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모범(30)            (2021.7.25.)

하나님의 부르심 (사무엘상3:1-14)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셔서요. 그의 뜻을 밝혀 주시고요. 귀하게 사용하셨어요. 오늘 본문 가운데 우리가 너무도 잘 알듯이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들으심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귀하게 쓰임 받은 사무엘 선지자가 나와요. 그렇다면 사무엘 선지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는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성전에 머물러야 함
  먼저 본문 3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하나님께 나실인 즉 구별된 자로 바쳐진 사무엘은 어머니인 한나의 젖을 뗀 후에 하나님께 바쳐져요.
그래서 그는 어릴 적부터 하나님의 법궤가 놓인 성소에서 자라나서요. 그가 아이가 되었는데요. 히브리어로 ‘아이’ 즉 ‘רעַנַּ֧(나아르)’라고 해서 단어는 유년에서 40세 장년을 일컬어서요. 구약성경 가운데 ‘아이’, ‘소년’, ‘청년’ 등으로 번역되었는데요.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이때의 사무엘의 나이가 12살이었다고 해요(Josephus. Ant. v, 10:4). 12살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의 아들’로 부르고요. 예수님처럼 처음으로 성전에 올라가는 나이였어요(눅 2:42). 그런데 그는 마지막 사사였던 엘리 대제사장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자라났어요. 그래서 어린 아이인데도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을 입었어요(2:19). 그런데 엘리 대제사장이 어느덧 98세가 되어 많이 늙게 되니깐요(4:15). 영적으로 쇠퇴해짐으로 인해 그에게 임하는 여호와의 말씀이 드물어지고요. 영적인 비전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육신의 눈도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니깐요. 성소에서 멀지 않은 대제사장 사택에서 누워있었어요. 더구나 엘리 대제사장이 이처럼 영적으로 침체되니깐요. 대제사장의 아들들이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했어요. 제사의 삶은 고기를 함부로 취하고요. 날 것도 억지로 빼앗아가면서요(삼상 2:12-17).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였고요. 심지어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까지 하면서요. 큰 악행을 저지르는 소문이 모든 백성에게까지 터진 거예요(삼상 2:22-23). 그러니 사무엘은 엘리 대제사장의 아들들과 얼마나 큰 비교가 돼요?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성막에는 일곱 개의 등잔대의 불이 켜졌는데요. 감람유로 초저녁에 켜서 밤에 그대로 켜두었다가 새벽에 껐으니깐요(출 25:31-37, 27:20-21, 30:7-8). 이 때가 깊은 밤이었다고 여겨져요.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지성소 앞에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헌신자들이 머무는 숙소가 있었는데요. 사무엘은 성소를 떠나지 않고 거기서 머물면서 살았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첫걸음이 되었던 거예요.  말세 마지막 때일수록 무교회주의자, 자유주의자, 세속주의자, 인본주의자인 목사나 교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를 강조하면서요. 성전된 우리의 몸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예배를 드려도 된다고 주장을 해요. 그러나 고린도전서 3:16과 6:19-20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서 어디서나 비대면 예배를 보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당시 고린도교회는 파당문제(3장), 음행문제(5장), 고소문제(6장), 결혼문제(7장), 우상제물문제(8, 10장), 성만찬문제(11장), 성령의 은사문제(12-14장), 부활문제(15장) 등으로 인해서 끊임없이 다툼과 분쟁의 문제가 터져 나왔어요. “그래 가지고 너희가 어떻게 믿는 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면서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너희가 거룩한 성령님을 모신 성전이 아니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핏값으로 산 성전이 되었으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라!”고 강조하셨지요. 언제 어디서나 예배 드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최초의 하나님의 전인 성막을 허락하시기 이전에는 어디서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지만요. 하나님께서는 성막이나 성전이나 회당이나 교회를 세워주신 이후에는 늘 하나님의 전을 강조하셨던 거예요. 오죽하면 제2의 율법이라 하는 신명기에 “택하신 곳에 가서 제사를 드리라”고 17번이나 강조하셨겠어요? 이처럼 신, 구약 성경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를 강조하셨는데요. 더욱이 말세의 마지막 때가 되면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는 경고의 말씀과 같이 되어서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모이지 않게 될 것을 살아계신 주님께서는 미리 다 아시고요.


