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모범(28)            (2021.7.11.)

마지막 날을 기억하라 (사사기16:23-31)


예화) 미국 플로리다주 아파트 붕괴사고, 살인폭염, 군용기 추락 사건, “Memento Mori(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그래서 지난 주일에 지혜의 말씀인 탈무드에서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은 항상 남에게서 배우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요. 저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여서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사람은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이다”고 외치고 싶어요. 우리가 오늘 당장 죽는다고 생각하면 세상 욕심을 부릴 것이 뭐가 있고요? 나 자신의 감정을 앞세울 것이 뭐가 있고요? 육신을 따라 살 것이 뭐가 있겠느냐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너무나 살아 있어서요. 죽음을 다 잊어버리고 살아간다는데 있어요. 그렇게 자기가 너무 살아 있으니 이제는 하나님도 눈에 안 보이고요. 교회도 안 보이고요. 신앙도 안 들어오는 거예요. 오직 자신의 이익, 명예, 감정, 인간관계에 매여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리는 사람들이 이 땅 위에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제6대 대사사였던 삼손은 한때 세상에 빠져 살다가요.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나고 떠나가요. 그래서 그의 짧은 생애의 신앙의 위대함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렇다면 삼손이 어떻게 마지막 날의 기억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리는 여생을 살게 되었는가를 보면서요. 우리의 남은 여생도 어떻게 마지막 날을 기억하며 맞이할 것인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마지막 날처럼 통회자복해야 함
  먼저 본문 28절 상반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삼손은 히브리어로 ‘ןוֹשׁ֛מְשִׁ(쉬므숀)’이라고 해서 원래 ‘작은 태양’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듯이요. 어두운 사사시대에 작은 해와 같이 빛을 발하는 자로 태어나서요. 여호와의 권능의 영이 4번이나 임할 정도로(삿 13:25, 14:6, 14:19, 15:14) 강한 힘을 가졌고요.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구원하는 사사로서의 봉사의 사명이 주어졌었어요. 그래서 그는 원래 임신될 수 없었으나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어머니에게 나타나서요. 아들을 낳으리니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요. 그를 낳으면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할 정도로요. 그는 다른 나실인들과 달리 태에서 나오기 전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었어요. 그런데 이 삼손이 딤나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딸을 보고요. 그의 아내로 삼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자 그의 부모는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을 아내로 맞으려 하느냐”하고 반대했지만요. 결국 결혼을 강행하였던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을 치기 위한 전략이었던 거예요. 그 근거는 사사기 14:4에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   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고 증거하였던 거예요. 그래서 그 후 장인이 그 아내를 삼손의 친구에게 주었던 거예요. 그리하여 이스라엘 대사사로 20년 동안 블레셋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줘요. 그런데 삼손의 결정적인 실패는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한 것이었어요. 그동안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 받던 삼손의 몰락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돼요. 그때 삼손을 노리던 블레셋의 통치자들이 들릴라를 은 1,100세겔씩을 주겠다고 하면서 매수해요. 블레셋의 5대 도시 통치자들이었으니까 총 5,500세겔이었는데요. 당시 노예 한 사람 몸값이 은 20-30세겔 정도였다면 얼마나 큰 돈이지 알 수가 있지요? 1세겔은 약 11.42g이었으니까 은으로 총 61.71kg(현 시가 6,800만 원)에 해당되는 당시에는 거액이었던 거예요. 결국 매수를 당한 들릴라의 네 번에 걸친 애끓는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요. 그의 거대한 힘의 근원이 모태에서부터 나실인으로서 머리카락에 있음을 알려주고 말아요. 그러자 들릴라는 삼손에게 독주를 먹여 잠들게 하고요. 블레셋 사람들을 불러서요. 삼손의 일곱 가닥으로 땋은 머리카락을 다 밀어서요. 삼손이 깨어나 보니 힘이 다 빠져 있는 거예요. 결국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가서요. 두 눈이 다 뽑히고요. 놋 줄에 매여서요.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치욕적인 삶을 살게 된 거예요. 더욱이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는 다곤 신전에 모여서요. 그들의 다곤신의 원수 삼손을 그들에게 넘겨주셨다고 축제를 벌이고 있을 때에 삼손이 그곳에 끌려가서요. 재주를 부리게 했어요. 여기 ‘재주를 부리다’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קחֶשַֽׂ(사하크)’라고 해서요. 무대에서 노래하며 춤 추며 뛰노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흔히 노예들이 손님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를 말했어요. 이처럼 힘도 하나 못 쓰는 ‘천하장사’라고 조롱거리가 되었을 때, 삼손이 그의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니까 얼마나 비참했겠어요? 그때 삼손이 깨닫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셨고요? 그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요? 그 놀라운 기적적인 힘의 축복을 부어주셨는데요. 그 크신 사랑을 저버리고요. 그 크신 은혜를 잊어버리고요. 그 크신 축복을 헛되게 썼던 것을 통회자복하면서요.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한 번만 생각해 주시옵소서!......”하고 울부짖었던 거예요. 여기 ‘생각하옵소서’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ינִרֵ֣כְזָ(자케레니)’라고 해서 ‘remember(기억하옵소서)’라고 울부짖은 거예요. 다시 한번 그를 기억해 주시고요. 용서해 주시고요. 불쌍히 여겨주시길 통회 자복하며 간구했던 거예요. 우리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흔히들 가장 쉽게 빠지는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이 정도 신앙생활을 하면 된다는 방심이 싹트고요. 오랜 신앙생활로 인해서 타성에 빠지고요. 더 나아가 내가 신앙생활을 가장 잘하고 있다는 교만에 빠져 있는 거예요. 이것이 말세 마지막 때 사탄의 큰 시험이에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요. 은혜가 메말라 가고요. 축복이 사라져 가고요. 행복을 다 잃어버리고 마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만 그 시험에 빠진 것을 깨닫지 못하고요. 자신만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줄로 착각을 하고요.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선 줄로 착각을 하고요. 주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교인들을 위한 것으로 착각에 빠지고 마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의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인 거예요. 그래서 성경 말씀대로 헌신적인 믿음으로 살고요. 깨어있는 소망가운데 살고요. 모든 허물을 덮는 사랑으로 살고 있느냐는 거예요. 그래도 분별이 안 되면 주의 종들 누구를 붙잡고든지 물어보세요. 그 사람에 대해서 다 똑같은 영적인 판단을 한다는 것이 놀라운 사실이에요. 그것도 안 믿어지면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교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영적인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이나 집사님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러면 답이 더욱 확실히 나올 거예요. 그것도 안 믿어지면 여러분의 가장 가까이서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지켜보는 아내나 자녀들에게 물어보세요. 답은 더욱더 확실하게 나오게 될 거예요. 이처럼 신앙의 교만에 빠진 대표적인 인물을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에게서 발견하게 돼요.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면서요.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믿는 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신앙생활을 가지고요. 세리와 비교까지 해가면서요. 자신의 의로움을 마음껏 과시를 하는 것을 보세요. 이 얼마나 영적 교만에 빠진 불의한 자예요?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도 보면 자신에게 더 심각한 문제가 많은 교인들일수록 남을 그렇게 험담하고 비방을 해요. 그래서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 봐도 한 손가락은 하나님께 원망하고요. 한 손가락은 남을 비난하지만요. 나머지 세 손가락은 다 내 탓이다고 깨우쳐주지 않아요?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세리를 보세요. 멀리 서서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요. 다만 가슴을 치면서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통회자복을 해요(눅 18:13). 이 얼마나 겸손하고 감동적인 모습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의로운 줄 착각하는 저 바리새인을 의롭다고 하신 것이 결코 아니라요. 가슴을 치며 통회자복한 세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사실이에요. 그런데도 많은 때 우리는 삶의 문제 앞에서 다 남의 탓만 하다가요. 문제의 원인도 찾지 못하고요.      해결책도 찾지 못하고요. 평생토록 스스로 불행과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거예요. 이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이에요?
예화) 암으로 투병하는 부인의 고통이 “다 내 탓이다!”고 통회 자복한 남편 집사님의 이야기


