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10월 1일 주일 설교 
여러 왕의 길 ( 왕하 16:1-4, 10-20  ) 
 
유머) 비행기 내에서 자리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진 할머니와 이 문제를 한번에 해결한 신사 이야기
우리의 신앙에 좀 굴곡이 있고 잘 섬길때도 있고 못 섬길때도 있고 기쁠때도 있고 슬플때도 있고 하지만 우리가 예수라는 비행기만 타고 있으면 어떤 자리에 있든지 우리는 영생복락 천국이라는 종착점에 도달하게 될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라는 비행기 속에서 아름다운 천사들이 나눠주는 영의 기내식을 먹으며 말씀 속으로의 여행을 떠나보자! 

1. 다윗의 길 vs 여러 왕의 길(2절 중반부, 3절 상반부)
이스라엘 나라가 마치 우리나라처럼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어진후 유다 나라는 소소한 반란들이 있었음에도 다윗왕가의 혈통이 계속 이어졌다. 그 가운데 여호람, 아하시야, 여왕 아달랴 등 악한 왕의 시대에 큰 위기를 만났다가 그 뒤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요담의 시기를 거치며 점점 안정되어 가는 비교적 좋은 흐름을 만나게 되었다. 그 과정에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고 바른길을 걸어서 점점 강하여졌던 요담 왕에 대해서 말씀을 받았다. 

오늘은 그 요담왕의 아들인 남유다의 제12대왕인 아하스가 그 주인공인데 아하스는 주전 735년경 20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선왕 요담까지 4대가량 이어져온 긍정적 흐름이 계속이어져야 하는데 오늘 말씀의 주인공 아하시는 이 흐름에 찬물을 끼얹은 왕이다. 아하스는 조금 발음을 잘못하면 엘리야와 바알의 갈멜산상 능력대결을 주관했던 이세벨 남편 아합왕과 혼동할 수 있는데 아합이 아닌 아하스이다. 실제로 아하스의 본명은 여호아하스 인데 요시아의 아들 여호아하스 라는 왕이 후대에 나오고 또 북이스라엘에도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있다. 그런데 이 아하시는 그가 특출나게 악한 왕이었기로 열왕기 저자는 요담의 아들 여호아하스에 대해 앞의 여호라는 말을 떼어나고 기록을 한 것으로 추정하는 구약학자들도 있다. 왜냐면 그의 행적들이 하나님 여호와를 생각나게 하기에는 너무나 비신앙적인 모습을 보인 악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난주 마지막 부분에 살펴본 요담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고 또 바른 길을 걸어서 신앙, 정치, 국방 모든 면에서 점점 강하여지는 복을 받았던 좋은 왕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그렇게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국사를 다스리는 것을 배운 아들 왕도 훌륭한 아들이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점점 강하여지는 복을 받은 요담의 아들인 아하스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행위를 특별히 악한 왕이었다. 

그래서 비록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대표적 선왕으로 기록된 다윗과 비교해봤을 때 2절 말씀에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여기서 다윗과 비교하는 열왕기의 평가를 좀 더 살펴보면 아하스에 대해 평가한 오늘 본문 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고 히스기야와 더불어 남유다의 가장 선한 왕으로 평가 받은 요시야 에 대해서 기록한 22장 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남왕국 유다의 왕에게 있어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고 또 다윗과 같이 행한다 하는 것이 하나님 편에 바로 서 있는지 아니면 바로 서 있지 않은지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그런데 이 아하스에 대해서는 단순히 다윗과 같지 아니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였다는 평가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유다의 왕에게 사용하지 않은 독특한 표현이 나온다.  그 표현은 바로 3절에 나오는데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3)”라 기록되어 있다. 
좀 생각을 하시며 말씀을 읽는 분들은 이부분에서 의아한 생각이 드실 것이다. 왜냐하면 남유다의 왕인 아하스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이스라엘의 왕의 길로 행했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 더 가관인 것은 3절에서 길에 해당하는 데레크는 밟다 라는 뜻의 동사 다라카의 명사형으로 계속 밟고 다님으로서 생겨난 길을 말한다. 그래서 히브리 원어 데레크는 지속적인 행위에 따른 삶의 패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기에 3절에서 말하는 이스라엘 여러왕의 길 이라는 표현은 아하스가 남유다의 왕임에도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던 이스라엘 여러왕이 했던 악한 길로 걸어가며 그들의 악한 행위를 답습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하스는 대체 어떤 악한 행위를 했기에 적국인 이스라엘 여러왕의 길로 행했다는 악평을 받게 되었을까? 

