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복음! 다시 십자가! (6) (2024. 02. 11)
복이 있나이다 (시편 84:1-12)
유머) 부부싸움 할 때마다 5km를 걷기로 하여 100살 가까이 되도록 건강하게 지내는 한 노부부 이야기
1. 만군의 여호와여(1절)
민수기 16장과 26장에는 고라와 다단, 아비람, 온 등이 작당하여 출애굽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세운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고 반역을 꾀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 땅이 갈라져 그들을 삼켜 죽이는 징벌을 당한 것을 적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라의 반역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후손들을 살려 두시고 또 그들에게 회복의 기회를 허락하셔서 찬양하는 이들과 성전문지기로 삼아주셨다. 그래서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이나 다윗왕 때의 찬양인도자 헤만 등이 고라의 자손만큼 큰 은혜를 하나님께서 고라의 집안에 베풀어 주셨다. 고라는 비록 교만에 빠져 큰 징벌을 받았으나 그의 악행에 동참하지 않은 후손들은 하나님께서 살길을 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회복의 은혜를 더하여 주신 것이다. 얼마나 큰 은혜를 주셨냐면 역대상 9장 19절에는 고라자손 중 일부가 성막의 문을 지키는 자가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으며 고라의 증손 에비아삽의 손자 고레의 아들 살룸과 그의 종족 형제 곧 고라의 자손이 수종 드는 일을 맡아 성막 문들을 지켰으니 그들의 조상들도 여호와의 진영을 맡고 출입문을 지켰으며 또한 역대상 25장 에는 다윗의 성전 찬양대의 24반열의 조직을 명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고라의 자손인 헤만의 아들들이 총 스물 네명의 반열 가운데 열 네명이나 차지하고 있다. 즉 다윗성전의 찬양대의 약 60퍼센트가 고라자손이 찬양을 담당하는 복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시편의 모든 시가 다 간절하고 은혜가 있지만 특히 고라자손의 시는 이러한 출애굽 당시 있었던 선조 고라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 자손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그 의미가 더 깊게 다가오고 더 큰 은혜가 우리에게 임한다. 고라자손은 자신들의 선조인 고라의 죄악을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 도저히 나설 수 없이 삶의 패배자, 은둔자, 낙오자 로 평생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인생으로 전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시고 회복과 용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넓은 은혜의 품을 늘 생각하며 반역자의 후예라는 자신들의 주어진 모습과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묵묵히 주님의 일을 감당한 진정한 승리자들 이었다.
우리의 죄악된 모습, 부족한 모습, 약한 모습, 없는 모습, 병든 모습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시고 열납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앞에 오늘도 자신 있게 서시는 주의 자녀들이 되시라! 오늘의 본문 말씀인 시편 84편은 고라자손이 쓴 시이다. 혹 자들은 이 시는 예루살렘을 순례하거나 예루살렘의 성전에서의 제사를 고대하는 제사장 이든지 익명의 저자 가 쓴 시를 고라자손이 잘 수집 보관했다가 이것이 시편에 수록되었다 주장하기도 하나 그 근거는 빈약하다. 시편 84편의 말씀은 먼저 만군의 여호와여 라고 하나님을 부른다. 구약 성서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여러 표현 가운데 개역개정판 한글 성경에 273번이나 나오는 표현이 바로 “만군의 여호와 또는 만군의 하나님, 만군의 주” 라는 표현이다. 특히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원어로 모두 255번 언급되는데 오늘 본문인 시편 12편에서도 1절, 3절, 8절, 12절 무려 네 번에 걸쳐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 (야웨 차바오트; יְהוָה צְבָאֹות׃) 라고 부르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이시며 창조주 이신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을 의미하여 택하신 선민 이스라엘의 완전한 보호자이시며 그들을 평생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즉 만군의 여호와는 전지전능하시고 강력한 힘을 가지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즉 시편 기자는 어떤 상황속에서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는 강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가는 순례 길에 있는 시편기자도 어떤 어려움과 환란 속에서도 지켜 주실 것이라는 마음의 확신을 담아 만군의 여호와여 라고 하나님을 부르고 있다. 삶이 힘들고 지키고 어려울 때 “야웨 차바오트”,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여러분을 지키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만군의 하나님을 부르며 그 능력으로 덧입어 주님의 이끄심을 삶으로 체험하는 귀하고 복된 주의 자녀들 다 되시길 간절히 바란다!
