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감동(51)

계속되는 시험 속에서도(열왕기상 17:8-16) 

  엘리야 선지자의 시험은 지난 주일에 끝나지 않아요. 이번 주일에도 계속 돼요. 마치 우리의 신앙생활의 여정 속에서도 계속 돼요. 오늘 이러한 시험은 본문의 그릿 시냇가에 있던 엘리야 선지자도 사르밧으로 가서요. 사르밧에 사는 과부를 만나서 계속되는 시험을 어떻게 이겨내는가를 보면서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일생토록 계속되는 시험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주님의 인도하심에만 순종해야 함
  먼저 본문 8-9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당시 시돈은 두로 북방 약 40km 지점에 있고 두로와 더불어 베니게의 양대 항구였는데요. 두로보다 앞서는 베니게의 수도에서요. 베니게 사람은 ‘시돈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였어요. 더구나 시돈은 이방 땅이며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아합 왕의 왕비인 이세벨의 고향이었는데요. 지금 엘리야 선지자를 죽일려고 하는 서슬이 퍼런, 즉 권세와 기세가 아주 대단한 대적의 고향인 시돈 땅으로 피난을 가라고 하니 이게 말이 됩니까? 사르밧은 이 시돈 땅에 속했고요. 더욱이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까지는 약 120km(서울에서 세종까지의 거리)나 떨어졌으니깐요. 당시에는 무더운 날씨에 도로도 안 닦이고요 교통시설도 전무한 상황 속에서 이동을 하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더구나 아는 사람도 아니고요. 무명의 여인일 뿐만 아니라요.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음식을 주게 하신다고 하는데요. 사르밧에 과부가 한, 두명이냐는 말이에요?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는 얼마나 황당한 일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 선지자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서 갔기 때문에 3년 6개월 동안 계속되는 궁핍함의 시험 조차도 다 이겨낼 수 있는 길을 열었던 거예요. 우리도 신앙생활을 할 때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해요. 그리하면 틀림없이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고요. 축복도 누리고요. 행복의 감격 속에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도 많은 때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는 이유는 다 자기의 이익과, 감정과, 인간관계를 따라서요. 말하고 글을 쓰고 행동하기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5:16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명령하시는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으면 사탄에게 속아서요. 다음의 육체의 일에 빠지고 마는 거예요. 그것이 갈라디아서 5:19-21에 분명히 경고하고 있는데요. 이 내용을 자신에 대한 죄 이웃에 대한 죄 하나님께 대한 죄로 분류해서 정리하면요.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술 취함과 방탕함(자신의 대한 죄)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이단(하나님께 대한 죄)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투기(질투)(이웃에 대한 죄)와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고 분명히 경고하시지 않아요? 그래서 부족한 종은 한 교인이라도 이러한 화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책임져야 할 주의 종으로서 최선을 다해 권면하고 설득하고 강권하는 거예요. 이렇게 강권해서 육체의 일을 일삼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나간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겨주신 양떼들이 아닌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지난 날을 통회자복 하고요. 믿음으로 결단하고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게 되면요. 우리는 분명히 성령님의 놀라우신 열매를 맺는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5:22-23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분명히 약속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기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사람은 분명히 성령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계시지만요. 이러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이제라도 돌이켜서요. 성령님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따라 살려고 하면요. 

