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감동(17) 

끝까지 함께 하라 (누가복음 20:1-3)

지난 주일은 부활주일로서 새생명초청축제도 너무도 은혜롭게 잘 마칠 수 있었어요. 그러나 부활주일에 한 번만 교회에 나오는 믿음으로는 우리는 어떠한 기적의 역사도 이룰 수가 없어요. 변함없는 믿음으로 끝까지 함께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말세 마지막 때 끊임없이 이 땅 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뿐만 아니라요. 신앙의 세계에 까지 범람하는 배신의 행렬들을 바라보면서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와 달리 우리가 변함없는 주님께 대한 믿음의 절개와 인간에 대한 사랑의 의리를 지킨다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현실이에요. 그러한 참혹한 현실 속에서 믿는다는 우리까지도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영적인 대열에서 이탈하면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기적적인 은혜와 축복과 행복의 감격을 잃어버릴 때가 얼마나 많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평생토록 끝까지 함께 하면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온전한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1.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선 안 됨(1절)
다윗 왕이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마하나님에서의 피난생활을 다 마치고요. 서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던 중이었어요. 다윗 왕의 승리는 처음에 유다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의 북쪽 11지파에 의해 이루어졌어요(삼하 19:9). 그런데 다윗 왕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에 있어서 다윗 왕이 속한 유다 지파가 다윗 왕의 권면에 의해 가담하게 되었는데요(삼하 19:11-15).

요단강을 건널 때는 유다 지파 사람들이 오히려 앞장섰으므로 문제가 야기된 거예요(삼하 19:15). 그러한 유다 지파 사람들의 독주에 북쪽 지파 사람들이 다윗 왕에게 나아와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둑질하여 왕과 왕의 집안과 왕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가게 하였나이까?”하고 반발하니깐요(삼하 19:41). 유다 지파 사람들이 다윗 왕이 우리 지파에 속하기 때문에 서둘러 모시고 온 것이지 우리가 왕의 식량을 조금이라도 얻어먹었다거나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 것이 아니다”는 거예요(삼하 19:42).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가 다윗 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니 다윗 왕에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늘 일에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깐요. 유다 사람들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보다 더욱 강경하게 거칠어진 거예요(삼하 19:43).

이처럼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 다윗 왕의 귀향 행사를 주도하자 북쪽 지파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고요. 이스라엘 11지파들과 유다 지파 사이의 갈등이 있는 가운데 유다 지파의 독주에 반발하여서요. 그 가운데 길갈에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배출했던 베냐민 지파에 속했지만 육신적이고 세상적이고 비신앙적인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이 세바가 다윗 왕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선동해서요. 반란을 일으킨 거예요. 그 반란의 신호로 세바가 나팔을 불면서요. “우리는 다윗 왕의 혈통과 같이 다윗과 나는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인 다윗 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다”고 하면서요(신 7:9, 수 22:25). 이스라엘 사람들이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요. 다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된 물질의 욕심 때문에 반란이 일어났던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자기의 유익만 구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복의 한계를 느꼈다면요. 남은여생은 주님과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해 온전히 희생하며 살아보세요. 요한복음 12: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분명히 약속하세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그렇게  자존심 상할 일도 많고요. 상처 받을 일도 많고요. 시험 들 일도 많아요. 자신의 욕심과 욕망에 사로 잡혀 살아서요. 일생을 불행과 고통 가운데 살다가요. 어느 날 갑자기 끝내고 말아요. 그러나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여! 주여!”외치면서요. 온전히 죽어지고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욕심을 다 내어놓고요. 마음을 온전히 다 비우게 되면요. 더 이상 자존심 상할 것도 없고요. 더 이상 고통당하고 불행할 것도 없고요. 더 이상 욕심과 욕망을 내세울 것도 없는 거예요. 오히려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서요.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사랑의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라는 감격의 찬송이 끊이지 않는 거예요.
예화) 기독교 신앙의 정점이자 핵심이 십자가라고 말씀하신 유기성 목사님의 책,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이야기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질 때 이 땅 위에서의 많은 열매를 맺는 복된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요. 우리가 머지않아 세상을 떠난 후에도 베드로전서 5:2-4에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고 분명히 약속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더러운 이익을 구하지 않고요. 기꺼이 희생할 때 그러한 사람들은 끝까지 함께 하며 이 땅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되고요. 하늘에서도 영광의 면류관을 누리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변함없는 사랑을 이어가야 함(2절)
유다 지파는 길갈에서 예루살렘까지 다윗 왕을 모시고 귀환을 하였지만요. 세바의 반란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 즉 유다 지파를 제외한 북쪽 열한 지파 사람들은 요단강을 건너 길갈까지 다윗 왕과 같이 왔으나 갑자기 돌변하여 세바를 따라서요. 다윗 왕을 떠나간 거예요. 유다 지파의 편협성을 이유로 그들은 길갈에서 에브라임 산지로 올라간 거예요. 그리하여 에브라임 지파는 유다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을 이끌어 갔으며 결국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대립이 솔로몬 왕 이후 남북의 분단을 가져오게 된 거예요. 이처럼 그들은 끝까지 다윗 왕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이어가지 못하게 된 거예요.

