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4월 21일 주일 설교  
거기서 나를 보리라 마 28:5-10, 15-20

1. 살아나셨느니라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인 28장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나버린 육신의 예수님의 이야기에 이어지는 변화된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에 대한 일종의 에필로그이다. 먼저 지진이 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냥 지진도 아니고 큰 지진이라 말씀한다. 부활절 새벽 두 여인이 다른 곳도 아닌 무덤 앞에서 땅이 흔들리는 큰 지진을 경험했을때의 그 놀라움과 충격, 두려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지진후에 천사라니? 지진의 공포에 더해 두려움과 천사를 직접 보는 것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 드는 그 때에 그 천사가 예수님이 장사되신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을 굴린다. 그리고 그 천사가 그 돌 위에 앉았다. 여인들이 무덤에 간 그 타이밍에 왜 천사는 내려와서 돌을 굴려 무덤 문을 열었을까? 이미 비어 있는 무덤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돌을 굴려 무덤문을 연 것이다. 천사가 돌문을 옮기고 난 후 “어서 무덤 속으로 들어가보아라! 예수님이 이제 곧 부활하신단다!” 라고 외치고 두 마리아가 두근거림과 설렘을 안고 무덤속으로 뛰어 들어갔더니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밝은 빛이 비추면서 세마포에 쌓인 예수님의 시신을 비추고 예수님의 시신이 천천히 빛에 감싸여 무덤 속 공중에 떠 있다 다시 천천히 누이신 곳에 내리고 그 장면에 이어 칭칭 감은 세마포가 꿈틀거리다 예수님이 살아나신다면 그 장면이 얼마나 극적이었겠는가? 그런데 그 어떤 성경도 예수님이 살아나신 그 부활의 순간을 그리고 있진 않다. 왜 하나님께서는 가장 명확하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성경에 적을 수 있는 그 놀라운 순간을 마리아 나 제자들에게 보여주지 않으셨을까? 부활하시고 난 후 천사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알리고 비어 있는 예수님의 누우셨던 자리는 확인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결정적인 그 순간은 사람들에 띄지 않게 감추셨다. 그 순간을 우리에게 보이시지 않은 하나님의 깊은 의도는 피조물인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으나 부활 그 자체가 우리의 이성과 지식, 경험으로는 봐도 알수 없고 이해할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의 장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나 이것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 봐야 이해가 되기 때문에 일종의 충격완화기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천사와 빈무덤을 통한 간접적 방법으로 먼저 마리아들에게 부활에 대해 알리고 이후 예수님께서 변화된 몸으로 제자들을 찾아가신 것이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그 전생애는 신비 그 자체 아닌가? 그렇다! 예수님의 태어나심, 삶,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승천 재림주로 다시 오심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비밀이요, 신비이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그 신비와 비밀이 모두 믿어지고 그 신비한 능력을 힘입어 날마다 승리하는 삶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바란다! 

2. 붙잡고 경배하니
두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다는 말씀을 들었다. 또 천사가
말하기를 빨리 가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는 말을 전하라 하였다. 여인들의 마음에 대해 8절 말씀은 무서움과 큰 기쁨 이라는 교차 하는 모순되면서도 복합적인 마음 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큰 지진과 천사, 그리고 죽은 것처럼 된 경비병 등을 봤을 때 생긴 놀라움과 무서운 감정에 이어 천사가 전해준 예수님 부활의 소식 그리고 갈릴리로 먼저 가 계실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라는 말씀은 큰 기쁨의 소식이었기에 무서움과 큰 기쁨의 감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래서 빨리 이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속도를 내서 뛰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그들이 달려가는 길 가운데 어디서 많이 뵌 듯한 분이 서 계셨으니 그분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 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 평안하냐고 물으셨다. 그런데 이때 평안하냐는 예수님의 여인들에 대한 첫 인사는 우리가 잘 아는 헬라어 에이레네로 변역된 히브리어 샬롬이 아니었다. 헬라어 카이레테(χαιρετε) 인데 이 말은 기뻐하다 라는 단어인 카이로에서 나온 단어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부활로 변화된 모습을 여인들에게 보이시며 “기뻐하거라” 라고 말씀하셨다! 즉 무서움과 큰 기쁨의 모순된 마음으로 부활의 소식을 전하러 뛰어가는 여인들에게 부활의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다 버리고 오직 기뻐하기만 하여라 고 말씀하고 계신다! 부활의 복음은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할 십자가나 짐이 아니다! 부활의 복음은 오직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이기에 부활의 복음을 대할 때 우리는 무서움과 기쁨이 교차할 필요가 없다! 그저 기쁨과 감사만 넘치시기를 바란다! 여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복 기뻤는지 예수님 앞에서 엎드려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다. 이것은 부활의 주님 앞에 드리는 첫 순간의 예배였다. 또한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변화된 몸을 처음으로 터치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말씀대로 행하고 복음전파의 사명을 행하기 위해 사명 지향적 삶으로 인생길을 달려갈때에 그 길 어딘가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실것이다! 그때 그 주님 앞에 그 여인들처럼 무릎을 꿇자! 그리고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발이라도 붙잡고 그분께 경배하며 작은 예배를 드리자!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인생은 놀랍게 변화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물질과 건강과 삶의 모든짐들을 주님께서 맡아주시고 승리케 하실것이다! 

3. 갈릴리로 가라!
두 마리아를 길에서 만난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의 경배를 받으신 후에 여인들에게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으로 만나 부르심을 받았던 소명의 장소이다. 그래서 그 첫사랑의 장소인 갈릴리로 돌아가서 처음 갈릴리 호수에서 세관에서 부르심을 받았던 그 첫사랑, 그 초심의 회복을 할 것을 주님은 기대하신 것이다. 그리고 또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과 전도의 장소였다. 그 갈릴리의 길 위에서 많은 병자를 고치고 그 갈릴리의 벌판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행해졌고 그 갈릴리의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이 쫓겨나갔다. 그 모든 놀라운 복음 전파와 기적의 경험을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공유했던 곳이 바로 갈릴리 땅이다. 그래서 그곳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다. 부활의 주님에 대한 확신 없이 갈릴리로 모여든 제자들은 3년의 소중한 세월을 허비한 인생, 스승을 배반한 인생, 밑바닥까지 탈탈 털린 실패한 인생들이었다.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고향이요, 첫사랑의 장소이자 복음전파의 근거지, 또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로 그들을 부르셔서 그들이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더해 주신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제자들처럼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상처받고 늦어지는 응답에 불안해하며 특별히 하는 일 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그 상황 속에서 주저 앉아 있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갈릴리로 가라! 우리가 주님을 처음 만났던 그 첫사랑의 장소 갈릴리, 우리와 예수님이 기억이 공유되는 그곳 갈릴리,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부름받고 쓰임 받기 시작한 그 소명과 사명의 장소인 갈릴리로, 그 삶의 자리로 가서 새롭게 출발하라 주님 말씀하신다! 갈릴리로 가자! 가서 부활의 주님을 뜨겁게 만나고 사명 받아 세상속으로 나아가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삶으로 증거로 열매로 보여주고 실천하는 사명지향적 성도, 사명지향적인 예수 제자, 사명지향적인 주의 자녀가 되자! 이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러 갈릴리로 가서 다시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하고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존귀한 자녀 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여 세상으로 복음들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로 사명 지향적으로 한 평생 살아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귀한 주의 자녀들 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