그러므로 우리도 이 세상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세상을 떠날지 아무도 모르지만요. 살아 있는 동안 마지막 날이 너무도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확실히 깨닫고요. 얼마 남지 않은 남은 여생이라도 자신만 의로운 것처럼 여기는 위선과 가식의 가면을 다 벗어버리고요.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엎드려서요. 철저히 통회자복부터 해야 하는 거예요. 그리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지난 날의 모든 죄악을 용서함을 받고요. 남은 여생을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으면서요. 천국의 은혜롭고 행복하고 축복된 삶을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마지막 날처럼 소원을 아뢰야 함
  계속해서 본문 28절 하반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 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블레셋 사람들이 두 눈이 다 빠져서 힘을 다 잃은 삼손을 불러다가요. 재주를 부리게 하고요. 삼손을 다곤 신전의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요. 삼손이 피곤한 척하면서요. 자기 손을 붙들고 인도해준 소년에게 이 신전 위 지붕을 버티는 중앙 기둥을 찾아 기대게 해달라고해요. 그 신전에는 블레셋의 모든 통치자들도 있고요. 지붕에는 남녀가 3,000명가량이 있었어요. 그래서 삼손은 자신의 “두 눈을 빼고 재주를 부리게 하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시옵소서!”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했던 거예요. 삼손의 마지막 간절한 소원의 간구였던 거예요. 우리도 점점 죽음의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요. 얼마 남지 않은 남은 여생 마지막 날인 것처럼 날마다 간절한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해요. 그것은 가장 가까운 사랑하는 가족들부터 시작해서요. 친척, 친구, 이웃,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와 민족과 열방에 이르기까지요. 모두 다 구원 받고요. 영육간에 치유 받고요. 주님의 제자로 양육 받아서요. 모두 다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마지막 때 사명을 잘 감당하다가요. 우리의 사명을 다 마쳤을 때 주무시듯이 평안하게 떠나가는 거예요.
예화) 브로니 웨어(Bronnie Ware)의「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책 이야기