마지막 갈라디아서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분명히 증거하세요. 우리가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 자신의 육체의 욕심과 욕망과 자존심과 감정에 대해서 조차도 철저히 죽어져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23년전 부족한 종이 부임했을 대 그렇게 목사파, 반대파로 나누어져 싸우는 것을 보면서요. 이것이 목사파와 반대파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파와 육적인 파의 싸움인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고요. “언제까지 우리 교회는 싸워야 합니까?” “언제까지 저런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목회해야 합니까?......”하고 당회 때나 제직회 때나 공동의회 때나 새벽이나 밤이나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짖으면서요. 주님만 바라보고요. 가장 먼저 주님의 십자가에서 저 자신부터 철저히 죽어지고요. 주님 앞에 저의 상처의 감정을 다 쏟아놓고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어떠한 원수라도 용서하게 해달라고 간구하면서요. 먼저 저 자신부터 주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고요. 원수들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용서하게 해달라고, 화해하게 해달라고 주님의 응답의 역사만 간구하며 기다리고 있었더니요. 주님께서 불러갈 사람 다 불러가시고요. 쓰러뜨릴 사람 다 쓰러뜨리시고요. 나갈 사람 다 나가게 하셔서요. 이렇게 은혜롭고 행복한 교회로 부흥하게 하신 거예요. 그러므로 다른 길이 없어요.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 자신의 육체의 욕심에 대해서 철저히 깨어지고요. 부서지고요. 죽어지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만 따라 살게 되고요.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에만 철저히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아무리 계속되는 시험 속에서도 날마다 순간마다 승리하며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 속에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사랑의 배려도 잊지 말아야 함
  계속해서 본문 10-11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사실 엘리야 선지자는 사르밧에 도착했지만 앞이 캄캄했어요. 그 사르밧 땅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과부를 어떻게 만나느냐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인간적인 걱정이었어요.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성에 이르렀을 때 성문에서 첫 번째 만난 과부가 예비되어 있었고요. 이 과부는 빵을 만드는데 땔감으로 쓸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어요.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는 이 과부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해요. 엘리야 선지자가 먼 길을 오느라고 목이 마르기도 했겠지만요. 그녀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과부인지 알고자 했던 거예요. 더욱이 오랜 가뭄으로 물이 귀한 때에 물을 준다면 그녀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과부임에 틀림이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 과부가 물을 가지러 갈 때에 한 술 더 떠서 떡 한 조각도 가져올 수 있느냐고 부탁을 해요. 그녀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과부인가를 확증하고자 했던 거예요.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가 물과 떡을 부탁할 때에 당시에 그토록 무시하던 가난한 과부였지만요.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10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11하)고 부탁을 해요. 여기 ‘청하건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נָ֥א(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요. 영어로 “Would you(해주시겠어요?)”“Please(제발)” 이라는 사정하는 의미의 단어를 통해 상당한 경어를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길 바랍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나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왔도다! 내게 마실 물도 가져오고 먹을 떡도 가져오라!”고 절대 권위적인 어투로 말할 수 있었는대도요. 엘리야 선지자는 오히려 가난한 과부를 깊이 배려하고요.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하고자 하는 엘리야 선지자의 깊은 영성이 이 모든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이 되었던 거예요. 

우리도 이 따뜻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의 영성을 본 받아야 진정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하고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요. 하나님의 사랑의 사람으로 복되게 쓰임 받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다 자기 자신만을 앞세우고요. 상대방의 마음을 깊이 배려하지 않고요. 자기 의만 내세우다 보니깐요.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이나 세상은 말할 것도 없고요.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의 교회까지도 말세 마지막 때 불화와 분쟁이 끊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월요일 새벽기도회에서도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만 갈라디아서 5:13-15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분명히 경고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요.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행하지 않고요. 우리가 화해를 이루지 않으면요. 온갖 말이나 행동으로 비방하면서요. 상대방을 죽일려고 달려들어요. 그러나 상대방만 죽고 우리는 살 것 같지만요. 사실은 상대방은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고요. 오히려 우리자신만 죽고 만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그리하여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사랑의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거예요. 
예화) ‘따뜻한 겨울나기 이웃사랑 나눔의 행사’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불신자들도 이렇게 연말 연시를 맞이하여 불우한 이웃을 위해 사랑의 나눔 행사를 하는데요. 십자가의 주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했다는 우리는 어떠하냐는 거예요? 신앙은 결코 입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거예요. 더 나아가 우리의 얼마 남지 않은 남은 여생이라도 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어떠한 원수라도 사랑하고요.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어떠한 원수라도 용서하고요. 주님께서 우리를 오래 참고 기다리셨듯이 우리도 어떠한 원수라도 오래 참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평생토록 행해야 할 주님의 사랑의 절정인 거예요.
예화) 위지안 교수가 쓴 책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이야기