히브리서 10:23-25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   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더욱 더 강조하셨던 거예요. 그렇다면 말세 마지막 때일수록 우리가 안팎의 온갖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왜 성전에 열심히 모여야 하느냐는 거예요. 성전장인 시편 84:4-5에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고 분명히 약속 하시면서요. 우리가 성전에 나아올 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찬양 가운데 영육간에 새 힘을 얻고요. 복을 누리게 될 것을 분명히 약속하세요.


더 나아가 계속해서 10-11절에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 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고 확실하게 약속하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복의 근원 되시는 살아계신 아버지의 말씀대로만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 드리면 우리가 애쓰고 수고하는 것과는 비교할 것이 없이 틀림없이 은혜 받고 축복을 누리는 행복한 여생을 분명히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세계 어느 자유민주국가에서도 유례가 없는 벌금형과 폐쇄형의 삼엄한 경고 속에서 성전예배가 극심한 탄압을 받고 있어요. 오죽하면 지난 주일 강원대학교 법률전문대학원 김학성 교수님이 정부의 성전예배 금지는 법률적으로 볼 때도 ‘피해의 최소성’에 하자가 있다고 지적했어요. 교회에서 확진자가 나왔다고 해서 전국의 교회들에게 성전예배를 금지하는 것은 마치 화곡동의 스타벅스 카페에서 확진자가 나왔다고 전국의 스타벅스 카페의 문을 닫고요. 손님을 20명 미만만 받으라는 것과 똑같다는 거예요. 교회에서 확진자가 나오면 그 교회의 문만 닫도록 조치를 내리면 되지요. 한국교회의 전체의 문을 닫게 하는 것은 ‘피해의 최소성’에 위배되고요. 명백한 신앙의 자유의 핍박인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버스나 지하철은 20명 미만의 제한을 두지 않고요.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백화점이나 식당이나 카페조차도 20명 미만의 제한을 두지 않고요. 4인까지만 모여 앉도록 제한을 두고 있는데요. 교회도 4인씩 앉게 하면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하나님의 교회의 예배만 20명 미만으로 제약하고 성전예배를 못 드리게 하느냐는 거예요? 그 영적 배경에는 모든 세상의 병의 치료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치료를 막으려는 명백한 사탄의 역사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예배를 막는다고 코로나19의 감염자 수가 줄어들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치료하시지 않으면 코로나19를 이겨낼 길이 없는 거예요. 그래도 우리 치유하는교회 믿음의 성도들은 지난 주일에도 정부의 지침을 따라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예배를 드렸는데요. 한 원로장로님이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시면서 “6.25전쟁 때 공산당에 의해 교회의 문이 닫히고 예배가 금지된 이후 자유민주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이런 예배의 탄압을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탄하시면서요. 통탄할 만한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하시면서 국민들의 절반 이상이 정권 교체를 원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경고하시는 거였어요. 그런데 전전주 금요일 심야기도회 때 한 권사님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요. 주차장에서라도 기도하러 나왔다고 하여서 너무도 감격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요. 지난 주일에는 한 권사님이 예배를 드리고 가면서요. 이런 감동적인 글을 보내왔어요.

