고 하는데요. 원래는 ‘선물’이란 뜻인데요. 영어로는 Grain offering(곡물 예물)이라고 하고요. 한자로 ‘흴 소(素)’, ‘제사 제(祭)’라고 하여서요. ‘흰 가루로 된 곡물의 예물’을 가리키는 거였어요. 그리하여 소제는 매일 드리는 번제에 동반되어 감사의 마음이 생길 때 드려지는 거였어요(수 2:23, 29, 삿 13:19, 23, 왕상 8:64, 왕하 16:13, 15). 그래서 소제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과 더불어 감사의 의미가 담겨져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이 소제는 십자가의 헌신에 의해 감사의 제물이 되셨던 예수님을 상징하였던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예배를 드릴 때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드려야 하고요. 모든 삶도 주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의 또 하나의 문제는 말로는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요. 모든 것에 감사한다고 하면서도요. 매사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요. 입만 열면 불평하고 원망하고요. 험담하고 비방하고요. 고소하고 고발하고요. 저런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천인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이 있어요? 다 ‘고소하는 자’, ‘참소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사탄의 도구로 전략해 버린 사람들인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에베소서 5:19-21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분명히 증거하시지 않아요?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성령님의 충만함을 회복하면요. 성령충만함의 증거로서 첫째는 찬양의 기쁨이 넘치고요.  둘째는 감사의 행복이 넘치고요. 셋째는 섬김의 복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거예요.
예화) 전 세계 132개국 1억 4천만 시청자를 웃기고 울리는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라는 명사회자 이야기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아버지와의 재회로 신앙인으로 변화된 후 날마다 ‘감사 일기’를 적는 습관
여러분, 우리의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볼 때 감사의 제목들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무엇보다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감사하고요. 이 은혜롭고 행복한 치유하는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해요?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감사는 건강할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병들었을 때도 감사하고요. 즐거울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슬플 때도 감사하고요. 행복할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할 때도 감사하고요. 형통할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때도 감사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코로나19가 공격해오고요. 경제적으로 힘들어지고요. 불화와 갈등이 더욱 생겨나고요. 우울증으로 죽고 싶은 자살 충동을 느껴도요.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될 때 거기서부터 행복이 새롭게 싹트고요.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리고요. 건강이 놀랍게 회복되고요. 기적적인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화목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함
레위기 3:1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여기 나오는 ‘화목제’는 히브리어로 ‘םימִלָשְׁ(쉘라밈)’이라고 해서요. ‘화목’, ‘평화’라는 뜻의 ‘םלשַָׁ(솰롬)’이란 명사에서 파생되었어요. 그래서 화목제를 영어로 ‘Followship offering(교제의 제물)’이라고 하고요. 한자어로는 ‘화목할 화(和)’, ‘화목할 목(睦)’, ‘제사 제(祭)’자를 쓰는 거예요. 사실 이 화목제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사는 아니에요.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 된 인간의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상징함으로써요. 예수님의 화목의 제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평화와 화목의 교제를 회복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며 화목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거예요. 진정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예배를 드려야 하고요. 더 나아가서 남은 여생 어떻게 화목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고린도후서 5:18-19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증거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와 화목하시고요. 우리에게 화목해야 하는 직분을 주셨고요.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기 때문에요. 우리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세상 어디서나 세상에서나 어느 곳에 가든지 화목하게 하는 자(Peacemaker)로 살아가야 해요. 그래서 그 사람이 보고 싶고요. 그리워지고요. 만나고 싶어져야 해요. 그런데 그 목사님, 그 장로님, 그 권사님, 그 집사님, 그 교인을 생각만 해도 머리 골치가 아프고요. 피하고 싶고요. 그 곁을 떠나고 싶다면요. 그 사람은 절대 예수님을 바로 믿는 사람이 아니고요. 하나님의 자녀도 아닐 뿐만 아니라요. 문제를 일으키는 자(Troublemaker)일 뿐이예요. 평생 신앙생활을 해놓고도요. 그렇게 인생을 살다가 끝내면요. 누가 그런 교인을 좋아하겠어요? 누가 그 사람의 장례식에 오겠느냐는 거예요. 절대적으로 인생을 바로 산 사람이 아니고요. 신앙생활도 바로 한 사람이 아니예요. 그러므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라도 마지막으로 돌이켜서요. 모두를 화목하게 하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해요. 그리할 때 마태복음 5:9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는 말씀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는 복을 누리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속죄의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함
레위기 4: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먼저 나온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가 모두 자원제였다면 여기 ‘속죄제’는 의무제로서요. 히브리어로 ‘תאָטָּחַ(핫타트)’라고 해서요. 영어로 ‘Sin offering’이라고 하고요. 한자로 ‘속죄할 속(贖)’, ‘허물 죄(罪)’, ‘제사 제(祭)’라고 해요. 이 속죄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속죄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가장 강력하게 상징하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의 제물로서 우리의 인생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원인인 우리의 모든 죄악과 상처와 질병을 대신 져 주시기 때문에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모든 죄악의 용서와 상처의 치유와 질병의 치료를 체험해야 하고요. 남은 여생을 주님의 속죄의 은혜를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거예요.