우리도 처음에는 다 좋아하다가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만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요. 상처를 주거나요. 감정을 불러 일으키거나요. 손해를 끼치게 되면요. 언제 사랑했느냐는 듯이 금방 사랑이 변하고 말아요. 그래서 원수는 원수를 낳고요. 복수는 복수를 낳고요. 파멸은 끝이 없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지난 날의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요. 하나님의 은혜를 다 잊어버리고요. 하나님의 의를 빙자해서 자기 의를 내세우면서요. 아직도 감정을 안 풀고 남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요. 그리스도인도 아니고요. 목사, 장로, 권사, 집사도 아닌 거예요. 다 사탄에게 속은 사람들이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사람들이고요.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한 사람으로서요. 말세 마지막 때 결국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가정과 교회가 불화와 분쟁 가운데 다 무너져가고 있는 거예요. 결국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실족하게 함으로 연자맷돌을 매고 깊은 바다에 빠뜨려져야 하는 거예요.
예화) 변함없는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기도하며 전도하여 704명이나 초청된 지난 부활주일 새생명초청축제
간증) 위임목사님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까지 따라하신 임상순 권사님의 친정어머니 이야기
간증) 평생을 불교 신자로 살아오셨지만 위임목사님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아멘’까지 따라하신 한용순 권사님의 시어머니 이야기

그러므로 우리는 지난 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사랑하는 가족들 뿐만 아니라요. 상처를 주었던 어떠한 원수라도 불쌍히 여기면서요. 위해서 기도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잠언 25:21-22에도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고 증거하시고요. 이를 더욱 더 깊이 있게 풀어서요. 로마서 12:19-20에서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 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강조하신 거예요.

3. 끝까지 영적으로 자신을 지켜야 함(3절)
다윗 왕이 예루살렘 궁에 돌아와서요. 그가 떠날 때 왕궁을 지키도록 후궁 열 명을 남겨 두었는데요(삼하 15:16). 다윗 왕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킬 때 아버지 다윗 왕에게 수모를 주기 위해서요. 대낮에 옥상에 장막을 치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후궁들과 동침을 하였는데요. 그때 자신을 지키지 못한 후궁들을(삼하 16:21-22) 별실에 가두고요. 음식만 주고요. 다윗 왕이 다시는 그들과 동침하지 않고요.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게 해요. 다른 남편과 관계를 가진 아내에 대한 율법대로 처벌을 하였던 거예요(신 24:1-4). 만약 그 후궁들이 다윗 왕에 대해 절개를 지켰다면 여생이 얼마나 행복하고 축복되었겠어요? 그런데 압살롬의 강압에 넘어간 후궁들은 결국 불행과 고통 속에서 일생을 끝내야 했던 거예요.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갈려고 하면 주위의 수많은 유혹과 시험과 환난과 핍박이 얼마나 많아요? 그래서 사도행전 14:22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환난의 때에 우리는 결코 신앙을 저버리고요. 육신적으로 편안한 길을 찾아가거나요. 주님을 떠나 살아서는 결코 안 되는 거예요. 오히려 무엇이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것이고요. 십자가의 사랑을 행하는 것이고요. 소망 가운데 인내하는 것인가를 선택하며 살아가야 하는 거예요.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는 이러한 신앙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거예요. 그들은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의 범주를 뛰어넘어 나라와 민족과 열방을 향한 복음의 비전을 불태운 사람들인 거예요.
예화) ‘기도하는 대사’였던 주중대사와 통일부장관을 역임하신 김하중 장로님이 쓰신 책 「하나님의 대사 1, 2」 이야기

이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귀하게 쓰임 받는 장로님도 계시는데요. 자신의 신앙조차 감당을 못하고요. 주위 사람들에게도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신앙생활을 더 이상 해서는 결단코 안 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말세 마지막 때 디모데후서 2:22 말씀처럼 우리 자신을 지켜나가야 하는 거예요.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 받을려면요. 가장 먼저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청년의 정욕부터 피해야 해요. 과거에 피하지 못함으로 인해 쓰러졌다고 할지라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남은 여생이라도 일어나 피해야 해요.

더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요.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믿음으로 사는 것인가를 결단해야 하는 거예요. 지난 월요일부터 코로나19의 거리 제한이 해제가 되었습니다만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2년 4개월 동안 얼마나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성전예배, 헌금, 봉사, 전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위협 받으며 살아왔어요? 그러나 2년 여 계속해서 강조해 왔듯이요. 우리는 코로나19는 전염병이고, 독감보다 더 약하니까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요. 이렇게 어렵고 힘들수록 3대 영적 슬로건인 ‘처음 사랑의 회복’과 ‘성전 예배의 사수’와 ‘순교 신앙의 계승’의 신앙을 지켜야 한다. 고 외쳤듯이요. 충성스러운 주의 종들과 신실하신 장로님들과 권사님들과 집사님들과 성도님들이 잘 합심 합력해 주셔서요. 오늘의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의로운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거예요.

더 나아가 우리는 이 믿음을 지키면서도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잃어서는 안돼요. 지난 날 우리의 신앙을 조롱하고요. 멸시하고요. 핍박하였던 어떠한 원수라도 다 불쌍히 여기고요. 다 용서하고요. 다 끝까지 사랑으로 섬길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기대하시는 화평을 결단코 깨서는 안 되는 거예요. 말세 마지막 때 사탄은 우리가 평안하게 사는 꼴을 보지를 못해요. 그래서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이나 심지어 교회가 평안한 것을 보지 못하고요. 조용할 만하면요. 꼭 시비를 걸고요. 문제를 터뜨리고요. 화평을 깨뜨릴려고 해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대로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만 따라서 끝까지 영적으로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
예화) 위임목사님의 신앙의 기초를 닦도록 말씀과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시며 신앙의 멘토가 되어주셨던 문일호 목사님 이야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우리도 어느 날 갑자기 떠나가게 돼요. 그러나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요. 변함없는 사랑을 이어가고요. 끝까지 영적으로 자신을 지켜나가게 될 때 우리가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함께 하는 영광스러운 은혜와 축복과 행복의 감격을 영원히 누리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