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모범(43)            

복수의 시대(사무엘상 24:1-7)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 다윗은 십광야 수풀 속에서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을 만나 세 번째 서로의 우정과 사랑의 언약(삼상 18:13, 20:16, 23:18)을 하고요. 엔게디 요새로 올라가 머물러요. 그런데 그 엔게디에서 다윗이 사울 왕을 계속 되는 살해 시도에 대해서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수를 하지 않아요. 오늘 본문 가운데 다윗이 사울 왕을 복수하지 않은 이유를 보면서 우리는 이 살벌한 복수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선으로 악을 갚아야 함
   먼저 본문 4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사울 왕은 다윗을 추격하다가 블레셋의 침략으로 중지하고요.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가서 다 격퇴시키고 돌아온 사울 왕은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요. 이번만은 기필코 체포한다는 목표로 정예부대 3천 명을 거느리고 엔게디로 갔어요. 그런데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르렀는데 굴이 있었어요. 당시 이런 굴은 양의 우리나 목자의 숙소로 사용되곤 했는데요. 굴의 앞에는 돌을 둥글게 싸고 그 위에는 가시로 덮어 맹수의 접근을 막았어요. 그런데 사울 왕이 뒤를 보러 굴에 들어갔는데요. 원어성경에는 וילָגְרַ תאֶ ךְסֵהָלְ(레하세크 에트 라글라이우)라고 기록되어서요. 영어로 ‘cover his feet(발을 가린다)’는 의미에요. 당시 용변을 보기 위해 앉으면 긴 옷자락이 발을 가리웠기 때문에 생긴 표현인데요. 사울 왕이 굴에 들어가서 ‘대소변을 보았다(relieve himself)’는 뜻이었어요. 그런데 이 굴은 대단히 깊고 넓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 다윗의 부하들이 숨어 있었던 거예요. 그러자 다윗의 부하들이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다”하고 사울 왕에 복수를 강력히 건의해요. 그러나 다윗은 일어나 가서요. 사울 왕의 목을 벤 것이 아니라요. 사울 왕의 겉옷자락만 가만히 베요. 다윗은 혼자 용변을 보러 굴에 들어온 사울 왕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습니다만 그를 수없이 죽일려고 했던 왕에 대한 복수의 기회를 다 내려놓고요. 선으로 악을 이긴 거예요.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의 원수가 멀리 갈 것도 없이 가장 먼저 우리의 가정에 있고요(마 10:36). 세상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요. 심지어 교회 안에도 있어요. 특별히 지금 우리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온 나라와 교회까지도 보수와 진보의 이념으로 쫙 갈라서서요. 목사, 장로들까지도 이념의 갈등으로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복수를 할려고 하는 본능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했다는 사실이에요. 그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했다면 그 주님의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하고요. 그 주님의 용서를 섬김을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말로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했다고 하면서도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람에게 반대를 하고요. 그 사람의 발목이나 잡고요. 그 사람에게 복수를 할려고 해요.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요. 실제로 그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도 아니고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도 아니고요. 주님의 제자도 아닌 거예요. 왜냐하면 요한일서 4:7-8에서도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분명히 증거하시지 않아요? 그리하여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사랑하고 용서하고 인내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 세리, 창녀, 병자등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셨지만요. 유일하게 진노하시고 심판하셨던 이들이 있었어요. 자신들만 의로운 체 하면서도 실제로 삶에 있어서는 어떠한 말씀도 제대로 행하지 아니하고요. 위선과 가식과 독선에 가득 찬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던 거예요. 말세 마지막 때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소중한 원수 사랑 하나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이 이 땅 위에 얼마나 많아요? 그 사랑 하나 제대로 행하지 못하면서 우리가 다른 무얼 행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한 신학자는 인간의 유형을 이렇게 요약하였어요. 첫째, 악으로 선을 갚는 사람: 마귀적(Devil-like)이라는 거예요. 둘째, 악으로 악을 갚는 사람: 짐승적(Beast-like)이라는 거예요. 셋째, 선으로 선을 갚는 사람: 인간적(Human-like)이라는 거예요. 넷째, 선으로 악을 갚는 사람: 신적(God-like)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선으로 악을 갚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말씀이 로마서 12:19-21에 잘 증거되어 있어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러므로 이 복수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떠한 원수라도 우리가 친히 갚지 말고요.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주신다고 약속하시니깐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고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요. 목마르거든 마시게 함으로써요. 원수의 머리에 사랑의 숯불을 쌓아놓을 때 원수의 강퍅하고 완악한 마음을 녹여서 변화되면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의 행복과 축복이 임하게 되지만요. 끝까지 우리를 대적하고 죽일려고 달려들면요. 그 숯불이 무서운 심판의 불이 되어서요. 그의 일생을 다 불태우고 영원한 지옥 불의 심판에 이르게 하고 말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원수를 갚지 말고 주님의 심판에 맡기고요. 끝까지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게 될 때 우리는 기필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영적 민감성을 가져야 함
