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복음! 다시 십자가! (37)
고 향 (누가복음 16:19-31)
유머) 오래전 어떤 믿지 않는 집 며느리가 쓴 명절 때 속 터지는 일 11가지 이야기
이제 시대가 바뀌고 보니 실제 시댁에서 일하는 며느리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이제는 오히려 시어머니들이 며느리 눈치를 봐야 하는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사랑과 가족의 따스함을 되새기는 명절은 세파에 지친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복된 시간이다. 그러기에 이번 추석 즈음에도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족친지의 사랑을 마음껏 누리시고 또 우리에게 생명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시는 복된 시간들 다 되시라! 추석날을 앞두고 고향을 향해 가는 많은 귀성인파를 생각하며 우리의 영원한 고향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자.
1. 한 거지와 부자 나사로 (19-21절)
누가복음 16장은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16장에 1-13절에 처음 기록된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나 14-18절에 기록된 바리새인과 율법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19-31절에 기록된 오늘 본문의 말씀 모두는 부자와 돈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16장을 전체에 공유되고 있는 이미지는 바로 재물이다. 누가복음 16장의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13절 말씀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로 하나님을 섬겨 영생에 이른 한 사람과 재물만 섬겨 영벌에 이른 한 사람의 극명한 대조가 나타나는 비유의 말씀을 해 주시니 그것이 한 부자와 거지 의 비유의 말씀이다. 먼저 한 부자가 나온다. 이 부자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적혀 있지 않다. 이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 요즘 말로 하자면 명품 브랜드에서도 한국에 한 벌 씩만 들어오는 리미티드 에디션 같은 그런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또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고 말씀은 기록한다. 그의 물질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 들었고 또 그도 그런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며 즐기고 살았음을 말하고 있다. 남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이른바 상위 1% 슈퍼 리치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거지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 거지는 부자와 달리 이름이 명시되어있는데 그 이름이 나사로 라 한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에서 이름을 가진 인물은 본문의 나사로 한명 뿐이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그 거지 의 이름을 명명 하신 것은 분명히 이름에서 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비유속의 거지 나사로는 요한복음 11장에 등장하는 죽은 지 나흘 만에 예수님의 기도로 살아난 그 나사로와는 다른 동명이인이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성경에 총 70번 나오는 히브리 이름 엘르아살의 헬라어식 표기 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자, 또는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대로 세상에서는 그를 도울 분은 하나님 밖에 없었다.
나사로는 남들이 보기에 눈살을 찌푸릴 만큼의 심각한 피부병에 걸려 있었다. 그러니 그 몰골이 얼마나 사나웠겠는가? 그런 비참한 몰골을 하고 부자 집 앞에 버려져 있었다. 부자와 종들은 집을 드나들면서 나사로를 다 보게 되었다. 그래서 나사로의 존재를 다 알고 있었지만 이들이 나사로를 보는 관점은 단 하나였다. 무관심 이었다. 있든지 없든지 집안에서는 왁자지껄 사람의 즐기는 소리와 여러 가지 요리를 하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을 때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좀 가져다주었으면 하는데 어느 누구도 거지 나사로에게 음식 한 점 가져다주지 않았다. 사람들을 흉악한 몰골에 진물이 흐르고 있는 나사로를 피해 다니며 무관심했는데 그런 나사로를 알아주는 유일한 친구 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들은 바로 떠돌이 개들 이었다. 들개들은 나사로의 주위에 모여 들어 나사로가 기력이 없어 쓰러져 있으면 나사로의 피부가 헌 곳에서 나오는 진물을 핥아 먹었다. 부잣집 앞의 거지 나사로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개들의 관심만 끌고 있는 외로운 인생의 실패자요, 패배자요, 한명의 루저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순식간에 뒤집히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2. 결국 가게 되는 곳 (22-23절)
어느 날 나사로가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병에 들었는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살았을 때도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던 나사로의 마지막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쓸쓸하게 어느 길거리 한구석에서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기에 성경 말씀도 이에 그 거지가 죽어라고 표현하며 나사로를 위한 어떤 장례도 진행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그때 늘 좋은 것만을 먹으며 당대 최고의 의사들에게 건강관리도 받았던 상위 1% 부자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최고의 명품수의를 입히고 성대하고 장엄한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기에 이 부자에게는 거지 나사로에게는 사용하지 않았던 한 단어가 더 추가 되었으니 그것은 부자가 죽어 장사되매 라고 장사되매 라는 말이 추가 되어 있다. 살아 있을 때는 모든 사람의 무관심 속에 비참하게 살다가 죽을 때도 무관심 속에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만 거지 나사로는 그의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면서 버려진 상황에서 180도 변화 되었다. 바로 천사들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나사로는 영광중에 천사들과 함께 천국으로 올라가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도 이 세상 떠날 때 천군천사가 우리 앞에 나타나서 우리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할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거지 나사로가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 들어갔다 하는 표현은 나사로가 낙원 즉 천국에 들어갔음을 말하고 있다. 땅에 살 때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고 무관심 속에 죽어간 나사로가 죽는 순간부터 천사들과 벗하며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완벽한 반전을 경험하고 있다. 무관심속에 무일푼으로 비참히 죽어간 나사로,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개들의 친구에 불과 했던 거지 나사로가 이제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어 영생복락 천국에 들어갔다. 그런데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살았던 슈퍼리치 부자는 다음 세상에 자신이 가진 물질을 하나도 가져갈 수 없었다. 그 물질들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투자하며 관리를 했겠는가? 그 아까운 것들을 다 놔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이러한 부자의 모습을 통해 이 세상의 부귀와 물질의 허망함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돈과 물질의 노예가 되어 한 푼이라도 더 가져보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 물질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그 세상을 떠난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내세에는 일 원짜리 하나 가져갈 수가 없다. 명절을 맞이하여 가족들이 모이면 그간의 안부를 묻다 불필요한 질문들로 상처를 줄때가 있다. 또 어떤 형제나 친지들, 동창들은 경제적으로 못 본 동안 경제적으로 잘 풀렸는데 나와 우리 가정은 그렇지 못함에 스스로 상처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디모데전서 6:7-8절 말씀을 기억하여 주신 것에 대한 자족함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회가 되시길 바란다.