예화) 예배 드린 한 권사님과 집사님의 감동적인 글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 나올 때마다 이러한 놀라운 감격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오고요. 그의 전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찬양 속에 성령 충만하게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와 축복과 행복의 감격이 일생토록 차고 넘치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함
  계속해서 본문 8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사무엘은 “사무엘아!, 사무엘아!”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엘리 대제사장의 소리로 착각을 하였어요. 왜냐하면 그가 처음 들어보는 하나님의 음성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세 번이나 되풀이하여 엘리 대제사장을 찾아가서요. “제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응답했던 거예요. 그러자 엘리 대제사장은 사무엘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줄을 깨닫게 된 거예요. 그래서 “가서 누웠다가 여호와께서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하고 대답하라고 가르쳐 줘요. 그리하여 사무엘은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들을 수 있게 돼요. 말세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을 수없이 들려주세요. 가장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든지 읽든지 묵상하는 가운데도 들려 주시지만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의 삶의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기도 하고요. 그래도 듣지 못하면 심지어는 사고나 사건을 통해서까지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세요.
예화) 로렌스 형제가 쓴 「하나님의 임재 연습」


  그러므로 우리도 가장 먼저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주일이나 수요밤이나 금요심야나 매일 새벽기도회에 주님의 전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만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 나만의 시간에 주님과 나만의 장소에서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요. 나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듣는 거예요. 그리할 때 얼마나 개인적으로 뜨겁게 임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거예요?
예화) 김명교회의 전 헌법재판관 조대현 장로님 이야기


  여러분, 오래된 주의 종들이나 교인들이 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되는지 아세요? 매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경건의 시간을 갖지 못하니깐요. 그들의 신앙이 점점 석고화가 되고요. 화석화가 되어서요.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린 죽어가는 신앙이 되고 마는 거예요. 그러므로 매일 생명력 있는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모두에게 인정받는 성화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어요. 디모데전서 4:4-5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분명히 증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떠한 예배나 헌신이나 봉사나 충성을 다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고 충만하게 회복되면요. 말씀장인 시편 119:105과 165의 말씀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는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져서요.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요. 우리의 일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영적으로 바로 분별하고요. 매일의 삶 가운데 성령님으로 충만하여서요. 날마다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 복되게 쓰임 받게 될 줄을 확실히 믿습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해야 함
 마지막으로 본문 10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임하셔서요. 성소에 서셔서요.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하고 부르세요. 그 때 사무엘이 엘리 대제사장이 가르쳐준 대로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하고 믿음으로 응답해요. 그러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11-14)고 엘리 대제사장의 집에 대한 계시를 들려줘요. 우리도 지난날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요(출 3:1-4). 사무엘이 성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요(삼상 3:4-10).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듯이요(사 6:8).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을 해야 하는데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을 하였다면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생명까지도 헌신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해요. 그런데 이렇게 목회를 하면서도 보면 우리는 세상의 돈 버는 일에 마음이 뺏겨 영적인 은혜에 관심이 흐려 있고요. 먹는 것에 그토록 관심이 많아 전국의 맛집을 찾아다니고요. 노는 일에 그토록 열심이 많아 놀러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고요. 자신을 멋지게 꾸미고 자랑하는 일에 모두들 중독이 되어가고 있고요. 자신의 명예와 이름을 내는 데 일생을 빠져서 살아가면서요. 우리가 어떻게 주님과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해 헌신과 열정을 쏟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믿음으로 응답하는 기회가 영영 주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오늘이라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 버리면 지금까지 쌓아 놓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요? 지금까지 좇아 살았던 것이 다 어떻게 되고요? 노후 대책까지 세워 놓았던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여러분, 지금 우리는 이번 코로나19를 통해서 세계교회 뿐만 아니라 그토록 충만하게 부흥했던 한국교회까지도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고 말았어요.
예화) 2021년 7월 7일 목회데이터연구소의 통계-코로나19가 끝난 후 교회로 돌아가겠는가?


