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열매(44) (2023.11.19)

감사의 은혜 ( 눅 17:11-19 ) 
      
1.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본문 11-13절 말씀을 함께 읽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성지 이스라엘의 지리를 잘 아는 분이라면 11절을 읽을 때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요단강 서편 북에서 남으로 갈릴리 – 사마리아 – 유다 이런식으로 배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말은 실제 길의 배치와는 맞지 않다. 그런데 왜 누가 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예수님의 행로를 기록했을까? 여기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오늘의 말씀을 받자. 나병환자는 3400여년전부터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사회로부터 추방되고 격리되어 있어야 했다.  혹시나 마을에 들어가더라도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치며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야 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나병환자 열명도 “예수를 만나 멀리서서”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예수님이 죽은 사람도 살리시고 여러 병자들을 고치셨고 심지어 나병환자도 고치셨음을 들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붙들고 그분의 손에 만짐을 당해야 하는데 가까이 갈수가 없다. 이른바 천형이라 불리는 나병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멀리 서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예수님을 만나야 고침을 받는데 그분이 만져주시면 내 병이 나을텐데 저 멀리 예수님이 보이는데 나병환자라 가까이 갈수가 없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이처럼 이른바 천형이라 불리는 이 나병은 우리 나라 근대사에서도 심각한 불치와 난치병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예화) 소록도 경험자, 한하운씨의 시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취급을 받는 이들이 열명이나 모여 있었으니 썩은 피고름이 덕지덕지 말라 붙은 그 행색과 그 악취, 쉬파리들이 붙어 있는 그 몰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야했고 그러기에 멀리서서 예수님께 외친다. 저 멀리 계신 예수님께 자신들의 간구가 들려야 하니 어떻게 외쳤겠는가? 당연히 큰 소리로 외치지 않았겠나? 그래서 말씀은 그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할수도 있고 온갖 수모를 당할것이 당연하지만 그 열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온갖 모욕과 멸시를 감수하면서까지 주님을 찾았고 그분께 나아간다. 그리고 가까이 가지는 못하지만 그분에게 소리 높여 말한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삶의 문제가 해결받기를 원하시는가? 우리의 삶의 질고를 대신 져주실 주님을 찾으시고 그분께 담대함으로 나아가시고 외치시라.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것이 모든 삶의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2. 보시고 이르시되
본문 14절 말씀을 읽자!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때 예수님께서 그 열명의 나환자의 소리를 듣고 그들을 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해 주신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보시고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 쪽을 바라보았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그렇다! 주님이 우리의 상황을 보시고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우리의 아픔을 보시게 만들어야 한다. 주님이 우리의 상황을 보시고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가? 거기에 더하여 또 이르시되 라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 그 열명의 나환자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그들의 간구에 그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즉 “그들의 상황을 보시고 말씀해 주신다” 그런데 그 말씀이 참으로 특이하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이왕이면 이리로 가까이 와라, 너희가 참 고생이 많구나. 그동안 외롭고 힘들었지? 아무 염려말아라! 내가 즉시 너희들을 고쳐주마 라고 말씀하셨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거나 아니면 나병환자들을 가까이 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냥 한마디 뚝 던지는 것이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 뿐 이었다. 어떤 나병환자들은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또 어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우리를 멸시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을수 있다. 예수님도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사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의도가 있는지 이해 되지도 않고 어떤 결과가 자신들 앞에 나타날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지만 그냥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며 뭉그러진 발을 이끌고 제사장에게로 걸어간다. 마치 지난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하인들이 물을 손 씻는 항아리의 아구까지 채웠을 때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이 나타난 것처럼 이 열명의 나병환자들은 그저 묵묵한 순종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로 가는 중에 갑자기 몸의 진물과 고름이 멈추고 새살이 돋아나며 심지어 끊어졌던 손가락 마디에서 새 손가락이 생기고 무릎 아래로 잘려있던 목발을 짚고 가는 이가 어느 순간 양발로 서 있는 놀라운 일이 생겨났다. 이들은 자신의 모습 뿐만 아니라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도 어떻게 이럴수가 하면서 환호와 비명을 질러댔을 것 아닌가?  열명의 나병환자들이 다 고침을 받았다. 그런데 그 시점에 대해 말씀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예수님이 어떤 성수나 맑은 물로 그들을 씻어주거나 그들을 만져주시거나 머리에 손을 얹어주신 것도 아니고 그냥 멀리 떨어져서 그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그 단순한 말씀 한마디 만 하셨는데 이들은 아무런 조건 과 토 다는 일 없이 무조건 순종 하여 그냥 제사장에게로 걸어갔다! 그랬더니 그들이 길을 가는 도중에 깨끗하여 졌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 그저 주님 말씀이라면 계산하거나 따지거나 하지 말고 무조건 순종 하고 묵묵히 순종하여 가라는 곳이 있으면 가자! 그러면 나병이 깨끗함을 받는 것 같은 주님 주시는 기적이 나타난다! 

