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4일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딤후4:6-18)

예화) 시내버스 속에서 있었던 일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만남을 하게 되는데 우리의 만남이 어떠해야할지 오늘도 디모데후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1. 달려갈 길
 신약성경 속의 인물중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가 뭐라해도 사도 바울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고 당대 최고의 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실 때는 예수님을 직접 뵙지 못하고 반대편에 서 있다 오히려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된 스데반 집사의 순교의 장면에 돌을 던지는 이들의 옷을 맡아주는 일을 하며 교회를 핍박하는 악한 일의 참여자가 되고 만다. 
 옷감이 귀했던 시절 한 벌뿐인 겉옷은 그 사람의 사회적 권위를 상징했다 한다. 즉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드러났다. 그렇기에 옷을 사울의 앞에 두었다는 것은 단순히 사울이 스데반 순교 사건의 방관자나 공범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로마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사람을 죽였을 때 생겨날 문제의 방지를 위해 당시 로마의 시민권자인 사울 앞에 의도적으로 겉옷을 벗어놓고 돌로 스데반을 쳐 죽였고 이것을 봤을 때 바울의 재가 혹은 암묵적 동의하에 스데반은 순교하였다는 것이다. 즉 사울은 스데반 순교사건의 단순한 공범이 아니라 주동자 또는 리더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 하는 해석도 있다. 정확한 것은 천국 가서 바울을 만나 확인해야 하겠지만 확실한 것은 바울은 다메섹 으로 가는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복음전파의 큰 장애물이었다. 그런 그가 주님을 만남으로 죄인 중의 괴수에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극적으로 변하여 놀랍게 쓰임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무려 3번에 걸친 선교대장정을 하며 오늘날의 지중해 인근 소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놀라운 사역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세웠거나 관여한 교회와 또 자신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독려하기 위해 옥중에서까지 편지를 썼으니 그것이 바로 신약성경에 13권이나 실려있는 바울서신이다. 그 13권의 서신서 가운데 눈물의 서신 이라 불리는 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디모데후서이다.  
디모데후서는 눈물이 없이는 볼 수 없는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으로 쓰여진 서신서이다. 4장에 불과한 디모데 후서이지만 바울의 정황을 알고 그 내용을 묵상할 때 구구절절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치고 바울의 복음과 교회를 향한 사랑과 열정이 배어 있는지 이루 말할 수 없다. 
 지금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두 번째로 투옥된 상태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번 투옥에서는 석방되지 못하고 주의 복음을 위해 순교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마지막 유언을 글로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적고 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전제(奠祭: Drink Offering)는 모세의 제사법 가운데서 항상 다른 제사에 추가되어 마지막 단계에 드리는 제사로서 포도주나 다른 술을 하나님의 제단이나 제사제물위에 부어 드리는 제사를 말하고 있다. 
 바울이 자신이 전제와 같이 부어진다는 표현을 씀은 자기 생이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자기 삶과 피, 땀, 눈물을 포함한 마지막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서 이제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라고 주님 앞에 설 그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떠나다는 표현에 쓰인 헬라어 아날뤼오는 군대가 진을 철수하는 것, 배가 부두를 떠날 때 항구에 묶여있던 닻줄을 푸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육신의 유한한 세상을 떠나 영원한 세계로 새롭게 출발하는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드러내고 있다. 
 당대 최고의 기술로 세워진 건축물도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고 쇠로 만든 기계도 오래되면 망가지듯이 우리 육신의 장막집도 어느 때엔가 한번은 허물어지고 떠날 시각이 가까워졌다고 고백하는 바울처럼 이 땅의 항구에서의 닻줄을 풀고 영원한 세계로 새 출발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우리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모습이 믿는 자의 귀감이 되는 덕스러운 모습이 되도록 준비하시길 바란다. 또한 주님 앞에 섰을 때 자신 있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의 복음 전파를 위해 세상에서 행한 일에 대해 내어놓고 자랑할 수 있도록 삶의 자리에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귀하고 복된 주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축복한다! 2. 세상을 사랑한 사람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순간이 다가올 때 여러분의 곁에 누가 있기를 원하시는가? 대부분은 사랑하는 가족과 아내 자녀들일 것이다. 바울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주의 일을 감당했기 때문에 자신의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까지 칭했던 디모데가 죽음이 임박한 자신을 만나고 또 자신의 곁에 있어 주기를 원했다.  
