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열매(36) (2023. 9. 24)


점점 강하여졌더라 (열왕기하 15:25, 역대하 27:1-9)

 

유머) 맥락을 놓치고 부분으로 전체를 잘못 해석한 맹구의 악어신발 이야기

하나님께서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신다! 부분을 보지 말고 말씀의 맥락 전체를 보면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아멘으로 받아 내 삶에 살아 역사하는 말씀으로 만드셔서 승리하시길 바란다!

 

 

1. 배신(背信) (25절 상반절)


지난주일 앗수르 왕 불의 위협에 맞서 강약약강의 모습으로 자신의 나라의 백성들에게 빼앗은 은 천달란트로 앗수르를 달래 자신의 나라의 왕권을 유지해보려 했던 므나헴에 대해 말씀을 받았다. 므나헴은 강제로 자신의 재산을 빼앗긴 백성들의 원성을 들으며 또 앗수르의 계속된 내정 간섭을 당하면서 간신히 10년간 왕권을 유지하다 자신의 아들 브가히야에게 왕권을 넘겼다. 브가히야도 역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24)”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브가히야는 불과 2년 만에 암살을 당하고 마는데 그 암살자가 다른 지파 사람이거나 이방 나라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브가히야의 장관 아들이었다.

세계사를 통해 이처럼 가장 믿었던 최측근에게 암살당한 경우는 비일비재한데 그 중에 가장 세상에 많이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면 주전 44년 로마의 시이저 즉 카이사르가 로마인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판단한 브루투스, 카시우스 무리에게 암살당하는데 마지막 순간 카이사르는 자신을 죽이려는 무리에 브루투스가 있는 것을 보고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외쳤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시이저는 특별한 말없이 팔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다가 죽임을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이 믿었던 사람의 배신을 탄식하는 관용구의 하나로 쓰이게 된 것은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6세와 줄리우스 시저에 나오는 이 대사가 나오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서 암살을 당한 브가히야가 만일 이런 비슷한 말을 한다면 베가 너마저!”라고 하지 않았을까? 이처럼 사람을 믿었다가 상처와 실망뿐인 경우가 어찌 브가히야의 경우뿐이었는가? 그러기에 이사야 222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또 이사야 2416절 중반부부터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진정 그렇다! 브가히야가 자신의 경호실장으로 가장 믿었던 장관인 르말랴의 아들 베가에게 암살당했듯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사람을 믿었다가 얼마나 상처받고 손해를 보았던가? 우리가 의지하고 우리가 믿을 대상은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님! 오직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 한분뿐임을 기억하고 우리의 남은 생도 오직 주님 손 붙들고 걸어가시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라!

 

 

2. 아이러니 (25절 하반절)


성경은 브가히야가 죽은 장소가 왕궁 호위소라는 말을 하고 있다. 브가히야의 궁의 유적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왕궁 호위소가 어디인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왕궁을 최종적으로 지키는 경비부대나 경호대가 모여있는 장소이거나 아니면 전쟁이나 위급상황에 급히 피신할 수 있는 피난처를 말하고 있을 것이다.

예화) 피신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방공호에서 아이러니하게 두려움과 심장마비로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

브가히야가 왕궁 호위소에서 피살당한 것은 최첨단 건축과 과학으로 무장한 핵전쟁대피소 안에서 사람 사는 곳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건강의 문제나 개인 간의 다툼으로 갑자기 죽게 되는 아이러니한 일과 비슷한 맥락의 일이다. 브가히야가 피살당한 장소를 열왕기 기자는 왜 굳이 왕궁 호위소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을까? 그것은 다른 곳도 아닌 왕을 사수해야 할 사람들이 모인 왕이 가장 안전해야 할 장소에서 왕이 죽은 이 어이없는 상황, 마치 일국의 대통령이 대통령 경호실내에서 죽은 것 같은 이 황당한 상황을 드러내고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브가히야가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고 여긴 왕궁 호위소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이 사건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이 하늘아래 우리가 안전하게 쉴 피난처는 없음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안전하게 쉴 피난처로 어떤 사람이나 어떤 장소들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해 아래서 우리는 다 똑같은 죄인들이며 부족한 피조물이며 인생들이기로 결코 안전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시편 1463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렇다! 어떤 장소도 어떤 인생도 우리를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 우리가 안전하게 쉴 수 있고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가 되는 곳은 오직 한분, 그리고 오직 한곳 아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당시에 레위지파의 후손 이며 모세의 사촌인 고라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고라는 르우벤 자손인 다단, 아비람, 온 이라는 사람과 모세에 대해 시기하고 질투하며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는 곧 모세를 세워준 하나님에게 대한 반역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이 반란의 주도자인 고라, 다단, 아비람, 온과 그들을 따르던 자들 은 땅이 갈라져 땅에 삼키는 심판을 받았다. 또 고라와 함께 한 250명의 무리들은 하나님의 불이 내려서 그 불에 타서 순식간에 죽고 말았다. 그런데 민수기 26:11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에 의하면 고라가 모세에게 반역할 때 가담하지 않은 세 아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가문을 이어 나갔다. 그 후손들이 후에 성전 문지기, 찬송하는 자, 성전에서 빵 굽는 이 등이 되어 하나님을 섬겼다. 이런 고라의 후손들에게는 자신의 조상 고라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그런 조상의 잘못에 대한 징벌을 자신들에게까지 잇지 않으시고 자신들을 살려주신 엄위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 이어졌고 이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그 마음을 담은채 삶을 살아갔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고라자손 중에서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150편의 시편 가운데 11개의 시편의 저자가 고라자손이 될 만큼 놀라운 복과 은혜를 허락해 주셨다. 이 고라자손은 시편 46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그렇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시오 우리가 의지할 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그분 앞에 설 때까지 그분만 붙들고 그분만 의지하고 그분을 전하며 살아야 한다.