유머) 조상 잘 만나 조상 덕 본 사람들은 해외여행 가고 없고, 조상덕 1도 못 본 사람만 음식상에 절하고 집에와서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
당시의 슈퍼리치 부자는 이 세상에 살 때 자신이 가진 부를 나사로나 이웃에게 베풀지 않고 그저 자신의 쾌락을 위해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다가 음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본문 23절에 기록된 음부는 헬라어 하데스(αδης) 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을 구약에서는 스올 이라는 히브리어로 표현된 곳이다. 음부 곳 하데스는 꺼지지 않는 불 가운데 영원히 벌 받으며 고통 받는 곳이다. 이 부자의 고통을 본문 24절은 죽음 이후에 가는 영의 세계에서 고통도 느끼고 말도 할 수 있도록 그 의식이 온전히 유지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혹자들은 주님 재림하시는 백보좌 심판의 때까지 구원받는 자나 받지 않는 자나 마치 전기가 나가서 불을 켤 수 없는 블랙아웃, 또 무대에서 다른 막으로 옮겨갈 때 불을 끄는 암전의 상태처럼 의식의 불이 완전히 꺼져서 무의식의 상태에서 그 부활의 때와 심판 때를 기다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그 주장은 깨어진다. 음부에 와 있던 부자는 음부 즉 지옥의 불꽃 가운데 극심한 고통을 받고 괴로워하고 있다 말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사후에 구원 받지 못한 이들이 결국 들어갈 지옥에는 불이 가득 차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사랑하는 주의 자녀 여러분 100년도 못사는 우리의 한번 사는 일생이 끝이 아니다. 그 이후에는 분명히 다음 세상 내세가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가게 될 지옥도 있다. 세상은 지옥을 애써 부정하며 말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공포스럽고 무섭고 고통스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은 실재하고 있기로 우리는 이번 추석 명절을 통해 우리의 가족, 자녀들, 친지들, 친구들이 다 예수 믿도록 전도의 기회로 삼으시라! 내년에 해야지 하다가 내년 추석에 갔는데 그가 이 세상에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복음전파의 기회가 계속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기에 바로 지금 전도하시라! 그 영혼이 지옥가지 않도록 예수 십자가 복음을 전하시라! 뒷일은 성령님께서 감당하실 것이다! 그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상황이 되든지 안 되든지 그 영혼이 지옥 가는 것은 막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를 통해 한 영혼이라고 지옥 갈 영혼이 천국으로 옮겨져 하늘나라 상급 쌓는 귀하고 복된 주의 자녀들이 다 되시라!
3. 우리가 돌아갈 곳 (25절)
예화) 고향에서 얻는 위로와 힘을 충전받기 위해 귀농하셔서 두 달정도 재충전하고 오시겠다며 기도받으시던 한 안수집사님의 이야기
예화) “향수”라는 시를 쓰셨던 정지용 선생의 “고향”이라는 시 이야기
시인이 세월이 흘러 고향을 찾아갔던 모양이다. 고향의 산꿩, 뻐꾸기, 흰 점 꽃, 풀피리 소리, 하늘은 그대로 인데 세월이 흘러 고향을 찾은 자신은 변하고 말았기에 그 세월로 인해 잃어버린 고향의 느낌에 대한 상실감과 슬픔을 잔잔히 노래하고 있는 아름다운 시이다. 고향산천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하고 말았다는 것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힘들고 부족하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는 결국 땅에서 무관심의 대상으로 살았던 그 나사로가 완전히 반전되어 들어갔던 그 영생복락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고 더 힘을 내시길 간절히 바란다. 거지 나사로를 보시라! 이 땅에서 “을”이어도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며 이 땅에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무관심의 대상이어도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며 이 땅에서 개들의 친구였어도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의 부자와 같은 자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하며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 자들, 오늘도 가면을 쓰고 예수 이름을 팔아먹는 예수 장사꾼들 그런 모든 자들과 진정 십자가와 복음을 붙든 우리와 결국 갈 곳이 다르다. 그곳에 갈 수 있는 사람에 대해 우리 주님 이렇게 말씀 하셨다! 마태복음 7장 21절의 말씀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가 결국 가야 할 곳, 우리가 결국 가게 되는 곳, 천국은 가도 좋고 안가면 말아도 되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돌아갈 우리의 영적고향 천국에 꼭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 잘 믿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여 그 천국에서 주님과 먼저 가신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서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하는 영광을 다 누리시고 꼭 누리시는 주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