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모범(51)

예수님, 어떻게 오셨는가 이사야 7:14


우리는 또 다시 성탄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어요. 영원히 멸망당할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의 탄생이 인류의 역사를
B.C(Before Christ, 주전)와 A.D(Anno Domini, 주후)로 나눌 정도로 역사적인 사건이에요. 그래서 ‘역사(History)’란 ‘그분의 이야기(His Story)’를 줄여놓은 것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말세 마지막 때가 되니깐요. 점점 성탄절은 상업적으로만 이용당하며 그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고요. 또한 저희 어렸을 때만 해도 온 세상에서 성탄절의 캐롤부터 울려퍼지고요. 성탄절 선물을 기대하고요. 성탄절 전야의 오버나잇(Over Night)에 흥분하게 되고요. 성탄절 새벽송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었는데요. 바로 그 성탄절의 감격이 사라져가고 있어요. 더 나아가 사탄의 계략 가운데 성탄절을 축하하는 “Merry Christmas(즐거운 성탄절이 되세요!)”까지도 청교도의 국가 미국에서마저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사용하지 못하게 하더니요. 금년부터는 EU(유럽 공동체)마저도 “Happy Greetings(행복하세요!)”하고 안부 정도의 인사를 나누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전 700년 전에 예언해 놓은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예수님, 그가 어떻게 오셨는가에 대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성탄절의 감격을 새롭게 회복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1. 기적의 징조로 나타나심

먼저 본문 14절 상반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유다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인 주전 700여 년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환상을 보며 선지자로 부르심의 소명의 확신을 갖게 돼요. 특별히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에 관하여 집중하여 예언하여서요. 그리스도론(기독론)을 강조하였는데요. 당시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이 연합하여 남왕국 유다를 침략하였고요.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와 동맹하여 그 침략을 막아내요 그러나 그것은 또 다시 앗수르의 침략을 부르는 행위가 되고 만 거예요. 이러한 국제적 침략의 격동 속에서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권면하였으나 별로 반응이 없어서요.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하였으나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기 위해서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하니깐요. 결국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징조를 보여 주실 것을 약속하신 거예요. 여기 ‘징조’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תוֹא(오트)’라고 해서요. 영어로 ‘sign(징조)’라고 하는데요. 구약성경에서는 ‘이적’이라고 번역하고요. 신약성경에서는 ‘표적’이라고 하는데요. 인간계에 나타나는 상징적인 교훈을 담고 있는 기적을 말하는 거예요. 이처럼 메시야(구세주) 탄생의 징조는 인간이 아무리 거부해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였던 거예요. 그렇다면 말세 마지막 때 우리도 메시야(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탄생과 같은 기적을 어떻게 체험할 있을까요? 우리는 오늘날 코로나19의 위기와 같이 초대교회 성도들도 당시 극심한 전염병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의 핍박과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순교신앙으로 카타콤(무덤) 교회를 지켜 나갔던 거예요.


그런데 사도행전 2:42-43에 보면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고 분명히 증거하시지 않아요? 초대교회 성도들도 우리보다 더 인간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었고요. 세상적으로 붙잡을 것도 없었고요. 앞으로도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요. 그들은 오직 주님께 소망을 두고요. 주님께만 메어달렸고요. 주님께 부르짖으면서요.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던 거예요. 그랬더니 사람마다 두려워하는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어요. 여기 나오는 ‘기사’는 헬라어로 ‘τέρατα(테라타)’라고 해서 자연계에 나타난 기적들이고요. ‘표적’은 헬라어로 ‘σημεῖα(세메이아)’라고 해서 인간계에 나타난 기적들이었어요. 다시 말하면 그들의 전적으로 헌신한 믿음의 기도에 의해서 기적이 일어났던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도 코로나19의 이 엄청난 전세계적인 대유행병의 위기를 내일부터라도 새벽에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 나아와 합심해서 믿음으로 간구하는 길밖에 없어요. 이번에 정말 가슴 아팠던 것은 코로나19의 위험 속에서도 믿음으로 성전에 나아와서 기도 드리면서요.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요. 성전 신앙을 사수하고요. 순교신앙으로 일어선 분들은 이렇게 건강하게 다 살아있는데요. 지난 주간에도 코로나19가 두려워서 성전에 나오지 못하고 있던 교인들 가운데 두 분이나 세상을 떠나간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가슴 아프고 눈물 나는 일이에요? 우리는 인생이 어렵고 힘들수록 모든 질병의 치료자 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메어달려서요. 부르짖는 길밖에 없어요.
<예화: 아프리카 우간다 이윤재 선교사님의 간증 >