우리가 다 할 수 있었고요. 우리가 다 행복해질 수 있었는데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의 너무도 쉬운 행복들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거예요. 그래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모두들 불행하고 고통 가운데 떠나갔던 거예요. 우리의 남은 여생의 마지막으로 가져야 할 간절한 소원이 잠언 30:7-9에 나와 있어요.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고 분명히 증거하지 않아요? 우리의 마지막 기도제목이 있다면 먼저 주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고요. 더 나아가 모든 것에 감사하고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행복하고 축복되게 살아가는 거예요.
예화) 예배 신앙 회복을 위해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더욱 좋은 조건의 직장으로 인도하여 주신 백승혁 집사님의 이야기


광야생활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시고요. 세상적이고 인간적이고 육신적으로 의지했던 것들을 모두 다 끊게 하시고요. 철저히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요. 하나님께 다 맡기는 신앙으로 매어 달리게 하셔서요. 간절히 부르짖었더니 기적적으로 응답해 주셨다고 감격해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6:33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분명히 약속하시지 않아요? 그러므로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마음의 간절한 소원을 아뢸 때 우리 모두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날마다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 살다가요.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를 부르셔도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마지막 날처럼 힘을 쏟아야 함 

  마지막으로 본문 30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삼손은 그때가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음을 느꼈어요. 이렇게 두 눈을 다 잃고요. 이방 신전에서 재주나 부리는 노리갯감을 살기보다는요. 마지막 힘을 다 쏟아서요. 불의한 우상숭배자들을 다 멸하고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만이 그동안 자신에게 쏟아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에 보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확신하고요. 하나님께 마지막 소원을 아뢴대로요. 그 다곤 신전에 4기둥이 있었는데요. 가운데 두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끌어안고요. 그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힘을 다 쏟아부어서요. 몸을 굽히면서 힘 있게 밀어 붙였더니요. 거대한 신전이 무너지면서요. 거기에 모였던 남녀 3,000명을 한꺼번에 몰살시켰는데요. 삼손이 살아 있을 때 딤나에서 30명을 죽이고요(삿 14:19). 처가에 갔을 때 수백 명을 죽이고요(삿 15:8). 레히에 있을 때 나귀의 턱뼈로 1,000명을 죽였지만요(삿 15:15). 그가 살아생전에 죽였던 2,000명에 가까운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3,000명을 한꺼번에 죽였던 거예요. 그리하여 삼손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거예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에도 우리는 많은 때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주님 앞에 나올 믿음을 잃어버리고요. 기도할 힘을 잃어버리고요.  사랑할 마음도 잃어버리고 살아가요. 그러나 우리의 생의 마지막이 찾아왔다면 여러분은 마지막으로 무슨 일에 혼신의 힘을 다 쏟으시겠어요? 마지막으로 예배드리고요. 마지막으로 기도드리고요. 마지막으로 사랑하고요. 마지막으로 복음 전하고요.