 그렇게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속히 자신에게 올 것을 간청하면서 이제 자신의 마지막 속 이야기를 디모데에게 전한다. 그 속이야기 중 첫 번째는 데마 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언과도 같은 편지를 쓰면서 빠뜨리면 안되는 마지막 당부에서 첫 번째 나오는 인물이 데마 였다는 것다는 것은 데마와 관련된 일이 바울의 가슴 속 깊이 새겨져 있고 꼭 그일을 디모데에게 당부하고 싶은 그의 의중이 드러난 것이다. 
 데마에 대한 바울의 평은 부정적이다.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평한다. 그냥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가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표현은 사도바울이 데마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음을 드러낸다. 데마는 원래 바울의 곁에서 바울의 심복처럼 활동했었다. 
 그런데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고 바울이 2번째로 감옥에 갇히게 되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 데마는 바울을 버리고 세상으로 향해 떠나버리고 말았다. 세상을 사랑하였다는 표현을 봤을 때 데마는 아예 신앙을 다 버리고 세상으로 떠나버렸음을 알 수 있다. 한때 믿음의 동역자 였던 데마가 믿음의 변절자요 배신자 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데마의 변절과 배신은 사도바울에게 크나큰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데마의 이런 변절을 첫 케이스로 디모데에게 알리면서 경종을 울리고 있다. 바울의 데마의 만남은 그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좋지 않은 그런 만남이 되어 버렸다. 
 한때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 였던 데마가 주님과 복음, 바울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서 이처럼 추악한 자의 모습으로 지금까지 전해짐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끝까지 좁은 길 십자가와 복음의 길에 설 것인가? 아니면 편안하고 세상의 길 넓은 길에 설것인가? 그 선택의 순간에 넓은길로 세상길로 떠나버린 데마처럼 되지 마시고 끝까지 십자가의 좁은길에 서서 주님의 자랑거리 되는 귀한 주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축복한다! 

3. 복음 전파에 유익한 사람    
 세상으로 떠나버리며 바울을 버린 데마에 대해 큰 실망을 한 바울은 대조적으로 마가에 대해 이야기 하며 그를 데리고 올 것을 디모데에게 요청한다. 그러면서 그를 칭찬하는데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는 표현을 한다. 실상 마가는 바울일행과 함께 동행하였는데 여행중간에 바울과 의가 상하여 바울을 떠나 버렸다. 즉 마가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의 옥의 티 였다. 그래서 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 했을 때 마가를 또 데리고 갈것이냐 말것이냐는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는 논쟁하게 되고 마가를 용납할수 없었던 바울은 이 일로 바나바 대신 실라를 데리고 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처럼 좋지 못한 관계로 끝나버릴 수 있었던 바울과 마가와의 관계가 서로 회복되어 바울의 유서와도 같은 글에서 바울이 세상을 떠나기전 보고 싶어하는 사람, 복음전파 사역에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마가가 적혀져 있음은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가? 그러니까 바울과 데마와의 만남은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좋지 않은 만남이었고 마가와의 만남은 중간에 문제가 생겼으나 그 마무리가 좋은 복된 만남이었다. 이처럼 사람이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서 사람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순간의 잘못된 판단을 한 그 어린 학생이 만일 그 시간에 그 어부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처럼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사도바울과 데마의 만남은 어떤 만남이었고 또 마가와의 만남은 어떤 만남이었을까? 우리가 주안에서 만나는 모든 만남이 손수건과 만남, 은혜로운 만남, 복된 만남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여러분이, 또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이 서로 서로에게 손수건과 같은 존재가 되길 간절히 축복한다! 
 가장 귀하고 복된 손수건 같은 만남은 또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만나는 만남이다! 그분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섬김을 기억하고 서로의 땀을 닦아주고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는 복된 만남들이 이어져 주안에서 늘 행복한 삶의 주인공들 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한다!