   계속해서 본문 5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이 엔게디 굴 속에서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고 복수만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요. 왕위에 까지 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어요. 그런데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고요. 그의 옷자락만 베었지만요. 그것조차도 마음에 찔려 후회한 거예요. 이처럼 다윗은 보통 사람과는 달리요. 영적인 민감성을 깊이 가졌기 때문에요. 왕의 옷자락을 벤 것만으로도 양심의 가책을 심하게 느꼈던 거예요. 우리도 다윗과 같은 영적 민감성(Spiritual Sensitivity)을 가져야 해요. 오늘부터 성전예배의 10%(비접종자 포함)~20%(접종자)까지 가능하도록 했는데요.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종교시설(특히 교회)에 대해서만은 최소한 공연장이나 대형식당이나 마트 등과 같은 다중시설과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참으로 유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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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은 시편 51:17에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고 다윗은 고백하지 않았어요? 우리도 이러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질 때 날마다 순간마다 영적으로 민감하여서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더 이상 남을 탓하지 않고요. “내 탓이요!”하고 엎드리면서요. 항상 깨어 영적 민감성을 가지고 살아가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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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영적인 민감성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요. 우리의 인생의 문제의 원인을 다 찾아낼 수가 있어요. 그리하여 우리가 어떠한 복수의 시대에도 남을 탓하기보다도 나 자신부터 날마다 통회자복하는 마음으로 깨어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멸시하지 않으시고요. 더욱 더 사랑하고 용서, 화해하는 영적 민감성을 가진 감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영적 권위를 인정해야 함
   마지막으로 본문 6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은 그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그의 주인이 되는 사울 왕을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다윗은 앞으로 계속해서 사울 왕을 죽여서 복수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요. 사울 왕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그를 해할 수 없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다윗은 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 부하들에게도 금하여서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한 거예요. 그리하여 사울이 일을 다 보며 살아서 굴에서 나와서 자기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일은 사무엘상 26장에 나오는 십 광야에서도 똑같이 되풀이 돼요. 사울 왕이 잠든 사이 머리 곁에 있는 왕권의 상징인 창과 물병을 가져오면서도요. 그가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그를 결코 해하지 않고요. 복수하지도 않아요. 다윗의 위대함은 이처럼 하나님의 영적인 권위까지도 철저히 인정했던 데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2,197명의 인물 가운데 이름이 가장 많이 기록된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바로 다윗이에요. 아브라함도 289회 밖에 안 나오는데요. 다윗은 903회나 기록되어 있어요. 그런데 다윗이 그의 이름 뜻대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된 세 가지 이유를 꼽는다면요. 오늘 본문에 잘 나왔듯이요. 첫째, 다윗은 어떠한 원수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선으로 악을 갚고요. 둘째, 항상 영적인 민감성을 가지고 잘못을 지적하면 곧바로 회개할 정도로 영성이 깊었지만요. 셋째, 일평생 기름 부은 자에 대한 영적인 권위를 철저히 인정하면서 성령충만하게 살아갔다는 것을 우리가 결단코 잊어선 안 되는 거예요. 말세 마지막 때 우리의 마지막 문제는 영적인 교만에 쉽게 빠지고 마니깐요. 영적인 권위를 인정할려고 하지를 않아요.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나라에서도 영적 질서인정않는 현상이 나타나요. 그러니까 자기 자식에게도 입에 못 담을 말이나 글을 함부로 내뱉는데요. 옛날 같으면 국왕 모독죄로 큰 형벌을 받을 일인데요. 양심의 가책도 없이 마치 자기 집 강아지 취급을 하니 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큰 결례를 범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세속의 물결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서요. 이는 신앙의 근본이 없고요. 영적인 체계를 다 무너뜨리고 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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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말세 마지막 때 너무도 사악한 복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철천지 원수라도 선으로 악을 갚고요. 영적 민감성을 가지고요. 영적 권위를 인정하면서요.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며 살아갈 때 궁극적인 승리의 기적의 축복이 일생토록 우리와 항상 함께 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