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려보냄 마 22:34-40
1. 시험
예수님 당시 크게 구약을 믿는 유대교의 세 종파가 있었다.
첫째는 엣세네파(엣세네파.jpg) 인데 이들은 ‘경건한 자들’이란 뜻의 히브리어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금욕과 극단주의적 신비주의 종교생활에 주력하였다. 성경해석에 있어 바리새파와 비슷한 입장을 가졌으나 모세오경과 선지서를 더 중시하며 금욕과 공동 은둔생활, 종말 신앙을 바탕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사해사본등 소중한 성경사료를 남겼다. 이들은 특별히 예수님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둘째는 바리새파(바리새인과 사두개인.jpg) 인데 이들은 '분리된 자, 구별된 자'란 뜻의 히브리어에서 유래되어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고 장로의 유전으로 불리는 전통을 준수하여 유대인에게 큰 신망과 존경을 받았고, 또한 회당 조직을 통해 당시 종파 중 가장 큰 세력을 형성 하여 유대 사회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는 사두개인들인데 이들은 다윗시대의 제사장이었던 사독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분파인데 이들은 제사장 그룹을 독점하고 산헤드린 공회의 다수 의석을 차지 하여 바리새파 와 함께 산헤드린 공의회를 좌지우지하였으며, 부활과 내세와 영적존재 등을 부정하여 현실주의자로 손꼽히는 이들이었다.
오늘 본문 34절에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라고 기록하고 있다. 본문 직전에 있었던 해프닝에 근거한 말씀인데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상속자를 세우기 위해 형제 일곱명의 부인이 되었던 사람이 죽었다가 나중에 부활때에 누구의 부인이 되겠냐는 질문을 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부활하게 되면 시집과 장가 가는 일이 없을 것이니 천사와 같을 것이고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 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 이라 답을 하여 그런 질문을 한 사두개인들의 말문을 막히게 하신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 소식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자신들과 달리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 앞에서 그 코가 납작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자축하고 또 자신들과 같은 유대교 분파인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의 지혜 앞에 당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종의 위기감을 느끼면서 예수님 앞에 모여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세분파 였던 에세네파, 바리새파, 사두개파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에세네파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는 정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주로 광야에 거주하며 금욕적 생활로 하나님 앞에 바로 살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서기관과 제사장 계층을 주도하며 구약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하며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하며 교만하며 예수님을 시험하다 급기야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앞장서는 죄악의 앞잡이가 되버리고 만다.
오늘날 교회안에서 함께 생활하며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이들 가운데도 비교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겠다 노력하는 에세네파 같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신앙은 옵션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유익하게 가져다 쓰면서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같은 이들도 있다. 다 나는 적어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아니라고 생각하실 것이다. 주님 보시기에도 과연 그러할까? 진실로 그러시길 간절히 바란다.
2. 하나님을 사랑하라!
바리새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 트집을 잡기 위해 예수님을 공격하는 전면에 나선다. 서기관과 율법사가 바리새인들 가운데 많이 있을 텐데 그 무리들 가운데 대표로 나설 정도라면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언변도 출중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선생님’ 이라고 부른다. 율법사가 사용한 선생님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일상적인, 요즘 표현으로 영혼없는 표현에 불과하다.
오늘날도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와 더불어 예수님을 4대 성자의 하나로 여기며 예수님을 주님이 아닌 역사상 큰 선생이나 철학자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어떤 삶의 바른 윤리나 마음의 위로를 주는 좋은 말씀을 많이 하신 분 정도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꼭 기억하자! 예수님은 단순한 선생이 아니고 우리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이시며 삼위일체 창조주 하나님의 한분이시다.
율법사는 영혼없고 적당히 예의를 갖춘 표현인 선생님 이라 예수님을 부르면서 613개의 율법의 계명 가운데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가를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신명기 6장 5절을 인용 하신다.
이 말씀은 4절에 들으라 이스라엘 로 시작하는 표현의 구절인바 이른바 쉐마 이스라엘 이라 불리는 유명한 말씀이다. 신명기 6장 5절에서는 마음 뜻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는데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는 마음 목숨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고 기록되어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 말씀하셨다.
예화) 교황 율리오 1세의 이야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그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삶 즉 순종을 말한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시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길 바란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는 길이다.
3. 네 이웃을.....사랑하라!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라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답은 여기서 끝나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라고 표현하시며 첫 번째 계명과 중요도 면에서 동일한 계명이라시며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신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을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은 이웃의 범위를 자신의 주위에 가까이 있는 다른 사람이나 친구 정도로 한정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애를 통해 만나기 꺼리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이웃의 범위에 포함 시키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의 말씀은 예수님의 온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졌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강권적으로 허락하신 이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와 사랑을 삶으로 따르며 실천하며 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의 실천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모든 율법을 다 요약한 마태복음 22장 37절~ 40절 의 지상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을 말씀으로 허락하셨다.
이 지상대계명과 지상대명령은 우리 한 개인에게 이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한정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그 복음을 이웃에게 전하라 말씀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 오실 그 날까지, 또 우리가 주님 앞에 설 그날까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우리의 사명이다.
예화) 한국리서치에서 보여준 한국교회의 호감도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말로는 외치는데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는 그런 모습을 하면서 우리가 진정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흘려 보내는, 주님의 사랑과 그 십자가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나 자신과 우리, 또 우리 교회라 말할수 있을까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 봐야한다.
사명지향적 교회! 다시 복음, 다시 십자가를 외치며 그 이가 바뀌고 아무개 장로가 바뀌고 아무개 권사가 바뀌면 될것이라는 남에게 바꾸고 업그레이드 하시라 말하지 말고 나 자신부터 우리 부부부터 우리 가정부터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작은 모습부터 실천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 사랑을 드러내고 작은 사랑이라도 할수 있는 부분과 영역부터 주님 주신 사랑과 은혜를 나의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녀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을 비롯한 우리 교회의 영적 식구들에게부터 흘려보내는 삶을 이제부터라도 시작하여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의 지상대계명을 삶으로 행하기 시작하는 귀하고 복된 삶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