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감동(2)-무엇이 문제인가
사무엘하 6:1-11


 우리가 새해에도 계속해서 사무엘하의 말씀을 함께 나누는데요. 다윗은 이스라엘의 통합 왕이 된 후에 하나님의 법궤를 새로운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옮기고자 해요. 그것은 예루살렘을 정치적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중심지로 만들려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싣고 오다가 웃사의 사망 사건이 벌어지고 말아요. 그렇다면 다윗의 순수한 의도와는 달리 무엇이 문제였는가를 보면서 말세 마지막 때 우리의 신앙생활의 무엇이 문제인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해야 함
 먼저 본문 3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법궤가 안치되어있던 바알레 유다는 블레셋과 접해 있는 지역으로 전쟁의 위험이 있으므로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뽑은 삼만 명의 정예부대를 다시 모아서요.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서 블레셋과 접해있는 기럇여아림의 옛 명칭(삼상 7:1-2)인 예루살렘 서북쪽 13km 지점인 바알레유다로 가게 돼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법궤는 증거궤(출 25:16, 40:3), 언약궤(민 10:33, 신 31:26), 여호와의 궤(수 4:11, 6:12, 삼상 5:3)라고도 불리는데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십계명의 두 돌판(히 9:4)을 간직한 지성물 중의 지성물이었던 거예요. 법궤는 이곳에서 에벤에셀의 승리까지 20년(삼상 7:1), 사무엘과 사울왕 치하 40년, 그리고 다윗왕 치하 10년까지 합해서 약 70년 간 머물렀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과 같은 사람도 법궤를 옮기는데 첫 번째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데요. 원래 법궤는 레위의 둘째 아들인 고핫의 자손들이 성막의 성구도 관리하고요. 법궤도 어깨에 메고 운반하게 되어 있었어요(출 25:14-15, 민 3:30-31, 4:15, 7:9). 그런데 다윗은 그 먼 길을 고핫자손들의 어깨에 메고 오기는 무리라고 판단하고 수레에 실은 거예요. 다윗은 그래도 새 수레에 실어서 그의 정성을 다하고자 했지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적인 정성이 담겨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어요. 다윗이나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율법의 지식이 없지 않았을텐데도 이런 중대한 과오를 범하고 만 거예요. 우리도 구약의 율법에 ‘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이 온 몸으로 행하라는 뜻으로 인간의 몸의 지체 수인 248가지이고요.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말씀이 1년 365일 하지 말라는 뜻으로 365가지라고 했어요.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요.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적어도 613가지 율법의 말씀뿐만 아니라요. 그 외의 하나님의 말씀도 지켜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말세 마지막 때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쓰던 수법을 교활하게 사용해서요. “......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고 하였듯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바꾸어 버려서요.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 3:2-3)고 하면서요. 하나님의 말씀에 더해서 혼란을 일으켜서요.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고 하면서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거짓말까지 하여서 아담과 하와를 범죄하게 하고요.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요. 자손 대대로 우리까지 이 불행과 고통 속에서 죽게 만들고 만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라도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서요. 잘못 행했던 것은 통회자복하고요. 이제 남은 여생이라도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할 때 우리는 영원한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셔야 할 것은 인간이 만든 신학도 변하고요. 예배의 형태도 바뀔 수 있지만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신앙만은 변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예배를 가장 중시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코로나19로 인해 정부가 비대면예배를 지시하고요. 교회지도자들이 이 비대면예배를 수용할 때에도 우리 치유하는교회를 비롯한 이 땅의 복음적인 교회들은 우리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세계 어느 선교지에서까지도 성전예배를 사수하였던 거예요. 무엇보다 ‘율법의 등사본’이라고 하는 신명기에서만 해도 16번이나 “택하신 곳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해서요. 광야시대에서는 성막, 왕정시대에서는 성전, 포로시대에서는 회당, 신약시대에서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요. 이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 유럽교회가 축구열풍으로 인해 TV예배를 드리면서 몰락해 버렸고요. 미국교회가 TV예배가 유행하면서 교회가 문을 닫기 시작하더니요. 급기야는 한국교회가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예배’라는 것을 만들어 보면서요. 이미 영적인 침체의 큰 시험에 빠지고 만 거예요. 우리가 몸이 병들어서 교회에 못 나오거나 면연력이 약하신 형편이라면 하나님께서도 이해하시지만요. 비대면예배를 볼 때 우리에게 무슨 은혜가 있고 축복이 있고 행복의 감격이 있어요?
<논문: ‘청중이 느끼는 온라인 설교와 현장 설교의 차이점에 관한 연구’, 조광현, 조철현(2022. 1. 5), 국민일보>