2.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2절)
예화) 동진희 학자 간보가 4세기경 지은 <수신기>에 나오는 상사병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
2절 말씀에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라는 표현을 보면 떠오르는 병이 있다. 무언가를 사모하여 병이 생긴 것 즉 이 병은 어떤 병일까?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그리움이 커서 잊지 못할 때 생기는 그리움의 병, 상사병(相思病)/ lovesickness 이다. 이 병은 의학용어는 아니지만 현상적으로는 존재하고 있는 일종의 성장통과 같은 마음의 병이다. 그런데 2절은 바로 성전을 향한 상사병을 나타내고 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고 성전을 사모하면 성전에 대한 상사병에 걸려 쇠약해지기 까지 했을까?
지금은 먼 옛날의 이야기였던 것처럼 우리가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불과 2년전만 해도 우리는 이른바 비대면 예배를 강요받고 주의 성전에 모여 마음껏 예배 할 수 없었다. 그때는 얼마나 성전예배를 사모했는가? 그때는 그토록 간절히 성전에 모여서 예배드리기를 사모했는데 이제 다시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이제는 오히려 이런저런 핑계로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심지어 교회에 와서도 봉사한다고 다른 일은 하면서 예배는 드리지 않는 분들도 있다. 또 주일 예배는 드리지 않고 다른 일은 하고 예배드리지 않음을 합리화하는 일들이 있다. 분명히 말씀드린다! 이것은 바른 신앙인, 예수 잘 믿는 사람들, 바른 예수쟁이의 모습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모습이다. 기억하자!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지 안 드리는지 또 예배의 자리에서도 집중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생각에 빠져 시간만 보내고 앉아 있는지 마음의 중심을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신다.
사랑하는 주의 자녀 여러분!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자! 주님을 사모하자! 성전에 대한, 주님에 대한 사랑에 흠뻑 젖어들고 참된 예배자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자! 그러기에 시편 84편 기자의 이 고백이 우리의 평생 고백이 되어야 한다. 84편 10절 말씀이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의 두발로 걸어서 주의 전에 나올 수 있을 때 더 많이 주의 전을 찾고 할수만 있으면 주의 전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3. 복이 있나이다 (4,5,12절)
먼저 5절 말씀을 주목해보자. 5절에는 우리가 기도 할 때마다 자주 쓰는 표현이 하나 나온다. 그것은 바로 “시온의 대로”라는 표현이다. 우리는 흔히 이 표현을 삶의 나아가는 인생의 험난한 광야 길을 하나님께서 평탄한 대로처럼 넓은 길로 활짝 열어주시라 하는 우리의 소망을 담아 이 표현을 사용한다. 그렇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질고와 고난,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풀어주시고 열어주시고 응답해 달라는 우리의 바람을 담고 있는 표현이라 하겠다. 이 단어의 원 의미를 알면 우리의 용어 사용이 좀 더 명확해질 것이다. 먼저 “시온의 대로”라는 표현은 개역한글판 성경에 단 한번 오늘 본문 인 시편 84편 5절에서만 사용되는 표현이다.
