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러 가시다 마 21:1-11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기 위해서 바로 칸 영화제의 상징인 종려나무 잎을 흔들었다하여 종려주일(Palm Sunday)로 불리는 날이다. , 혹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다 하여 고난주일 또는 수난주일로 불리는 그런 주일이다. 오늘부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심을 기리는 고난주간(수난주간 Passion Week, Holy Week) 이 시작되어 부활절 직전까지 계속된다. 그래서 오늘 종려주일은 고난주간 1일차 이다. 거룩한 종려주일 우리를 위해 죽으시러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그분의 음성을 받자!
1.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
예수님의 고난주간의 이야기가 이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내용으로 시작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전날 밤 즉 토요일에 베다니에서 쉬셨다. 그리고 주일이 되어서 감람산 기슭의 벳바게 로 이동하셨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3키로 미터 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즉 이미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러 갈 장소인 예루살렘 에 거의 도착해 계셨다. 이제 자신이 예루살렘에 죽으러 온 것을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정이 되었기로 예수님의 입성은 비밀리에 은밀히 진행되어서는 안되었고 사람 들의 눈에 띄도록 요란스럽고 널리 알려져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입성 이벤트는 이미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계획되어 있었다. 벳바게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말씀하신다. 이 두제자가 누구 였는지 성경에는 정확히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 였던 베드로와 요한 이었을것으로 추정한다. 이 두제자에게 맞은 편 마을로 가면 아직 나귀와 나귀새끼가 줄에 매여 있을텐데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라 말씀하신다.
2. 주가 쓰시겠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때 예수님 말씀대로 주인들이 나타나서 묻는다. 당신은 누군데 남의 나귀를 함부로 푸는거요? 그때 두 제자가 대답한다.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인들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나귀들을 보내주었다! 그 주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성령님의 신비한 역사로 순간 마음이 감동되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지극히 우연처럼 보이는 이 상황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일면일 뿐이다!
예수님을 태웠던 새끼 나귀는 태어나는 때부터 모든 것이 예수님을 태우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준비 되었던 존재였다. 제자들이 감람산 벳바게 마을에 도착한 것도 또 그 맞은편 마을로 나귀들이 주인을 따라 간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였다. 두 제자가 예수님의 이해할수 없는 명령을 받고 의아해 하며 벳바게 건너편 마을로 들어감도 두 나귀가 주인의 손에 이끌려 산책을 하다 갑자기 한 말뚝에 줄이 묶여 잠시 숨을 돌리게 됨도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간구와 기도제목을 날마다 하나님 앞에 아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된것이라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일은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보지 못하는 가운데 이미 시작되어 그것이 드러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시라! 내가 인식하지 못한다 하여 하나님이 가만히 침묵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임계점(critical point) 이라는 말이 있다. 임계점이란 어떤 물질의 구조와 성질이 다른 상태로 변화할 때 온도와 압력, 즉 물질이 액체상과 기체상이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는 최고 가능 온도이다. 예를 들어 물의 임계점은 1기압에서 섭씨 100도이다. 50도나 60도가 되어도 물은 끓지 않고 90도가 95도가 되어도 물은 끓지 않는다. 그러나 100도가 되기만 하면 물을 끓기 시작하여 그 물이 증기가 되어 엄청난 에너지로 변해 기차도 움직이고 배도 움직이는 것을 기억하시라!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해서 내가 알지 못한다 하고 내가 인식하지 못한다 하여 하나님이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자녀된 우리를 위해 이미 일을 시작하시고 이제 곧 그것을 드러내실 그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오늘도 내일도 위로와 힘을 얻으시는 주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한다!
3. 죽으러 가시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다면 백마나 적토마 수준은 아니더라도 좀 화려하고 멋진 말을 타고 들어가셔야 격이 맞을텐데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은 이미 오래전 전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것을 이루려 하심이다. 스가랴 9장 9절 말씀이다. 말씀대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말씀대로 사시고 말씀대로 복음을 전하셨으며 이제는 말씀대로 죽으시기 위해 말씀대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십자가를 지시러 들어가신 이 입성의 장면은 승리의 입성 ( The Triumphal Entry) 이라 부른다. 초라하고 우스꽝스럽고 어찌보면 안쓰럽기까지 한 이 입성에 승리의 입성이라는 역설적 표현이 붙은 것은 곧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죽기까지 복종하고 순종함으로 겸손의 모범을 보이셨던 그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마귀의 참소에 대해 영원하고도 완벽한 승리를 남기실 것이기에 이 장면을 승리의 입성이라 부른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예루살렘 성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나귀새끼 타고 입성하실 때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곁옷을 길에 깔며 또 나무를 길에 깔았다고 마태와 마가는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종려나무 표현이 나오는 것은 요한복음 12장 12-13절에 한번만 언급되어 있다.
우리가 4복음서의 기록을 종합해서 예수님의 승리의 입성 장면을 그려봤을 때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을 찾아온 순례자들이 종려나무 가지와 자신들의 옷을 마치 레드카펫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을 태운 나귀의 길 앞에 깔아놓고 또 일부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로마시대 종려나무가지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상징이었고 감람나무 잎은 평화의 여신 팍스의 상징이었다 한다. 그래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곧 승리의 축하하며 또 그런 승리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기쁨과 희망의 표시였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명절에 큰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고 또 여기에 베다니에서 나사로의 살아남을 보거나 들은 자들이 일종의 순례자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기 위해 합류했음을 요한복음은 증거하고 있다.
그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던 것은 바로 호산나 호산나 라는 외침이었다! 마태는 이 장면이 마치 지진이나 소요가 난 것처럼 온성이 소동하였다고 증거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마태 21:10)
이 놀라운 승리의 입성뒤 불과 닷새 뒤 일어난 십자가의 현장을 보시라! 수많은 사람들이 .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호산나 호산나 외치다가 이제 그 예수를 안다는 이유로 따라다녔다는 이유로 추종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손해를 보고 잘못하면 죄인으로 전락되어 잡혀갈수도 있는 상황이 되자 뿔뿔이 다 흩어지고 제자들도 다 도망가고 수제자라는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 부인하고 또 어떤이들은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외쳤던 입술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는 최악의 변절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뭔가 자신에게 이익이 생길것으로 기대했던 입술에서 호산나를 외치다 이제 별 유익이 없을 것 같고 오히려 손해 볼 것 같으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x2) 외치는 2천년전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나와 가정을 위해서는 내 유익과 이익을 위해서는 예수를 찾고 매달리나 그분을 위해서는 그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는 어떤 헌신과 손해도 용납하지 않고 외면하고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외쳤던 그들처럼 주님과 몸된 교회에 생채기를 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를 위해 당당하게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기리는 이 종려주일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우리의 모습을 되돌다 보시길 간절히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