3. 감사에서 구원으로 
본문 15-17절을 읽자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열명의 나환자는 깨끗함을 받았다. 그 놀라운 기적의 현장에서 그들을 한시라도 빨리 제사장을 만나 자신이 나았음을 확인받고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또 제사장을 만나 몸을 보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이자 또한 모세의 율법 아닌가? 그러니 꼭 지켜야 된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한사람이 자기의 나병이 나은 것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병에서 나를 고쳐주시니 감사합니다! ” 하면서 소리를 치며 돌아왔다. 그러다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려서 감사했다고 말씀은 기록하고 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때는 가까이 가지 못하고 저 멀리 서서 소리만 높였다고 말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려 감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사람의 정체가 드러난다. 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원래 상종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들이 한 공동체로 어우려져 있을수 있었던 것도 서로 나병에 걸려 있다는 동질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이 순수한 유대인도 아닌데 예수님의 명령대로 제사장을 만나러 간다 한들 그들에게 과연 환영을 받을수 있었을까? 또 사마리아 사람이 굳이 모세의 율법을 따라 몸이 나았다고 제사장에게 나병에서 고침 받았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을까? 나병이라는 같은 병에 걸림으로 한 공동체 속에서 뭉퉁거려 지내온 사마리아 사람과 나머지 아홉명의 유대인 환자들은 이제 나병에서 고침 받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나병환자의 공동체를 유지할 필요도 없고 또한 유지할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 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병을 고쳐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있고 나머지 아홉명의 유대인들은 특별히 감사하지 않음을 보면서 사마리아 사람으로서 유대인 제사장을 만날 수 없음이 그 배경이 되었음을 확인할수 있다. 

그러니까 말씀 초반부에 언급한 오늘 본문 11-12절 상반부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라는 지리적 순서를 따지지 않는 것 같은 이 표현은 바로 열명의 환자중 하나님께 유일하게 감사한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키기 위한 배경이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쳐주신 그 기적에 대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한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고 물으셨다. 같은 은혜와 치유를 받고도 그 은혜에 감사한 사마리아 사람과 은혜를 입고도 감사할줄 몰랐던 9명의 유대인들의 대조를 통해 누가는 유대인으로부터 배척받아 십자가를 지시게 될 예수님과 여인과 아이들 이방인 과 같은 당시 사회에서 약하고 힘든 소외계층의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더 잘 섬기게 될 것을 예표하고 있다. 이처럼 유일하게 다시 예수님께 찾아온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의 치유를 넘어선 더 큰 은혜를 경험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는가?  19절 말씀이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했더니 그것은 곧 믿음의 표현이었고 그 믿음은 그 사마리아 인 환자를 구원하는 놀라운 은혜를 더 입게 되었다. 병이 고쳐진 치유의 기적이 단순한 기적을 넘어서서 구원의 역사로 바뀌게 되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기적에서 구원으로 덤으로 받은 은혜의 체험을 한데는 바로 베푸신 은혜에 대해 감사하면서 이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자! 유익을 주니까 해야 한다는 이 감사는 얼마나 저차원의 감사인가? 이제는 누구누구와 비교해서 얻는 상대적 감사를 넘어서서 나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자체로 감사하자! 남과 비교해서 얻는 상대감사가 아니라 있는 그 자체로 감사하게 되는 절대감사가 차고 넘쳐서 감사의 삶이 평생이어지는 2023년 추수감사절 홈커밍데이가 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