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모범(39)
                                 

인생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사무엘상 20:1-4

우리가 명절 연휴를 보내고 나면 늘 아쉬움의 허탈감을 많이 느껴요. 특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승리하지 못했을 때 더욱 더 그러해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지나간 삶의 문제가 무엇이었는가를 돌이켜 보면서요. 우리의 남은 험난한 인생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모든 문제를 대화로 풀어야 함
본문 1절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사울 왕이 사무엘 선지자가 머물던 라마 나욧(처소)에 가서 하루 종일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예언을 하고 있는 동안에 다윗은 라마를 떠나 약 3km 떨어진 기브아(삼상 10:26)에 있던 요나단에게 가요. 성령님의 간섭으로 모두 실패하였지만요. 사무엘 선지자에게 가서 피해 있던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의 계속적인 살해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요. 다윗은 요나단의 도움을 구하려고 기브아로 돌아가서요. 다윗은 모든 문제를 대화로 풀어가길 원해요.
우리도 살아가면서 어떠한 원수와의 관계 속에서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야 해요.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감정이 앞서서 대화의 시도를 안 하기 때문에 오히려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고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가고 문제가 더욱 심각한 상태에 빠지고 말아요. 더구나 우리의 또 하나의 문제는 대화의 시도를 해도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상대방의 소리를 들을려고 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감정만 쏟으려고 하는 데 있어요. 그 근본 이유는 우리가 성격이 급해서도 그렇지만 교만해서 상대방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도 그래요. 상대방을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말을 들어주세요. 공감해 주면서 꼭 들어주세요. 사실 우리가 상대방의 소리를 들어주기만 해도 ‘치유적 경청(Therapeutic listening)’이라고 해서 문제의 50%는 치유를 받는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서 1:20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고 명령하시지 않아요?


우리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다 들어준 다음에 우리의 마음에 있는 사고와 감정과 의지를 표현을 해야 하는데요. 이 표현을 할 때에 에베소서 4:29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강조하시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끼치는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상담학의 대화기술에서 보면 나 진술법(I-statement)을 사용하는 거예요.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의 부부 의사소통(Couple Communications) 프로그램에 보면
(1) 사실: “그게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이렇게 보았어요”
(2) 사고: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요?”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3) 감정: “거기에 대해 어떻게 느껴요?” “나는 이렇게 느껴요”
(4) 소망: “그것이 어떻게 되길 바래요?” “나는 이렇게 되길 바래요”
(5) 행동: “그것을 어떻게 할 거에요?” “나는 이렇게 노력할게요”라고 표현하라는 거예요.
이렇게 나를 주어로 말하면 상대바의 마음이 상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자신의 의사를 다 표현할 수 있어요. 여기에 덧붙여서 ‘미고사축’의 사랑의 천국방언을 해보세요. 미: 미안해요. 고: 고마워요. 사: 사랑해요. 축: 축복해요. 이 네 마디 말만 해도 우리의 사랑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고요. 더 나아가 이 간단한 사랑의 천국방언이 우리의 마음을 다 열게 하고요. 우리의 지난날의 모든 상처도 치유하고요. 결국에는 우리의 모든 관계를 화평케 하는 거예요.
예화) 위임목사님 손자 이야기 “우리 은기, 최고! 사랑해요!” “할비, 사랑해요!”


 이처럼 우리가 먼저 상대방의 소리를 들어주고 상대방의 마음을 들어주고 상대방의 입장을 들어주고 그 다음에 우리의 생각도 말하고 느낌도 말하고 바램도 말해야 하는 거예요. 이처럼 우리가 상대방의 아픔을 속히 듣고 말하기도 더디하고 성내기도 더디하고 기다리면서 대화하면 주님 안에서의 사랑의 대화 가운데 우리의 인생에 못 풀 문제가 없을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긍정적인 믿음을 가져야 함
본문 2절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크고 작은 일을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는 행하지 아니하나니 내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다윗의 질문에 대해서 요나단은 ‘결단코 아니라(הלָילִחָ, 할릴라)’고 강한 부정을 뜻해요. 다윗이 죽지 아니하리라는 거예요. 아버지 사울 왕이 크고 작은 일을 요나단에게 알리지 아니하고는 행하지 아니하리라는 거예요. 더욱이 얼마 전에 사울이 요나단에게 맹세하기를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다윗)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삼상 19:6)고 분명히 약속했기 때문에 사울 왕이 결코 다윗을 죽일 일이 없을 것이라는 거예요.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이 사탄의 역사로 일시적인 광기가 발작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그럴 리가 없다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다윗을 위로해줘요. 우리의 인생도 매사를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보면 낙심과 좌절 가운데 절망과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해요.
예화) 약국을 경영하는 위임목사님 형님 장로님 이야기-교인들이 더 까다로운 이유에 대한 질문


