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복음! 다시 십자가! (25)                                                              (2024. 06. 23)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누가복음 10:25-37)


1. 율법교사 (25-26절)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오늘 본문 말씀은 한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 로 시작된다. 그가 예수님에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예수님을 시험할 의도로 영생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속의 시험의 의도를 읽으시고 율법교사 자신이 스스로 답하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라고 물으신다! 율법학자 인고로 율법에는 정통하고 있으므로 그가 스스로 답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만 물으셔도 될것인데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시험하는 의도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한마디를 더하시니 그것은 네가 어떻게 읽느냐? 라는 말씀이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정답이고 모범답안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는 그 율법교사의 질문에 “네가 알기는 잘 알고 있구나”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라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눅 10:28) 
      배운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으며 사회적 지위도 있는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도구로 쓰임 받고 있다. 그의 해박한 율법에 대한 지식은 율법에서 말하는 영생의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한다. 그런데 이 율법학자의 문제는 무엇인가? 아는 것은 있는데 행함과 실천이 없다. 지식은 있는데 그 지식이 머리와 입에만 머물지 가슴과 손발로 옮겨오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도 이런 율법교사 같은 머리와 입만 살아 있는 성도가 이 땅의 교회에 얼마나 많을까? 성경은 잘 알고 지식은 있는데 자신의 것을 주는 행함은 없고 사랑하자고 말은 하는데 삶의 실천은 여름 가뭄에 계곡물 마르듯이 완전히 말라버린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이 입만 살아 있는 율법교사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 행함과 실천은 없는 율법교사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면 살수 있다는 예수님 말씀에 또 꼬투리를 잡고 들어가며 질문을 한다. “그렇다면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해 주시니 그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말씀이다!  

2. 내려가다가(3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여리고는 예수님 오시기전 9천년 전 경부터 형성된 아주 오래된 고대도시 이다. 그런데 이 여리고는 해발고도가 252미터 즉 바다의 해수면보다도 무려 252미터나 낮은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 라 칭해진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해발고도 760미터 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여리고는 직선거리로 25키로 미터 가량 되는데 실제 도로상으로는 약 40키로 이상의 거리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의 이웃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말씀하신 이 비유의 말씀에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다는 표현은 일차적으로 고지대의 예루살렘에서 저지대인 여리고로 내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라는 표현에 주목해 보자!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 단순히 지형적으로 고지대 예루살렘에서 저지대 여리고로 가는 길이니 내려갔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도만난 상황에 그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었다고 예수님은 표현하셨다. 
      모든 성경의 표현에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내려 가는 것을 금하고 계신다. 창세기 26장 2절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또한 시편 30편 3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회복을 위해 올라갈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 중에 대표적인 말씀은 창세기 35장 1절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또 성전이 높은 언덕에 위치하여 시편은 120-134편 총 15편의 표제들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말하고 있으며 시편 122:1과 4절에 그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우리 교회는 언덕위에 위치해있다. 해발고도가 얼마쯤 되는지 아시는가? 해발고도 40미터로 생각보다 그리 높진 않다. 그러나 인근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 하고 있다. 얼마전 우리 교회 수요 예배에 강사로 오셨던 서울장신대 김정 교수님께서 지하철 역에서 나와 언덕을 올라오며 마치 구약시대 언덕에 있는 성전에 올라가는 감동이 들어 교회 위치부터가 은혜였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벧엘로 올라가고 성전으로 올라가고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야 산다! 마귀는 우리를 내려가게 만든다. 여러 가지 근심과 걱정, 육신의 질고와 어려움 등으로 우리를 내려가게 만들어 큰 해를 끼치려 한다. 그럴 때 일수록 벧엘로 올라가고 성전으로 올라가고 하나님의 집으로 주의 전으로 예배의 자리로 올라가서 하나님 만나 승리하는 주의 자녀들이 다 되시라!

3.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6-37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 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간다. 그 두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쓰인 표현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피하여 지나가다”라는 표현이다. 이들은 신음하고 있는 강도만난자를 보고 부근에 강도가 숨어 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중간에 돌발적인 일이 생겨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할수 있었을수도 있다. 또 레위기 21:1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시신을 만져 부정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수도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레 21:1) 
      아! 그런데 시신이어서 부정하다 생각해서 멀리서 보고 피하여 돌아가는데 그 사람이 살려주세요! 하고 작은 신음 섞인 소리를 낸다. “아! 저 사람은 시신이 아니고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이구나! 살아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시신이 아니기 때문에 만져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가까이 가서 도와주는 것이 오히려 율법에 맞는 행동이다. 그런데 아! 나는 들은 바가 없다. 저 사람은 시체다. 그러니 만지면 부정하다 라고 되뇌이며 애써 강도 만난자의 신음 소리를 외면하고 그 자리를 피하여 지나간 이가 제사장과 레위인이었다. 그러나 한 사마리아 사람은 멀리서 이 사람이 쓰러진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갔다고 말씀은 증거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로 급히 응급처치를 하고 이 강도만난이를 짐승에 태어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다음날 길을 떠나며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강도 만난이를 잘 돌보아주고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오는 길에 그것을 갚겠다고 까지 말을 한다. 
      우리 주님은 강도 만난 이를 살려준 선한 사마리아 인처럼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그리고 우리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우리를 살려주시고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것이 어떤 상처든지 어떤 문제든지 궁극적인 해결자는 우리 주님 뿐이시다! 그러기에 삶의 질고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 상황과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쓰러져 있지 말고 믿음의 오뚜기가 되어 주님만 바라보며 그 주님 손 잡고 벌떡벌떡 일어나는 주의 자녀들이 다 되시라! 
      그래서 그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회복의 은혜를 힘입어 세상으로 나아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삶으로 실천하여 이 땅의 또 다른 강도 만난 이들을 살리는 선한 사마리아인들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