 히브리서 10:25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분명히 강조하시잖아요? 왜 그토록 강조하실까요? 주님 앞에 나올 때 풍성한 은혜가 있고 축복이 있고 행복의 감격이 되살아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전에 나올 수 있는데도 다른 데는 잘 돌아다니면서 이미 나태와 침체의 시험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거나 코로나19에 걸려서 세상을 떠나면 이보다 비극적인 일이 어디에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코로나19의 이 시험 속에서도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우리를 자랑할 것도 아무것도 없고요. 마땅히 이 고난의 시험 속에서 믿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님과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요. 성전예배를 사수하고요. 순교신앙을 이어가야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어떠한 변명도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행할 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예화: 2022년도 신년 축복성회 >


 축복장인 신명기 28:1-2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분명히 약속하셨고요. 이 약속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난 3,500년의 역사 가운데 이 복을 누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요. 이 말씀의 약속을 믿고 철저히 복종하는 자에게 이 복이 임하게 된 거예요. 이 역사적 사실은 우리가 철저히 교훈 삼아서요. 우리가 손해보고요. 힘들고요. 희생하는 것 같아도요. 끝까지 주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복종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리하면 분명히 지용수 증경총회장님이나 저보다 더 복 받은 성도들과 그 자손들이 모두 다 되는 거예요. 그런데 계속해서 도전받아야 할 것은 신명기 28:15에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고 분명히 경고하고 있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절대 마음이 평안하지 않고요. 육신도 건강하지 않고요. 삶도 축복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의 삶의 실패와 고통과 불행을 당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말씀에 복종하지 못했던 것을 먼저 철저히 통회자복해야 해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면 가장 복되고요. 마음에 안 내켜도 억지로라도 절대 복종하면 지난 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그 풍성하신 은혜와 축복과 행복의 감격을 잃어버렸던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든 문제를 다 극복하고요. 남은 여생을 진정으로 은혜롭고 축복되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인간적인 방법을 결코 앞세워선 안 됨
 계속해서 본문 6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이렇게 하나님의 법궤는 오랫동안 머물렀던 아비나답의 집을 떠나게 된 거예요. 70년 전에 이 법궤를 맡았던 아비나답은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성별하여 법궤를 지키게 했던 거예요(삼상 7:1-2). 이렇게 법궤를 실은 새 수레는 오랫동안 머물렀던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와 산에서 내려오게 된 거예요.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다윗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잣나무로 만든 악기로 여호와 앞에 연주하며 찬양하였어요. 그런데 법궤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 소들이 뛰게 되니깐요. 하나님의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게 되자 웃사가 법궤를 붙잡게 된 거예요. 그러나 법궤를 만지는 것은 율법인 민수기 4:15에 금지된 것이었어요.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 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다시 말하면 웃사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인간적인 판단이 앞섰고요. 자신의 힘을 쓰고요. 자신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요.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바로 잡으려고 했던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바로 잡으시고요.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요. 웃사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순간적인 큰 실수를 범함으로 인해서 결국 하나님의 신성을 범하게 되고요. 안타깝게도 죽음에 이르고 만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으면 꼭 인간적인 판단을 하게 되고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내세우게 돼요. 인간적인 조직이나 힘을 쓸려고 해요. 특별히 과학문명이 발달할수록 성경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하고요. 앞서 간다는 인간적인 지식이나 경험이나 방법을 내세우면서요. 그래야 현대감각이 있고 시대를 앞서가고 미래지향적인 사람으로 착각을 해요. 특별히 오늘날은 제4차 산업혁명시대이고 AI 인공지능시대이고요. 메타버스(metaverse) 즉 초월을 뜻하는 메타(meta)와 세상을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를 합해서요. 온라인 공간을 마치 현실의 3차원 공간처럼 이용해서요. 우리의 직업, 금융, 학습 등이 연결된 가상세계에서 모든 활동을 편리하게 해요. 그래서 메타버스로 성도의 교제도, 선교도 사역의 문이 넓어졌다고 하지만요. 현실보다 가상세계에서의 삶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되면서 현실과 단절된 생활을 하는 메타페인(metapain) 즉 가상세계에서 또 다른 고통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경고받지 않으면 안돼요. 인간이 만든 것은 결코 완전할 수도 없고요. 영원할 수도 없고요.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독감보다 약하다는 코로나19 앞에서도 그동안 쏟아왔던 현대의학과 과학이 벌써 3년째 맥을 못추고 무너지는 것을 보세요.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적으로 내세울 것도 아무것도 없어요. 힘쓸 것도 아무 것도 없어요. 인간적인 방법을 쓸 것도 아무것도 없어요. 부족한 종도 인간적으로 보면 힘쓸 것이 많지요. 인물이나 체력(태권도, 유도, 특공무술)이나 지력이나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오히려 영적으로 결정적인 걸림이 되고 유익하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아요.
<예화: 노아의 방주 미술전>