세속적이고 기복적이고 인본적인 종교생활하기 때문이고, 근본적으로 한국교회 목사들이 양떼들을 거짓과 가식과 위선과 독선의 종교인으로 잘못 길러내서 그렇고 또 아무리 강단에서 외쳐도 사탄이 그 치유의 복음의 말씀을 삶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자기 의와 교만과 타성과 침체로 가로막아 버렸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근본 원인은 진정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지난날의 마음의 상처가 치유를 받지 못해서 우리의 매사를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만들어 버려 더 나아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긍정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니까 인생의 불행과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매사에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처럼 매사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람들은 십자가의 주님부터 새롭게 만나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먼저 체험하고 그 사랑으로 어떠한 원수라도 다 용서함으로 지난 날의 상처부터 치유를 받으면 가장 먼저는 마음이 평안해지니깐요. 모든 생각도 긍정적이 되고요. 모든 말이나 행동도 적극적이 되고요. 모든 삶이 희망적이 되고요. 모든 신앙생활도 축복되고 행복해지는 거예요. 그러나 이 모든 세상의 학문이나 심리학이나 상담치료에 이르기까지 사실은 그 원리가 성경에 다 나와 있어요. 성경에서 바로 이 긍정적인 믿음을 수없이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그래서 이번 추석 연휴에도 이렇게 이기적이고 감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가족 친지들로 인해 수많은 상처를 받고 시험에 빠지고 실망해서 돌아왔어도요. 시편 42:5, 11, 43:5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고 3번씩이나 연이어서 강조하시지 않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낙심되고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주님만 바라보고요.  주님만 의지하고요.  주님으로부터 위로받고 새 힘 얻으며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3.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잊어선 안됨
본문 3절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다윗은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 왕의 살해 계획을 왜 모르는지 맹세하며 분명히 밝혀요. 다윗이 요나단에게 은혜를 받은 줄을 사울 왕이 밝히 알고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워서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할 뿐이지요. 사무엘상 18, 19장에서만 해도 그를 8번이나 계속해서 죽일려고 한다는 거예요(삼상 18:11, 25, 19:1, 10, 11, 14, 15, 20). 그래서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요나단의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다윗과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이라고 한 것은 히브리어로 עשַׂפֶּ(페사으)로서 ‘걸음’이라는 뜻의 명사형인데요. 다윗이 한 걸음만 움직여도 사울 왕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 정도로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있음을 밝히고 있는 거예요. 요나단은 다윗의 설명을 듣고 사정이 절박함을 알게 되고 다윗의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요나단이 다윗을 위하여 이루리라고 약속해요. 죽음의 위기를 맞이하여 원수의 아들에게 안타까운 사정을 아뢰는 다윗과 아버지의 뜻을 거스리면서까지 다윗을 도우려는 요나단 사이의 우정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어요. 그리하여 사무엘상 18:13-14에 이어 20:12-16에서 두 번째 사랑의 우정의 언약을 맺게 되요.
우리의 인생이 그러해요. 우리도 너무도 죽음 가까이 살아가요. 우리가 죽음에 깨어있지 못하니까 우리의 신앙이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인본주의에 빠지고 그것마저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데 우리의 인생의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이 죽음에 깨어있을 때 우리는 더욱 신실하고요. 성결하고요. 충만하게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죽어지면 자연스럽게 날마다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 살아갈 수 있어요.
예화) 추석찬양콘서트에 박경옥 사모님 간증- 주님만난 후 치유받고 전세계를 다니며 하나님께 영광돌림


여러분, 그러한 충만한 은혜의 삶의 비결이 어디서 왔을까요? 세상의 부귀, 영화, 권세, 향락을 다 누렸던 다윗 왕은 시편 39:5-7에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고 고백해요.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깨어서 죽음을 대비하고요. 우리 자신이 먼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지는 체험을 하고 날마다 순간마다 죽음이 우리 곁에 너무도 가까이 있음을 결단코 잊지 않고 살아갈 때 우리는 이 땅 위에서의 어떠한 어려움도 주님 주시는 힘으로 능히 다 이겨내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조용기목사님의 목회 일생에 대한 이야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날지 모르지만요. 누구나 한 번은 떠나가야 해요.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인생에 닥쳐오는 수많은 문제들을 대화로 풀어나가고요. 긍정적인 믿음을 갖고요.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결단코 잊지 않고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어떠한 인생의 고난도 다 헤쳐나가며 의미있고 보람되고 복되게 스임 받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