민족의 대명절 추석이 이번주간에 있다.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분들이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러 산지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다. “살면 전도, 죽으면 천국이 말이 여러분의 심비에 새겨져 불타는 마음과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여러분의 가족에게 인생의 참 안식처와 영혼의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그 하나님, 그 예수를 꼭 전하시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입술을 통해 역사하실 것이다!

 

3. 정도(正道) (역대하 276)


성전에서 분향하려하다가 평생을 나병에 걸린 웃시야의 아들 남유다왕 요담의 이야기는 열왕기하 15장 후반부에 나오는데 그 병행본문인 역대하서 27장에 더 자세히 요담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기로 오늘은 역대하서 27장에 나온 요담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겠다. 요담은 남유다의 11대 왕으로서 20명중 왕 중 8명의 선한 왕에 해당되는 왕이다. 요담의 아버지는 성전에서 분향하려다 나병에 걸린 웃시야이다. 본문 2절 말씀에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요담이 여호와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다는 말이 문장이 뭔가 어색하다. 왜냐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면 밤낮없이 성전에 드나들며 하나님께 예배했다는 말이 나와야 맞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지 아니하였다는 말을 굳이 요담에게 쓴 이유는 무엇일까?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의 임무인 분향을 하려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평생 나병에 걸려버린 아버지 웃시야를 본 요담은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엄위하신 하나님이 두려워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유머) 보고 들은 대로 엄마 아빠 놀이를 하며 티격태격 싸움을 하던 아이들의 이야기

이것만 봐도 요담은 뭔가 범상치 않은 왕임을 알 수 있는데 요담은 성전의 윗 문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남동부의 800미터 구릉에 위치한 오벨성을 증축하여 수도 예루살렘 방비를 든든하게 했으며 또 외적의 침략에 대비해 유다산중 곳곳에 성을 짓고 요새와 망대들을 세워 적을 빨리 발견하고 격퇴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 나갔다. 그렇게 국방을 튼튼히 함과 동시에 군사력도 강해져서 암몬과 전쟁하여 대승을 거두고 암몬으로부터 은 일백달란트(3.4)과 밀과 보리를 일만석(고르)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조공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요담이 히스기야나 요시야 만큼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신앙과 나라의 경제 국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 그 큰 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붙들고 믿음의 바른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요담이 정도 즉, 바른길을 걸었는데 그 앞에 더해진 말이 있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이다. 내가 보기에 바른길, 사람 보기에 바른 길이 아닌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길을 걸었더니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와 복을 주셨는가? “점점 강하여졌더라고 말씀한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은 요담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데 9절에 기록된 대로 요담은 여호사밧 이후로 다윗성의 왕실묘지에 묻힌 첫 번째 왕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웃시야는 왕위에 오른 초기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2)” 행하였고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6)” 걸은 왕이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요담에게 복을 주셔서 점점 강하여지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다윗성의 왕실묘지에 묻히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하셨다. 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왕이 바로 요담이다.

우리도 지금까지도 인생의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날까지 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어떤 길을 걸어오셨고 앞으로 또 어떤 길을 걷기를 원하시는가? 요담처럼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으시길 바란다. 그 길은 바로 예수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요, 복음의 길이다! 그 길을 묵묵히 주님 손 붙들고 걸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점점 더 강하게 하시고 세상과 싸워 승리케 해 주실 것이다!

예화) 목회자로서의 정도를 걸었던 조영택 목사님과 그의 아들 조준모 형제의 신앙고백인 그의 생각찬양 이야기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민족의 대명절 추석을 허락하셨다! 우리의 생에 몇 번의 추석을 하나님께서 더 허락하실지 우리는 알수 없으나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간까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길을 걸어 점점 강하여지고 세상과 싸워 승리하는 복을 받아 누리시고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대대로 이어주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길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