<예화: 우주과학자 정재훈 장로>

<기사: ‘청년, 오늘’ 국민일보 (2022. 1. 6)>


 외로움과 우울증 등으로 인한 청년들의 고독사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급부상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때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을 때인 거예요. 우리가 어떠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스가랴 4:6의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는 말씀이 그대로 역사해서요. 인간적인 지식과 경험과 방법을 앞세우는 모든 문제를 결단코 다 극복하고요.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기적적으로 주관하시고요. 역사하시고요. 영광 거두시고요. 인간적인 방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쉽고 가볍고 복된 삶이 새해 새롭게 펼쳐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3.항상 주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겨야 함
 마지막으로 본문 9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웃사의 죽음으로 인해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거예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우려되어 일단 이전 작업을 멈추게 된 거예요. 그리고 레위인으로 고핫 자손이요 성전의 문지기(출 6:16, 대상 15:18, 24, 26:4)로서 블레셋 지역이 아닌 단 지파 지역의 가드 사람인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고 가서 세 달 동안 머물게 된 거에요. 그런데 법궤를 모신 것은 하나님을 모신 것과 같아서요.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신 거예요. 그리하여 그들의 토지 소산이 풍성해지고 가축들이 충실해져서요. 다윗은 두렵고 떨림으로 이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풀린 것으로 알고요.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기쁨으로 메고 다윗성으로 모시고 오게 된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복음으로 산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받는 것부터 시작해서요.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형통할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돌리고요. 실패와 고통 속에서는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엎드려야 하는 거예요. 그때 우리는 영적인 근신과 연단을 통해 더 큰 영적인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빌립보서 2:12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거예요.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이미 받았는데 무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하시는가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요. 여기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영어성경에 “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계속해서 너희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구원에는 3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첫째는 과거에 우리가 받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의 구원’이 있는데요. 이것은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인 거예요. 둘째는 현재에 우리가 믿음으로 변화되어 가는 ‘성화의 구원’이 있는데요. 이것은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인 거예요. 마지막 미래에 우리가 죽은 후에 ‘영화의 구원’이 있는데 이것은 ‘죄의 존재로 부터의 구원’인 거예요. 그런데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요. 과거의 구원만 강조하는 구원파 이단들은 현재의 성화나 미래의 영화의 구원을 모르니깐요. 다 된 줄로 착각을 하고요. 지난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린 세월호 사건과 같은 국가적 큰 슬픔과 고통을 안겨다 준 거예요. 우리가 진정으로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3가지 구원을 이루지 않으면 우리가 곁으로는 신앙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교회만 왔다갔다 하는 이름 뿐인 교인에 불과한 거예요.
<예화: 신년축복상회 - 벳노래>


 우리가 평생을 주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항상 깨어서 말씀과 기도로 영적으로 충만해야 하고요. 육신적으로 강건해야 해요.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고요. 치유받지 않고 충만해지지 않으면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거예요.
<책: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Being well When We`re Ill」마르바 던(Marva J. Dawn) 교수>

 우리가 다 된 줄로 착각하는 교만한 신앙생활의 문제를 극복하고요. 평생을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면요.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시켜 나갈 때 우리는 여생을 보다 더 신실하고 충만하고 복되게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창원양곡교회 지용수 원로목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 떠날 날이 한 해 더 가까와 왔는데요.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문제들인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하고요. 인간적인 방법을 결코 앞세우지 말고요. 항상 주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며 살아갈 때 우리의 남은 여생이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너무도 은혜롭고요. 축복되고요. 행복의 감격을 새롭게 회복하며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