예화)우리 치유하는교회에서 파송한 인도네시아 박흥신 선교사님 이야기-무슬림 선교에서 나타난 기적들로 무슬림의 회개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오늘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속죄의 주님께 예배 드리고 찬양하며 영광 돌려야 할 교회는 코로나19가 두려워서 못 모이고요. 교인들은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못 믿고 못 나오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속죄의 주님을 분명히 체험했다면 이 치유의 복음을 전하든지, 선교사님을 보내든지, 아니면 우리가 가든지 셋 중 하나는 해야 진정으로 속죄의 주님을 체험한 성도이지 그렇지 않는다면 다 가짜 신자요,
종교인일 뿐이요,   교회를 왔다갔다 하는 사람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의 죄악과 상처와 질병에 대한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감사하고 감격하면서요. 바울사도가 사도행전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증거하였듯이요. 목숨을 걸고 속죄의 주님을 증거할 때 일생토록 주님의 은혜와 평강과 축복에 감격하며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5.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함
레위기 5:16 “성물에 대한 잘못을 보상하되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   장은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속건제는 히브리어로 ‘םשָׁׁאָהָ(하야샴)’이라고 해서요. 영어로는 ‘Guilt offering(죄책감의 제물)’이라고 하는데요. 속건제는 한자로는 ‘속죄할 속(贖)’, ‘허물 건(愆)’, ‘제사 제(祭)’에요. 그런데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가 있다면요. 속죄제가 우리가 알고 범한 죄를 위해 드리는 제사라면요. 속건제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부지 중에 범한 죄를 위해 드리는 제사였어요. 더 나아가 속죄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라면요. 속건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저질러지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였어요. 그래서 속죄제는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림으로 용서를 받았다면요. 속건제는 속죄제와 함께 사람에 대한 보상까지를 포함하고 있었음을 주목해야 해요.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영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데요. 속죄제가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의 회복이라면 속건제는 사람들과의 횡적인 관계의 회복을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믿음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면 사람들과의 사랑의 관계도 기필코 회복해야 하는 거예요.


삭개오도 회개하였을 때 예수님만 그의 집으로 영접한 것이 아니라요. 누가복음 19:8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고 삶의 변화를 선언하고 실천했던 거예요. 이렇게 삭개오가 그의 삶 가운데 사랑의 열매를 맺었을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고 선포하셨던 거예요.

예화)여자 탁구 세계챔피언이었던 핑퐁선교사인 양영자 선교사님의 이야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세 마지막 때 우리는 또 다시 구주강림절을 맞이하면서요. 우리의 남은 여생 하나님께 어떠한 제사를 드리며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가 형식과 습관에 의한 예배나 신앙생활이 아니라요. 우리가 성령님의 임재를 뜨겁게 느끼는 살아있는 예배부터 시작해서요. 온전한 헌신의 삶부터 살고요.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고요. 화목하게 하는 삶을 살고요. 속죄의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요.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의 남은 여생 진정한 제사, 즉 영적인 예배를 드림으로써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우리의 여생과 자손 대대로 믿음의 복을 누리면서요. 의미 있고 보람되고 복되게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