그렇습니다. 말세 마지막 때 이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우리의 인생의 기적의 징조를 어떻게 일으킬 수 있어요? 마태복음 17:21에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분명히 증거하지 않아요? 그런데도 말세 마지막 때가 되니까 점점 우리의 믿음이 식어지고요. 열정이 사라지고요. 기도가 무너져 가고요. 교회마다 기도실이 텅텅 비고요. 기도원도 말할 것도 없이 텅텅 비어가고 있고요. 더욱이 기도를 한다는 사람들조차도 늘 형식적이고 습관적이고 무기력한 기도만 되풀이 한다면 그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러니 무슨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고요? 무슨 주님의 축복을 누리고요? 무슨 주님의 기적의 징조를 체험할 수 있겠어요? 이제는 적어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걸고 하나님께 매어달려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른 길이 없어요. 코로나19의 이 위기 속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나아와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쓸 때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의 징조들이 불일 듯 일어나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성령님에 의해 동정녀로 탄생하심

계속해서 본문 7절 중반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여기 ‘처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המָלְעַ(알르마)’라고 해서요. 원래는 처녀를 의미하며 결혼 적령에 달한 성숙한 여자를 가리키는데요. 요즘에는 말세 마지막 때가 되어서 처녀들 가운데에도 동정을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래서 ‘처녀’라는 단어 대신 남자와의 어떠한 관계도 없는 ‘동정녀’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은 거예요. 이처럼 성령님에 의해 동정녀의 몸을 통해 메시야의 탄생을 예언하신 거예요. 다시 말하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권능에 의해서 동정녀의 몸에서 메시야가 탄생하신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남자의 후손이에요. 그래서 남자의 성씨를 따라서 이름을 짓고요. 가문을 이어가게 하셨어요. 그런데 이 지구상에 유일하게 아버지가 없이 태어난 유일한 여자의 후손이 있어요. 그가 바로 예수님이세요. 그래서 에덴동산에서의 역사가 얼마나 흘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요. 적어도 예수님의 탄생 4,000여 년 전에 하나님께서 범죄 한 뱀에 대해 예언하신 말씀인데요. 창세기 3:15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예언하세요. 여기 뱀 즉 사탄이 여자 하와와 원수가 되고요. 뱀의 후손인 사탄의 세력이 이 땅의 유일한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과 원수가 되어서요. 사탄의 세력이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게 하지만요. 이 지구상 유일한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결정타를 날리실 것을 예언하신 최초의 복음(The Proto-Gospel)인 거예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성령님에 의해서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시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죄악에 물들지 않은 구세주의 탄생을 예언하신 거예요. 더 나아가 인간이 죄악과 상처와 질병으로 인하여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님에 의한 동정녀 탄생의 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신구약 성경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분명히 증거하시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요. 독생자(His one and only Son) 즉 한 분밖에 없고 스스로 태어나신 유일한 아들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셔서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과 상처와 질병을 대신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셨으니 이보다 더 기쁘고 감격스럽고 복된 성탄이 어디에 있느냐는 거예요?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탄생을 우습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사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이러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결코 불가능 했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하고 찬송하시지만요. 우리의 멸망당할 죄악과 상처와 질병을 대신해서 죽으시도록 한 분 밖에 없는 아들인 죄 없으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은 “슬프다 구주 보냈네!”이셨을 거예요.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울부짖으시며 돌아가실 때 하나님께서는 차마 이 땅을 내려다보지도 못하시고 돌아앉으셔서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셨을 거예요.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결정적인 동기가 되셔서요.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의해서 기적적인 동정녀 탄생을 하셨던 거예요. 우리는 이 놀라운 성탄의 크신 사랑을 받은 자로서 얼마나 사랑의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는 거예요?
<예화: 중국 언론매체 '163'은 혼자 식당에 찾아와 눈물을 흘린 할아버지 사연 >
<예화: 전경숙 권사님의 마지막 유언 >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동정녀로 잉태케 하셔서요.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악과 상처와 질병을 대신 지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감격을 얻게 되었는데요. 말세 마지막 때 우리도 그 어느 때보다도 이 하나님의 사랑이 절실한 때에요. 그러므로 우리의 얼마 남지 않은 때 우리가 먼저 받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겨나갈 때 성령님에 의한 동정녀 탄생과 같은 기적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불일 듯 일어나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심