마지막으로 구제하고요. 마지막으로 봉사하고요. 마지막으로 주님의 일에 힘쓰다가 주님의 곁으로 떠나가야 하지 않겠어요? 더 나아가 영적 싸움의 순례자의 길을 갈 때에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요. 하나님의 편에 서서 영적 싸움을 다 하다가요. 기필코 불의한 자들을 다 물리치고요. 하나님 앞에 서야 우리의 일생의 마무리를 잘 하고요. 여러분이 떠나신 다음에도 모두 다 여러분의 노고를 인정하고요. 감사하면서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거예요. 지금 온 세상은 말세 마지막 때가 되어서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는 말씀처럼 정부는 코로나19 방역이라는 미명 아래 정작 감염의 온상지인 젊은이들이 모이는 술집 등 단속은 안 하고요. 코로나19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인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교회를 탄압하고 있고요. 인간이 무엇이관대 비대면으로 예배 보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거예요? 더 나아가 차별금지법이라는 허울 아래 동성애자를 인정하는 입법까지 서두르고 있어요.
예화) 로스앤젤레스에서 벌어진 성전환 여성 고객의 지지측과 반대측의 충돌 사건


이번에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이 통과되고 나면 이러한 일이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일이예요. 우리 자녀들이 동성애에 빠지고요. 동성애자들과 결혼한다고 해도 막을 길이 없어지고요. 더 나아가 우리 기독교의 복음만이 진리라고 외칠 수 없는 시대가 오고 마는 거예요. 복음을 믿는 외치는 자들에게 벌금형과 징역형이 가해지는 시대가 임박해지고 있음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고요. 영적 분별력을 갖지 않고요. 영적 싸움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예화) 한 교회에 숨어들어 분란을 일으킨 신천지 여전도사의 이야기


그때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요. 영적 싸움을 안 했다면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되었겠어요? 그래서 오늘 우리 교회는 교회학교까지 신천지 이단 이만희 교주의 엄벌을 탄원하는 서명을 하는데요. 우리가 때로는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적 싸움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아야 하는 거예요. 그리할 때 고린도전서 15:57-58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시지 않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 날이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 쏟아 헌신, 봉사, 충성을 다하며 영적 싸움에 끝까지 임하게 될 때 우리의 수고가 결단코 헛되지 않아서요. 영적 싸움에 기필코 승리케 하실 뿐만 아니라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하늘의 상과 이 땅의 복으로 우리의 여생과 자녀들에 이르기까지 천배나 만 배나 다 갚아주실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생의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신 김병호 부목사님, 윤대원 장로님, 방일수 안수집사님, 한재호 장로님 이야기 그런데 그분들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다들 잘 마치시고요. 이제는 다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가시고요. 저만 이렇게 남아 있는 것 같아서요. 죄송스러운 마음뿐이에요. 그래서 저도 그분들처럼 목숨 바쳐 목회하다가요.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미련 없이 떠나가겠다는 각오로 목회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오늘의 우리 치유하는교회가 있기까지 희생하신 순교적 신앙으로 사신 분들의 노고를 우리가 결단코 잊지 말고요. 우리의 남은 여생의 신앙의 모범으로 삼아서요. 우리도 머지않아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 텐데요. 우리 모두 다 마지막 날을 기억하면서요. 오늘이 마지막 날처럼 나 자신부터 철저히 통회 자복을 하고요. 오늘이 마지막 날처럼 하나님께 간절한 소원을 아뢰고요. 오늘이 마지막 날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남은 혼신의 힘을 다 쏟을 때에 우리의 여생이 진정으로 귀하게 쓰임 받으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려드리는 복된 여생이 모두 다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