2.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3절 중반)
남유다의 역사에서 최악의 왕으로 기록되는 두 왕이 있는데 그 왕 중 하나가 아하스 이고 다음은 아하스의 손자인 므낫세이다. 이 두 왕은 몰렉 우상에게 자신의 아들을 바친 악한일을 행한 왕들이다. 이들이 인신공양 즉 자신의 아들을 바친 우상 몰렉은 성경에서 밀곰(왕상 11:5), 몰록(왕상 11:7;행7:43), 말감(렘 49:1)  등의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한 우상인데 왕을 뜻하는 말렉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하여 “너희 왕” 즉 “주인신 우상”을 말한다. 이 몰렉우상은 사람의 몸에 황소의 머리를 하고 있는 우상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후 들어간 가나안 지역에서 전승되어온 우상 전통이었다. 그런데 이 몰렉을 섬기는 악습들 가운데 특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암몬족 쪽에서 내려온 풍습 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어린아이를 몰렉에게 바쳐서 죽이는 인신공양(人身供養) 인신공희(人身供犧) 의  풍습이었다. 1세기 경의 고대 그리스 역사가인 디오도루스는 몰렉과 유사한 크로노스라는 농경신에게 바쳐진 인신제사 방법에 대해 묘사하였는데 우상이 손바닥을 바깥으로 내민 형태로 두팔을 벌리고 있었고 이 팔은 아래로 떨어지는 경사가 나 있었다. 따라서 살아있는 아이를 이 빨갛게 달구어진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그 아이는 이 팔을 따라 가운데로 굴러 떨어져 우상 중앙의 활활 타오르는 불속으로 떨어져 죽어갔고 이런 제사를 지낼때는 부모의 울음소리, 아이의 비명소리 등을 지우기 위해 엄청난 굉음의 북소리와 나팔소리로 이 비명을 묻히게 했다 한다. 이 얼마나 끔찍한가?  

예화) 경주에서 발견된 인신공희와 효녀심청 설화속 인신공희

아하스의 몰렉에 대한 인신공양은 무엇이 문제인가? 그냥 그 시절 동서양 막론하고 했던 행위이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가 없을까? 아하스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서 몰렉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명을 어기는 것도 모자라 자기의 아들을 바치는 악한일을 행한 것이 어찌 문제가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레위기 20:2-5절에서도 하나님께서 몰렉에게 인신제사 하는 것을 엄히 금하셨다.
말하자면 아하스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정도의 심각한 죄를 지었다. 이처럼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하나님 여호와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여러왕의 악한길로 가지 행한 아하스가 이런 끔찍한 악에 더하여 또 행한 것이 있다. 

3. 퓨전신앙(?) (열왕기하 10~11절)
오늘 본문으로 읽지 않은 열왕기하 16장 5절~10절에는 유다왕 아하스가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 베가의 동맹에 대항하기 위하여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굴욕적인 도움을 구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10절부터는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이 아람의 다메섹을 점령하자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다메섹에 갔다가 그곳의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을 보고 그 제단의 구조와 양식이 탐나서 그것을 본떠서 제사장 우리아에게 보내서 그대로 만들게 하였다. 그래서 아하스가 카피해온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이 그곳을 점령한 앗수르 의 스타일인지, 아니면 원래 다메섹을 수도로 사용한 아람의 스타일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것이 앗수르 스타일이든지 아람 스타일인지 중요한 점은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에 악한 이방의 우상들을 섬기는 제단이 다른 사람도 아닌 다윗의 후손 아하스를 통하여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아하스는 이렇게 이방의 제단을 본따서 자기 마음대로 여호와의 성전에 사용하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지낸다. 
즉 아하스는 자신이 마치 제사장인 것처럼 이방의 것을 도입한 신성모독의 제단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흉내를 내고 이에 더해 본래 여호와의 전 앞에 있던 단을 새롭게 만든 단 북쪽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러면서 원래 하나님께 제사로 올려드릴 제물을 태우던 단을 길흉화복을 물어보는 점을 치는 데 사용하는 단으로 격하시킨다.
그러니까 아하스는 자신의 편의대로 본 제사는 이방의 제단에서 드리고 원래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은 자신이 필요할때만 사용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이에 더해 아하스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의 성물인 물두멍과 놋바다를 훼손시키고 성전의 구조를 마음대로 변경시킨다. 유일신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과 그 예배의 형태가 이방의 것과 혼합되어서 잘못 되고 있다.