  우리도 금년이 다 지나갈려면 꼭 두주 남았는데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오늘이 마지막 날이듯이 지난날의 어떠한 원수라도 다 용서하고요. 응어리진 감정들을 다 풀어버리고요. 모든 사람들과의 화평을 다 회복된 후에 떠나야하는 거예요. 그렇게 모든 사람들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게 될 때 주님께서 베드로전서 3:8-9에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의 배려를 잊지 않을 때 결국에는 우리가 먼저 복을 받고요. 자손들까지 다 잘 되고요. 자손대대로 이 사랑의 축복을 이어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믿고 행해야 함
  마지막으로 본문 15-16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이러한 엘리야 선지자의 요청에 대해서 사르밧 과부는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들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대답해요. 그녀는 마지막 남은 음식을 만들어서 먹고요. 아들과 굶어 죽으려던 차였다고 그녀의 딱한 사정을 아뢰었던 거예요. 그러자 엘리야 선지자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고 해요. 사르밧 과부가 지금 가지고 있는 식량은 아들과 음식을 해서 먹기도 어려운 너무도 적은 양인데요. 주의 종에게 먼저 가져오라는 것은 사르밧 과부에게 있어서 참으로 이겨내기 어려운 시험이었어요. 그것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의 말씀의 시험이었던 거예요. 그러나 이 믿음의 사르밧 과부가 여호와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그대로 믿고 행하였더니요. 그 다음이 어떻게 되었어요. 엘리야 선지자와 사르밧 과부의 가족이 여러 날 먹었지만요.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요.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한 거예요.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그래도 끝까지 믿고 행함으로 인해서요.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나고요. 결국 그들에게 닥친 모든 시험을 다 이겨낼 수 있었던 거예요. 우리도 일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약속만을 확실히 믿고요. 끝까지 인내하면서요. 승리하며 살아가야 하는데요. 조금만 어려운 일들이 오랫동안 지속되고요. 주위에서 상처를 받거나 실망하게 되고요. 우리의 기도의 응답이 더뎌지면요.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않으신다고 하고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하고요. 하나님은 내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고 하고요. 그냥 낙심하고 좌절하고요. 우리의 신앙이 식어가고 마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구주강림절(대림절, 대강절) 마지막 넷째 주간을 지냅니다만 예수님의 탄생 장소는 베들레헴(미 5:2상)이고요. 그의 족속은 유다지파(미 5:2하)이고요. 탄생 방법은 동정녀를 통해서(사 7:14상) 이고요. 그의 별명은 임마누엘(사 7:14하)이시고요. 그의 직분은 기묘자, 모사(놀라우신 상담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사 9:6)이시고요. 그의 사명은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려......”(사 61:1-2) 하심이었던 거예요. 이 모든 약속의 말씀들은 적어도 주전 700여 년 전에 구약성경에 다 예언해 놓으신 말씀들이 그대로 기적적으로 성취된 거예요. 약 350여 회 예언된 예수님의 탄생 즉 초림도 이렇게 기적적으로 응답되었다면 약 320여 회 예언된 예수님의 재림도 머지않아 곧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 초기의 산상 보훈의 마태복음 5:18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셨고요.예수님의 사역 말기의 종말장에서 24:35에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듯이요. 말세의 징조들이 누가복음 21:11에도 예언되어 있는데요.“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예화) 치명적인 변종 바이러스들, 자연재해, 세계적인 핵위협

  베드로후서 3:10-11에 보면 말세 마지막 때 이러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핵폭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하실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어요.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여러분, 어떻게 2000년 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핵폭탄이 폭발할 때 나타나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는 폭풍효과와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는 열효과와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는 화학효과에 이르기까지 기록할 수 있었겠느냐는 거예요? 이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만이 아실 수 있는 기적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이러한 우주적인 종말 이전에 언제든지 우리에게 닥쳐올 수 있는 개인적인 종말인 거예요.우리가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날지 누가 알 수 있겠어요?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도 언젠가 한번은 어느 날 갑자기 떠나간다는 사실이에요.
예화)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신 한 목사님 이야기

  여러분, 우리가 사고가 안 나고 싶다고 안 나집니까? 그것은 죽음도 마찬가지예요. 이처럼 절대로 우리의 뜻대로 안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예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있는 것 같애도요. 언제 터져서 떠나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인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도 천년, 만년 이 땅 위에 사는 것이 아니라요. 어느 날 갑자기 떠나가게 될 텐데요. 이처럼 날마다 순간마다 죽음을 예비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가장 충만한 사람인 거예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듯이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감사하며 신실하게 살아가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하늘나라에 가서도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지만요. 이 땅 위에서도 그곳에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줘요.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고 행한 실실한 주의 종들이나 교인들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첫째, 교인들이 많이 몰려와 슬피 울어요. 둘째, 주의 종들이 예배를 인도하면서나 말씀을 전하면서 흐느껴 울어요. 셋째, 떠나간 그 교인들을 교인들이 잊지 못하고 늘 그리워해요. 넷째, 주의 종들이 언제 어느 곳에 가든지 그 분의 신실 한 믿음을 증거하며 다녀요. 그러므로 한번 왔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나가는 인생 가운데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믿고 행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여생 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로 하늘의 상과 이 땅의 복으로 천배나 만배나 갚아주실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안수집사님의 아들 이야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고요. 우리도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날지 아무도 몰라요. 벌써 금년 한 해도 다 마치고요. 다음 주일이 성탄주일이요 송년주일이 되고 말았어요. 주님 다시 오실 날도, 우리가 이 세상 떠날 날도 한해가 더 가까워졌는데요. 우리의 얼마 남지 않은 남은 여생이라도 주님의 인도하심에만 절대 순종하고요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의 배려로 잊지 말아야 하고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믿고 행할 때에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계속되는 어떠한 시험 속에서도 기필코 승리하고 영광돌리는 복된 여생을 모두 다 살아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