이처럼 온라인 예배나 보면서 교회에 안 나오고요. 교회도 안돌아온다는데 한국교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여기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우리 부모들 자신부터 지난날의 나태하고 침체된 인본적인 신앙부터 철저히 통회 자복하고요. 성령님의 충만함부터 회복해서요.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헌신하고요.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하고요. 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충성을 다하는 길 밖에 없어요. 이것만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치유하는교회와 한국교회가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길인 거예요. 그러므로 오늘이 마지막 날이듯이 우리 자신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의 헌신으로 결단을 해야 해요. 그리할 때 출애굽기 32:29에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고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하고 헌신하게 될 때 하나님의 약속대로 기필코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되는 거예요. 이처럼 우리가 먼저 영적 모범이 되어야 우리의 자녀들에게까지 영적 감동을 줄 수 있어요.
예화) 목회데이터연구소의 통계 발표-청소년들의 신앙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그런데 요즘 우리 자녀들이 부모님의 말을 안 듣고요. 영적으로 교만해지고요. 세속에 물들어서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을 하지 않고요. 다 자기 주관대로 살아가요. 가정이나 교회나 세상이나 모두 다 그러니 영적 사사시대에 접어들고만 거예요. 그렇다면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겠어요? 다른 어떠한 잔소리나 야단이나 채찍이나 폭력으로도 안 되지만요.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영적 모범이 되어서요. 그들의 일생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 살도록 하기 위해서요. 지난 주일의 그 극심한 성전예배의 통제 속에서도 자녀들과 함께 온 가족이 하나님의 성전에 예배 드리러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요. 얼마나 큰 감동이 되던지요? 부모님의 영적 모범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이 영적으로 바로 성장하고 있는 거였어요. 또 지난 수요밤예배, 금요심야기도회에도 온 가족이 함께 예배 드리러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요. 이보다 더 감동적이고 복된 자녀교육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는 큰 감격이 있었어요. 바로 이러한 가정들의 자녀들에게 장래의 희망이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자녀에게 생선을 구워주지 말고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는 히브리의 속담과 같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요. 헌신하고요. 믿음으로 응답하는 법을 가르쳐 주면요. 그들의 장래는 거기서부터 열려져서요. 우리가 어떠한 물질의 유산을 그들에게 물려주지 않아도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 살아가며 귀하게 쓰임 받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의 헌신의 응답이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요. 세상 어디에 가서나 펼쳐질 때에 우리의 남은 여생과 자손 대대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되게 쓰임 받으며 크게 영광 돌리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이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눈물부터 나와요. 저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회심의 체험 이후에 저의 일생에 단 한번 경험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헌신의 결단이었기 때문이에요. 더욱이 저 자신의 경우는 사실 44년 전 20살의 젊은 나이에 원인 모를 병으로 죽음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세상에 붙잡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사랑하는 부모님도, 형제들도, 그 누구도 저를 살려줄 사람이 없었어요. 이처럼 죽음의 마지막 문턱에 이르렀을 때 주님께서 저를 찾아와 주셨고요. 성령님의 강한 감동 속에 그때 우연히 펼쳐든 로마서 12:1-2의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말씀 앞에서요. 저는 “하나님 아버지, 한번만 살려 주시옵소서! 한번만 살려 주시면 남은 생을 주님과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해서 온전히 바치겠습니다!......“하고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간절히 울부짖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리고 얼마 동안 그토록 부르짖었는지 모르지만 성령님의 불이 임하고요.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살아나서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의 종으로 헌신하고요.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44년의 세월을 기적적으로 생명을 연장시켜 주셔서요.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마른 막대기만도 못하고 썩어가는 구더기만도 못한 저를 이렇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종으로 불러주시고 귀하게 써주시니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이에요? 그러니 오늘도 내일도 아무런 사심도 없이 목숨 걸고 행복하게 목회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느 누구도 이 땅에 천년, 만년 살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오늘이라도 빈 손 들고 다 떠나가야 하는 연약한 인생들이에요.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성전에 머물면서요. 하나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듣고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할 수만 있다면요. 이보다 더 의미 있고 보람 되고 복된 여생이 없는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