마지막으로 본문 14절 하반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면 그 이름을 ‘לאֵֽ וּנִמָּעִ(임마누엘)’이라고 하라고 해요. 여기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 ‘임(מעִ)’에 1인칭 복수 접미어인 וּנִִמָ(마누)가 붙어서요. ‘우리와 함께’라는 뜻이 되고요. 마지막으로 ‘לאֵֽ(엘)’ 즉 ‘하나님’이 붙어서요.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의 예수님의 별명을 예언하신 거예요. 그렇게 700여 년이 지난 후 이 예언이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성취되어서요. 마태복음 1:21에 예수님에 대해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요. ‘예수’ 즉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여호와는 구원하신다’는 뜻을 증거하신 거예요. 더 나아가 마태복음 1:23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임마누엘’이라는 예수님의 별명을 다시 한 번 풀어 증거하고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강서구청장만 우리와 함께 해도 얼마나 마음이 든든해요? 강서국회의원이 함께 해도 얼마나 목에 힘이 들어가요? 서울시장이 우리와 함께 하면 목에 기브스를 해버릴 거예요. 그런데 대통령이 우리와 함께 하면 어떻겠어요? 우리는 아마 목에 철근 콘크리트를 깔고 다닐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와 비교할 수 없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함께 해주신다니 이보다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는 거예요?


<예화: 존 오트버그(John Ortberg) 목사님 저서 「이성을 넘어선 사랑(Love Beyond Reason)」 책의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설명한 키에르케고르의 비유>

이처럼 주님께서 육신의 몸으로까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여 주셨는데요. 그리고 세상을 떠나가신 후에도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데요.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의 감사와 감격이 메말라가고 있다는 말세 마지막의 우리의 신앙생활의 심각성이 있는 거예요. 그것은 마치 부모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데 못 믿고요.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맞느냐고 의심하는 것과 다를 바가 뭐가 있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마태복음 28:20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약속하셨고요. 히브리서 13:5에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강조하셨던 거예요.
<한 목사님에게서 전해온 육군사관학교장 김성수 중장의 간증 >


이처럼 임마누엘의 우리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아니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염려할 것이 뭐가 있고요?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고요? 낙심할 것이 뭐가 있고요? 절망할 것이 뭐가 있느냐는 거예요. 아무리 죽음이 우리 앞에 닥쳐와도 우리는 죽음 후에 곧바로 천국의 영생에 이어지고요. 영원한 안식에 이르고요.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니깐요.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요. 끝까지 인내하고요. 승리하고요. 영광 돌리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독일의 슈퍼마켓 체인인 에데카(EDEKA)의 “이젠 집으로 가야할 시간(It`s time to go back home)”란 제목의 크리스마스 광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 멀리 외롭게 홀로 사시거나 요양원에서 자식들과 손주들 얼굴만 떠올리면서 하루에도 현관문 쪽을 수없이 바라보시는 우리의 부모님들이 이 땅 위에 얼마나 많으세요? 부모님들은 우리에게 일생토록 모든 것을 다 쏟아주셨는데요. 이제는 늙고 병든 육신을 안고요. 외로움과 기다림 속에서 생의 마지막을 살아가고 계세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나가시고 나면 얼마나 가슴을 찢으며 후회가 되는지 몰라요.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당장 전화 한통 드려보시지 않겠어요? 한걸음 더 나아가 더욱이 이번 성탄절에는 모처럼 온 가족이 함께 성전에 나아가 예배드릴 수 있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얼마나 행복해 하실까요? 성탄절이 다가오는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It`s time to go home of our soul)이에요.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징조를 나타내시고요. 성령님에 의해 동정녀로 탄생하시고요. 임마누엘로 함께 하심을 확실히 믿을 때 우리는 코로나19의 모든 어려움도 이겨내고 그 어느 해보다도 놀라운 성탄의 감사와 감격 속에 진정으로 행복한 성탄절을 맞이하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