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복음! 다시 십자가! (34)
질그릇 인생 고후 4:5-18
예화) “빠꼼이”라는 별명의 가진 선생님께 만화책을 빼앗겨 화가 난 여고생의 혼잣말을 우연히 들은 엄마가 그 학생이 염려가 되어 교무실에 찾아가서 박곰희 선생님을 찾았다는 이야기
1. 전해야 할 것
오늘 말씀은 고린도후서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인데 고린도는 그리스 중남부의 반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약 인구 3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행정구역 아가야의 수도였고 총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인구가 60만 명에 달하는 큰 항구도시로서 지중해의 동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무역의 중심지가 되다보니 음란과 향락의 도시가 되어버렸다. 사도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인 주후 50년경 고린도의 타락과 부패를 목격하고 1년 반가량을 그곳에서 머물며 복음을 전하여 고린도교회를 세웠다. 긴 기간 동안 정성을 세운 고린도교회는 내부의 분파 문제, 음행의 문제, 바울의 사도권에 도전하는 문제, 은사의 문제, 우상의 제물 문제 등 여러 문제들을 안고 삐걱대고 있었다. 사도바울이 교회 안에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교의 영향을 크게 받은 무리들이 바울의 대적자를 자처하며 바울의 사도권 문제와 바울의 복음에 대해 비방을 하는 가운데 바울은 바울 자신과 동역자들은 오직 복음만을 전하고 있음과 예수를 위하여 스스로 성도들의 종이 되었음을 증거한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고 주님이시라는 것은 복음의 핵심이면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구호이자 모토였다. 사도바울의 이 고백적 선언은 복음전파의 과정에서 도구에 불과한 사람이 드러나고 사람이 높아지면 안 된다. 자기를 드러내는 최고의 모델인 사탄마귀는 오늘날도 자기를 드러내고 높이는 교만의 미혹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있으나, 자기를 낮춘 최고의 모델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날도 늘 낮아지고 낮아지고 낮아지는 겸손한 모습으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그 복음과 그 복음을 따르는 교회 가 되기를 우리에게 원하고 계신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었다고까지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예수를 위하여 그 예수 때문에 만인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최고의 순종과 겸손의 길을 걸으신 주님을 따라 그 예수님의 주되신 것과 구원자 되심을 만방에 전해야 한다. 늘 주님 걸으신 십자가의 길, 그 좁은 길을 주님 손 붙잡고 겸손하게 걸으며 그 예수님의 주 되심과 우리가 그 예수를 위하여 만인의 종이 됨을 입술로도 전파하고 행동으로도 실천하는 복된 주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복한다!
2. 질그릇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셨다. 그러기에 우리의 시조인 첫 사람 아담(אָדָם) 의 이름의 뜻이 바로 흙 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단어인 아마다 (אֲדָמָה) 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즉 아담 이라는 이름의 뜻은 사람이라는 뜻 과 더불어 흙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 인생이 길면 90년 100년의 삶을 살지만 언젠가는 한 줌의 흙 아다마로 돌아가고 말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예화) 미국 일리노이 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수였던 해리 몬슨 박사의 해부결과 인간의 가치에 대한 소개. 그 당시 계산으로 인간의 몸은 성분을 분해하면 약 8.37 달러의 가치가 있고 인플레이션으로 6년 동안 약 1.09달러가 올랐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인간의 몸을 그 구성성분으로 분해하면 오늘날의 환율계산으로 약 11,000원 가량 된다는 계산이다. 칼슘, 인, 칼륨, 유황, 마그네슘 11000원 밖에 되지 않는 것이 과연 우리의 인생의 값어치인가? 이것이 우리의 본질적인 요소인가?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도 우리에 대해 질그릇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금그릇, 은그릇, 놋그릇 여러 그릇이 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질그릇일까? 한 자료에서 신약시대의 질그릇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는데 정말 적절한 표현이었다. 질그릇은 당시 사회의 종이컵이다라는 말이었다. 이보다 더 확실한 표현이 있을까? 고대사회로부터 초대교회 시대에 이르기까지 질그릇은 대충 흙으로 구워서 대량생산하여 편하게 쓰다가 버리는 그런 종이컵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예화) 한양대 국문과 교수였던 윤석산 시인의 시, 질그릇.
지지리 못난 질그릇 하나
세상 한 귀퉁이,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토기들도 고려청자 조선백자 같은 것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어 가치도 높고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지만 질그릇은 시대가 흘러도 가치도 없고 관심을 두는 사람도 없다. 시인은 우리의 삶을 조명마저 다소 비켜간 자리에 놓인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못난 질그릇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냥 하나의 질그릇으로 종이컵과 같은 인생으로 그저 그렇게 사라져버릴 만 천 원짜리 인생들인가?
3. 보배를 담은 질그릇 인생
사도바울은 질그릇 이라는 가치 없는 하나의 용기에 보배가 담겨있다는 극명한 대조를 통해 인간의 무가치함과 인생의 덧없음에 예수님의 복음의 영원까지 이어지는 그 사랑과 은혜를 드러낸다. 여기서 ‘보배를’이라고 쓰인 말은 헬라어 데사우론(θησαυρον)이라는 단어이다. 이 말은 보물상자, 보물을 담는 창고, 보물 , 보화 등의 용례로 사용되었다. 보물로서의 의미는 금, 은, 다이아몬드등 정제와 제련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닌 귀중한 보석을 의미하였다.
우리의 만 천 원짜리 질그릇 육신이 그 값을 알 수 없는 소중한 그릇으로 변화 받을 수 있음은 바로 우리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라는 놀라운 보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 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셔서 구원받으신 여러분, 그러기에 여러분은 만 천 원짜리 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만큼의 가치가 있는 귀한 분들이심을 꼭 기억하시길 바란다!
예화) 베드윈족 목동 소년이 1946년의 어느 날 사해에서 2키로 정도 떨어진 한 동굴에서 황토항아리에 담긴 구약 사해사본을 찾은 이야기
아무것도 아닌 투박한 황토항아리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수 천 년 동안 담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돈으로 셀 수 없을 만큼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그와 같다. 우리는 만 천 원 밖에 안 되는 원소로 구성된 질그릇 같은 인생들이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보배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를 우리에게 담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새로움으로 인해 우리도 새로워지고 그분의 귀함으로 인해 우리도 귀하게 되고 그분의 영광으로 인해 우리도 영광스럽게 되는 놀라운 복과 은혜를 받게 되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져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며 하루하루 천국소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거룩하고 귀한 주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복한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질그릇 같은 우리가 예수 모심으로 이렇게 변화되었음을 말씀한다. 우리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고 처음은 말씀대로 읽고 두 번째 읽을 때 너희 부분에 본인의 이름으로 넣어서 이 말씀을 받들어 읽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다! 아무 필요 없는 질그릇 같은 종이컵 같은 인생에 불과하던 우리가 예수와 복음 이라는 그 보배를 담음으로 우리는 주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되었다. 나의 질그릇 인생을 보석 같은 인생으로 찬란하게 바꿔주신 그 예수, 그 복음, 그 십자가를 전하며 오늘도 내일도 사명 감당하며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분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축복한다! 그래서 이성봉 목사님은 허사가 마지막 절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우리희망 무언가 뜬 세상영화 분토같이 버리고 주님 따라가
천국낙원 영광 중 평화의 생애 영원무궁 하도록 누리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