그런데 5절에서 “시온의 대로”라고 사용된 부분은 실제로 시온 이라는 단어는 히브리 원어나 NASB를 제외한 영어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한글 성경의 의역이다. 7절 말씀에 나오는 시온을 가져다가 뜻을 더 명확히 하고자 한글 번역자들이 사용한 표현이다. 그러니까 “시온의 대로”라는 표현은 한국교회 안에서만 주로 쓰이는 표현으로서 시편 기자가 사용한 첫 의미는 시온에 있는 성전에 가고는 싶으나 여러 삶의 정황상 갈 수 없는 자들이 성전과 그 곳에서 하나님께 드렸던 온전한 제사 즉 예배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즉 시온의 대로의 의미는 우리의 삶의 영원한 인도자 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감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기에 5절 말씀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음은 삶의 광야 길에서 만나게 되는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가장 좋은 것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복된 것으로 응답하실 그분의 인도하심을 믿고 인내 가운데 따라갈 것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안 될 때 힘들 때 잘 안 풀릴 때 문제가 생길 때는 새벽기도도 하고 작정기도도 하고 금식기도도 하고 기도부탁도 하면서 갑자기 겸손해 져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해결되고 그 시기가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나태하고 교만한 신앙의 모습으로 돌아가 약을 의지하고 병원을 의지하고 물질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고 나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문제의 해결사로만 인식하고 이용하고 있지 진정한 내 삶의 주인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진정한 복 있는 자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 복이 있는 자들은 어떤 환경, 성전에 있든지, 순례 길에 있든지 아니면 어떤 곳에 거하든지 하나님을 바라고 예배하고 의지한다. 아프든지 건강하든지 물질이 많든지 적든지 기도가 응답이 되든지 안 되든지 상황이 되든지 안 되든지 허락하신 모든 상황 가운데 예배하고 찬양하고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의지하자! 그런 사람이 복 있는 자이다!! 진정 복 받길 원하시는가? 그렇다면 주의 성전이 있고 하나님의 눈이 머물고 계신 그 시온을 향한 마음의 대로를 더 활짝 더 넓게 열어서 주님을 향한 그 간절한 열망의 마음을 삶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지켜나가시길 간절히 바란다. 그렇게 되는 분들은 입술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복이 있나이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시온을 향해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우리의 삶이 항상 기쁘고 즐겁고 응답이 차고 넘치고 행복하면 좋으련만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기에 오늘 시편 기자는 6절 말씀에 이런 표현을 쓰고 있다. “눈물 골짜기” 이다.
순례자들이 시온을 향해 나아갈 때 물도 없고 모래 바람이 불어 눈을 뜨기도 힘들고 숨을 쉬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또 물도 부족하여 많은 고통과 눈물 가운데 그 골짜기를 지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적당한 곳에 많은 샘을 만들어 놓고 계시고 또 이른 비가 내려 순례자들의 목을 채워주었음을 말씀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지금 혹시 눈물골짜기를 지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주의 자녀들 계시는가? 하나님이 많은 샘과 이른 비로 기다리고 계심을 믿으시라! 이제 우리의 마른 목을 채워줄 많은 샘이 우리 눈에 보일 것이며 이른 비가 내려 우리의 살길을 열어줄 것이다.
예화) 사랑하는 아들을 생사의 기약없이 전장으로 떠나보내며 눈물로 찬송시를 기록하며 찬송가 492장을 만들어낸 챨스 허츤슨 가브리엘 이야기
그렇다! 주님을 손 붙들고 걸어가지만 우리의 인생길은 눈물 골짜기 이고 광야길이다! 혹시 지금 그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고 계시는가? 삶의 무게와 짐들이 여러분을 버겁고 하고 힘들게 하시는가? 힘을 내시라! 우리가 주님 계신 성전을 바라보고 그 상황속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걸어간다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많은 샘과 이른 비를 곧 만나게 되실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눈물골짜기를 많은 샘과 이른 비가 있는 “시온의 대로”로 바꾸어줄 것을 기대하며 오늘도 내일도 남은여생도 성전을 향한 시온의 대로를 마음에 두어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삶의 시온의 대로를 열어주실 것을 기대하며 주님 손 붙들고 승리하시길 간절히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