‘퓨전(fusion)’ 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라틴어의 ‘fuse(섞다)’에서 유래한 말로, 서로 다른 두 종류 이상의 것을 섞어 새롭게 만든 것을 뜻한다. 이것은 개성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현대에 새롭게 나타나는 한 형태로 이른바 퓨전 문화는 일상의 고정관념이나 틀을 과감히 제거한 새로운 어울림의 구현이라 하겠다. 그런데 세상의 문화는 퓨전재즈도 있고 퓨전음식도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세상의 문화, 철학, 사상과 대충 섞여진 퓨전신앙이 있다면 어떠할까? 

실상 이런 퓨전신앙은 고대로부터 기독교 혼합주의(Syncretism)라는 말로 배격되어 왔다.
혼합주의 가 어떤 철학사조나 문화현상에 있어서는 특별히 나쁜 의미를 가지고 있진 않지만 그것이 우리 기독교에 들어오게 되면 이것은 독버섯과 같이 우리의 신앙을 오염시킨다. 

 2700년전 아하스가 여러 왕들의 악한 길로 행하며 하나님의 성전안에 이방의 제단을 갖다 놓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제단은 점치는 제단으로 격하시켰듯이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이런 혼합주의 퓨전신앙이 교회안에 들어가 순수한 복음과 십자가 신앙을 오염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천주교에서 조상귀신을 섬기는 제사를 용인하는 것 등은 순수한 복음 신앙과는 거리가 먼 종교적 혼합주의의 한 예이다. 또 멕시코에서는 산타무에르테 라는 해골성모를 숭배하는 형태의 혼합주의가 유행하고 있다. 또 신앙생활 하면서도 사주팔자나 점을 치러 다니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또 다른 기독교 혼합 주의는 어떤 모습이 있겠는가? 
토론토 대학교 신학부는 토론토 대학내의 7개 신학교가 연합한 연합체 인데 그 가운데 두곳이 개신교 신학교이다. 그중에 한 학교는 신학교 인데도 지하에  모슬렘 즉 이슬람교인들을 위한 기도실을 가지고 있고 또 신학교 과목중 불교연구 와 불교와 기독교의 융합을 추구하는 과목 등이 정식 커리큘럼에 들어가 있다.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또 이런 잘못된 흐름들이 미국 캐나다의 일반 성도들 사이에도 들어와 많은 경우 기도를 마칠 때 “In your name we pray”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라고 기도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지 기도를 받는 그 당신이 누구 인줄 알고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는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자신들의 편의대로 퓨전식으로 하다 보니 동성애를 용인하고 신앙의 본질을 흐리는 쪽으로 변질되어간다. 

이처럼 오늘날 교회와 신학교 우리의 신앙생활에 들어와 있는 이런 잘못된 모든 사상의 근원은 바로 “만물 어디에나 신이 있고 누구나 신이 될수 있다”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에 근거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예수외에 구원이 없다고!
앗수르와 아람의 이방제단을 성전에 가져오고 하나님의 성전과 성물을 경히 여기며 온갖 악한일을 행했던 아하스에게 성경은 뭐라 증거하는가?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다고 말씀한다! 그렇다! 하나님을 섬기는 복음과 이방신을 섬기는 것, 또 다 신이 될수 있다는 범신론을 혼합하여 나름대로 신앙생활 하다가는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다 망하게 된다. 
아하스가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다 자기도 망하고 온 이스라엘도 망하게 한 것을 기억하자! 우리의 앞에도 신앙과 복음의 본질을 흐리는 혼합주의에 물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게 하는 공중의 권세 잡은자 마귀로부터 오는 여러 왕의 길이 있을수 있다! 그러나 꼭 기억하자! 우리는 여러 왕의 길을 갈 필요가 없다! 그 길이 좀 편하다고 그길이 좀 화려하다고 그길이 넓다고 그길로 가다가는 다 망하게 될것이다! 우리에게는 많은 왕도 필요 없다! 오직 우리의 영원한 왕이신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 필요하고 우리는 그 왕의 길, 그 주님의 길로만 걸어가면 된다!  그렇다! 우리앞에 주어진 길 그 왕의 길, 예수의 길, 복음의길, 십자가의 길 그길로만 걸어가자! 그러면 우리 앞에 하나님의 응답과 승리와 영생의 행복의 길이 열리게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